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프롤로그
코미디언 김숙이 한 예능에 출연했을 때 일이다. 속물적인 질문을 하거나 무례한 질문을 가감 없이 함으로써 출연자들을 당황시키는 캐릭터의 한 연예인이 김숙에게 “얼굴이 남자 같이 생겼다”고 독설을 했다. 보통 이 경우라면 외모공격을 당한 상대 여자 코미디언도 자신의 외모를 웃음의 대상으로 희화화하거나 함께 웃고 말았을 텐데 당시 김숙의 대처는 평소 내가 보던 사람들과 달랐다.
김숙은 잠시 그를 지긋이 쳐다본 뒤 “어? 상처 주네?” 하고 짧게 내뱉었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느긋한 말투였다. 그러자 상대는 농담이라고 사과했고, 김숙은 미소 지으며 곧바로 “괜찮아요”하고 받아쳐 화기애애하게 화제가 전환되었다.
김숙의 이 같은 대처는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여자들은 일상에서 ‘얼평(얼굴평가)’ ‘몸평(몸매평가)’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다. 많은 경우 TV 예능에 출연한 여성들은 아름다워서 외모를 칭찬받거나 그와 비교되는 외모의 출연자가 있어 남성들로부터 놀림 받는 대립 구도가 자주 설정된다. 특히 여성 코미디언들은 ‘얼굴이 남자 같다’ ‘가슴이 작다’ ‘못생겼다’ 같은 농담을 들으며 자신의 외모를 희화화하거나, 그런 농담에 함께 웃어야 한다.
평소에도 이와 비슷한 경우, 여성이 기분 나쁜 티를 내면 “농담일 뿐인데 왜 이렇게 예민하냐”며 ‘프로불편러’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여성들은 그저 참는 방법을 택한다. 그렇게 참고 참다 불만을 토로하기라도 한다면 상대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걸 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줄 몰랐는데? 그럼 진작 말하지 그랬어?”
특히 나이 어린 여성의 경우, 한국의 권위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문화에서 어떻게 자기표현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상처받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불편함을 그대로 토로했다가는 이해받지 못할 것 같아 두렵고, 군대식 문화에 익숙한 남성에 비해 ‘조직 생활에 맞지 않는다’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게 될까 봐 속마음을 숨기는 편을 주로 택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곱씹는 것이다.
곱씹다 보면 결론은 나의 문제로 귀결된다. ‘내가 오해 살만할 행동을 했을 거야’ ‘그 사람은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거 아닐까?’ 그러다 보면 그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지나치게 예민한 나’만 남는다.
그렇다고 강하게 불쾌함을 표현하면 감정적인 사람이라는 평가를 얻기 쉽다(도대체 어쩌라고 싶지만 현실이다).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죠?” “저 지금 너무 불쾌하네요” 같은 표현은 명확하긴 하지만 보통의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시도하기 어렵다. 한국 정서상 연장자나 상사에게는 그 같은 표현을 더더욱 하기 힘들다.
어릴 때 나는 감정 표현의 적절한 농도를 몰라 관계에서 자주 실패했다. 그런 건 내게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논쟁 끝에 상대를 비난하는 말하기의 길로 빠지거나 분에 못 이겨 화를 내며 엉엉 울어버리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참고 참다 그냥 관계 자체를 끊어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항상 궁금했다. 무례한 사람을 만날 때, 어떻게 하면 단호하면서도 센스있게 의사 표현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까?
코미디언 김숙의 “상처 주네?”라는 표현이 특히나 오래 기억에 남았던 건 그래서였다. 간결하면서도 단호한 사실 그 자체인 이 말은, 상대를 구석으로 몰지 않더라도 화자가 말하고자 했던 바를 성공적으로 얻어냈다. 상대는 곧바로 사과했지만 상처 준 사람이 되었고, 김숙은 그걸 바로 아무렇지 않게 넘김으로써 쿨한 사람이 되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김숙에게 사과한 상대는 그동안 전혀 제지받지 못한 행동에 한 번 제동이 걸림으로써 ‘이 행동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걸 자각하는 기회를 얻었다. 그건 사실 그의 인생에서도 다행인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잘못인 줄 모르면 반복하기 마련이다. 높은 자리로 올라갈수록, 나이가 많아질수록 무례한 사람들이 많아지는 건 타인에게 제지당할 기회를 얻지 못해서이기도 하다. 수평적인 의사소통이 부족한 사회일수록 갑질이 횡행할 수밖에 없다.
참고: 김구라였습니다. |
김숙이 ‘가모장’ 캐릭터를 내세우며 “남자는 조신해야죠” “술은 남자가 따라야죠” 같은 반사 화법을 쓰는 것도 흥미로웠다. 그가 SNL코리아에 출연해 상사가 “왜 이렇게 예민해? 생리 중이야?”라는 말에 “그럼 부장님은 왜 이렇게 기분이 좋으세요? 오늘 몽정하셨어요?” 하고 받아친 것이 화제가 됐다. 김숙은 기존 속담을 패러디해 ‘남자 목소리가 담장을 넘으면 집안이 패가망신한다’ 같은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 같은 비틀기를 통해 사람들은 웃으면서 알게 되는 것이다. 원래의 언어가 얼마나 편견에 찌들고 폭력적인 말이었는지를.
김숙뿐 아니라 방송인 이효리에게서도 매력적인 화법을 보았다. 이효리가 한 예능에 출연했을 때, 그가 핑클로 활동하던 당시의 춤과 노래를 해달라고 요구하는 강압적인 캐릭터의 진행자가 있었다. 이효리는 그런 그에게 “옛날 스타일의 진행을 아직도 하시네요”라며 웃은 후 “요즘 사람들은 핑클 노래를 잘 몰라요” 하고 대꾸해 자연스럽게 그 요구를 비껴갔다. 이 진행자가 시대에 뒤쳐진 사람이라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이 받아쳤고, 이효리는 이 틈을 타 여유롭게 화제를 돌렸다. 유머러스하면서도 노련미가 보이는 대응이었다.
반면 한 유명 걸그룹은 예능에 출연해 애교를 보여 달라는 남성 진행자들의 요구를 받은 적 있다. 그러자 멤버들은 ‘애교를 보여주기 싫다’며 눈물을 터트렸다. 아마 오랫동안 그런 요구에 시달렸으리라. 멤버들이 갑자기 울자 방송 분위기는 얼어붙었고 해당 걸그룹은 프로답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으며 불필요한 오해를 샀다. 그들이 받았을 스트레스가 이해되면서도, 조금 더 노련하게 대응했다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 모습에서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아 더욱 마음이 쓰였다.
나오는 예능마다 노련한 대응을 보여줬던 이효리 |
우리는 일상에서 무례한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사람마다, 관계마다 다른 심리적 거리를 무시하고 갑자기 선을 훅 넘는 사람도 많다. 그런 이들에게 감정동요 없이 “금 밟으셨어요”하고 알려줄 수 있게 되려면 연습이 필요하다.
20대를 거쳐 오면서 나에게 상처 주는 사람을 참기만 하면 무기력해진다는 걸 알았다. 나는 나 자신으로 살고 싶었고,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걸 방해하는 외부 소음에는 여유롭게 음소거 버튼을 누르고 싶었다. 매일 조금씩 운동을 해서 몸을 가꾸듯, 자기표현의 근육을 키우는데도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 결과로 이제 나는 매일 밤 상대가 상처 준 걸 곱씹고 자책하는 걸 그만두게 되었다.
화내거나 울지 않고도 나의 입장을 관철시키는 방법이 있다. 이 책에서는 내가 시도한 훈련법 중 가장 효과 있었던 가이드와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들을 추렸다. 무례한 사람을 만난다면 기죽지 말자. 웃으면서 우아하게 상대에게 경고할 수 있는 방법들이 많으니까. 이 책이 무례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를 찾고 싶은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길 바란다.
필자 정문정
20대 미디어 '대학내일'에서 콘텐츠 디렉터로 일합니다. 20대, 여성, 인간 관계, 심리학이 주된 관심사입니다. 책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 『별로여도 좋아해줘』 를 썼습니다 . 잘 하는 것은 관상보기, 못 하는 것은 살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