프리다 칼로의 사랑: 어느 지독한 평화의 끝
신영복 교수님의 회고에 보면 그런 얘기가 나와. 감옥에 있을 때 함께 지낸 수인 중에 ‘대의(大義)’라는 이름의 절도 3범이 있었다지.
신영복 교수는 그런 이름을 지어 준 아버지의 뜻과 지금의 수인의 모습을 대비하면서 ‘참 네 아버지 가슴 아프시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다가 하루는 넌지시 누가 그 이름을 지었냐 물어봤더니 대단히 기분 나빠하면서 광주 도청 앞 대의파출소에 버려졌기에 그 이름이 붙은 것이라고 대답했대. 신영복 교수는 이에 문자로 사람을 읽으려 했던 먹물로서의 관념성을 뼈아프게 자기비판하셨다고
하지만, 속물인 나는 좀 다르지. 살다 보면 그 이름과는 영 딴판으로 사는 사람이 많은 게 사실이더라고. 이름은 ‘온순’인데 천하의 가정폭력범인 사람도 있었고, 언젠가 만난 ‘성실이’처럼 천상천하 유일 백수인 경우도 있으니까. 1954년 7월 13일 죽어간 멕시코의 한 여성 화가의 경우도 그럴 거야. 그녀의 이름은 프리다 칼로였다.
평화라는 이름, 지옥 같은 삶
‘프리다’는 독일 말로(그녀 아버지는 독일인) 평화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일생 동안 그녀의 이름에 그녀의 삶이 도달한 적은 거의 없었어. 그녀의 삶은 차라리 전쟁이었고 형극이었으며 울퉁불퉁한 돌짝밭길이었지. 일단 그녀는 여섯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오른쪽 다리를 절게 돼. 보통은 이 정도만 되어도 안 됐다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게 마련이지. 부모 입장에서도 가슴 아픈 일이고. 하지만 프리다 칼로의 인생에서 소아마비 정도는 감히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시련일 뿐이었어.
의사를 꿈꾸던 열여덟의 여학생 프리다 칼로는 학교에서 사귄 남자친구와 함께 버스를 타고 가다가 가공할 사고를 만난다. 교통사고가 나면서 버스 손잡이 철봉이 그녀의 몸을 관통해 버린 거야 복부를 뚫고 국부를 관통해 허벅지에 구멍을 낸 이 무시무시한 사고로 그녀는 근 아홉 달 동안을 기브스한 채 천정만 지켜보고 있어야 했어.
그 망연하고 답답한 기간 그녀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 천장에 매단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움직일 수 있는 손만 움직여 그림을 그렸지. 이후 그녀는 평생 수많은 자화상을 남기거니와 병상에서의 자화상은 그 시작이었다고 해. “나는 나를 그린다. 나는 혼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제일 잘 아는 내 그림의 주제는 바로 나다.” 기적적으로 그녀는 걸을 수 있게 되긴 했지만 마치 꼬리를 내주고 다리를 얻은 인어공주처럼 걸을 때마다 뼛속 깊이 파고드는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는구나.
프리다 칼로의 「가시 목걸이와 벌새를 두른 자화상(1940)」 |
일찍이 멕시코 혁명(1910) 때 에밀리아노 자파타의 혁명군들에게 음식을 제공해주며 응원하던 어머니의 영향이었는지 그는 사회주의에 경도돼. 그는 멕시코에 망명한 쿠바 혁명가와 교분을 나누면서 그 혁명가의 애인이었던 사회주의자이자 사진작가인 티나 모도티와 우정을 쌓지.
그리고 그 티나의 소개로 누군가를 만나게 되는데, 바로 이 만남이 그녀의 인생을 버스 사고 이상으로 파괴하고 동시에 규정했던 사고로 연결된다. 그 누군가는 멕시코의 위대한 화가이자 사회주의자이자 혁명적 미술가 디에고 리베라였던 거야.
바람기 넘치는 남편과의 고통 속 사랑
리베라는 그녀의 그림을 보고 “프리다의 작품에서 예기치 않은 표현의 에너지와 인물 특성에 대한 명쾌한 묘사, 진정한 엄정함을 보았다. (…) 잔인하지만 감각적인 관찰의 힘에 의해 더욱 빛나는 생생한 관능성이 전해졌다. 나에게 이 소녀는 분명 진정한 예술가였다” 고 격찬해. 그러나 리베라가 감탄한 것은 그녀의 그림보다도 그녀 자체였다고 봐.
스물하나의 앳된 프리다와 마흔셋의 아저씨 리베라는 곧 결혼하게 돼.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합”이라고 반대하던 부모도 두 손을 들었지. 그러나 이는 프리다 자신이 얘기한 바대로 “버스 사고 이후의 두 번째의 대형 사고”였다. 둘은 서로 열렬히 사랑했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지 않는 예술적 동료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걸 방해한 것은 우선적으로 리베라의 가공할 바람기였어.
리베라의 별명은 ‘식인귀’였는데 해부학 교실에서 인육을 먹어 봤다는 그로테스크한 그의 자랑(?) 때문도 있지만, 진짜 이유는 워낙 많은 여자들과 닥치는 대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야. 프리다의 동생까지도 그 바람기의 희생양이 됐으니 프리다의 고통은 자심한 것이었다. 언젠가 프리다는 리베라에게 이런 그림을 보낸다.
침대 앞에서 웃옷을 피로 물들인 한 남자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그림을. 침대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자신의 저고리를 피로 물들인 채 말한다.
그냥 몇 번 칼로 살짝 찔렀을 뿐입니다, 판사님. 스무 번도 안 된다고요.
그러나 프리다는 리베라를 열렬히 사랑했고 리베라도 프리다를 떠나려 하지 않았어. 프리다는 품고 싶지만 품어지지 않는 남편과 아이에 대한 갈증(그녀는 사고 때문에 임신할 수 없는 처지였거든)을 그림으로 풀고, 또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관철하는 운동가의 열정으로 보충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에게 가장 큰 에너지의 원천은 디에고 리베라라는 남자였어. 그녀의 사랑은 불가사의해 보이기까지 해.
물론 그녀도 맞바람을 피우기도 하고 멕시코에 망명온 우상같은 혁명가 트로츠키와 존경과 사랑이 뒤섞인 감정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그녀는 리베라를 벗어나지 못했어. 그녀를 결정적으로 무너뜨린 것은 리베라의 이혼 요구였어.
나의 아이 디에고, 나의 약혼자 디에고, 화가 디에고, 나의 연인 디에고, 나의 남편 디에고, 나의 친구 디에고, 나의 어머니 디에고, 나의 아버지 디에고, 나의 아들 디에고….
이렇게 일기를 쓰던 그녀에게 디에고의 이혼 요구는 삶의 기둥의 부러짐이었겠지.
당신의 심장 소리에 내가 갇혔음을 느낍니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
고통스러운 1년이 지나고 그녀를 잊지 못한 리베라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또 그를 받아들여 준다. (어이구 이 배알도 없는) 여자관계 정리와 서로의 독립성을 인정하는 조건이었지만, 리베라는 그 약속의 메아리가 가시기도 전에 다른 여자의 침대에 뛰어들고 있었어.
프리다는 리베라를 체념했지만 포기하지는 못해. 사랑하지만 자기 것이 되지 않는 남편, 병에 걸려 한쪽 다리를 잘라내는 고통, 몸을 부서뜨릴 듯 엄습하는 척추의 아픔 속에서 그녀는 그림을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위해 행동하게 되지.
그녀를 지탱하던 코르셋에 낫과 망치를 그려 넣었던 그녀는 라틴 아메리카의 반미 집회에 지속적으로 참석했고, 급기야 미국의 볼리비아 개입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석했다가 엄청난 비를 맞고 들어온 후 폐렴에 걸려 세상을 떠. 1954년 7월 13일이었다. 참으로 지독한 평화(프리다)의 종말이었다. 이렇게 많은 고통 속에서 이렇게 열정적으로,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한 사람을 나는 별로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디에고, 당신의 두려움과 당신의 고뇌, 당신의 심장 소리에 내가 갇혔음을 느낍니다. 이 모든 광기를 요구한 것은 나였지만, 당신은 나에게 호의를, 빛과 온정을 주는군요.
이제는 저승에서 만났을 디에고와 프리다. 디에고는 과연 그 바람기를 멈추고 자신의 인생의 여자였던 프리다에게 안착했을까.
필자 산하 (블로그)
마흔 넷의 직장인. http://nasanha.egloo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