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스활명수 VS. 까스명수
“식탁예절이 청학동인 우리 집에서도 코카콜라를 얻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밥을 먹다가 숟가락을 놓는 것이다. 그리고 손으로 배를 만지며 표정을 아련하게 한다. 그러면 엄마는 언제나처럼 코카콜라를 가져다줄 것이다. 문제는 엄마의 발길이 냉장고에 가지 않고, 찬장으로 향했다는 것. 마미손에 들린 그 음료는 코카콜라가 아닌 ‘까스활명수’였다. 이걸 어떻게 마셔요! 악악악!
… 그렇게 까스활명수의 맛에 빠지게 되었다. 어른이 되어도 나의 최애는 언제나 이 두 음료다. 마실 수 있는 것을 ‘음료’라는 범주에 넣는다면 ‘활명수’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음료 아닌가. 1897년에 만들어진 녀석은 조선시대를 경험한 유일한 음료(이자 약)다. 니들이 고종을 알아?
이것은 한약과 양약의 콜라보레이션, 활명수
활명수를 발명한 사람은 ‘민병호’다. 그는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지금으로 치면 청와대 경호실 간부)을 하고 있었다. 그는 단순한 무인이 아니었다. 일찍이 의학서적에 눈을 떠 한약에 능통한 힐러의 스킬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궁궐 근무는 임금님만 받을 수 있는 궁중 처방을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제중원을 통해서 최근 유행한다는 서양의학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대체 왜?
바로 모든 직장인의 꿈. 퇴사 후 인생 2막을 위해서다. 1897년 민병호는 공무원… 아니 선전관을 그만두고 평양에서 약방을 차린다. 이름하야 ‘동화약방’ 지금의 동화약품이다. 그의 히트작은 한약과 양약을 콤비네이션 하여 사용하기로 유명해졌다. 그렇게 만든 약품의 이름이 ‘활명수’다.
당시는 급체로 숨을 거두는 사람이 많았다. 일단 조선시대 사람은 한 끼를 먹을 때 우리보다 3배는 많은 양의 밥을 먹었으니까. 느긋하게 약효를 기다려야 하는 한약에 비해 우사인 볼트스러운 효과를 내는 활명수는 이름 그대로 ‘생명을 살리는 물’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활명수를 만병통치약이라고 불렀다.
활명수를 팔아 독립운동을 돕다
동화약방은 평양에서 서울로 거쳐를 옮긴다. 또한 1912년에는 민병호의 아들 ‘민강’이 어린 나이에 경영을 맡게 된다. 문제는 민강은 경영보다 독립운동을 더욱 했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업적 중 하나는 ‘서울연통부’라는 비밀 단체를 만든 것. 이곳은 서울에서 임시정부와 연락하여 독립운동 자금과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아지트 같은 곳이다. 바로 그 서울연통부를 동화약방 사무실에 위치시킨다. 하지만 1922년 일제에 발각이 되어 민강은 옥살이를 하게 된다.
동화약품 창립지에 만들어진 서울연통부 기념비 |
그렇다면 우리의 활명수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활명수를 북간도, 하와이, 일본으로 수출하는 일을 해내고 말았다. 사실 독립운동가들이 동화약품에서 활명수를 휴대해가서 현지에서 판매해 자금으로 쓰게 한 것이다. 수출마저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게 하는 그는 도대체…
독립운동을 지원함과 동시에 동화약방은 일제의 감시와 견제를 받는다. 사장인 민강 역시 갖은 고문과 감옥생활로 1931년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쓰러져가는 동화약방. 하지만 1937년 한 남자가 경영권을 사게 된다. 그의 이름은 ‘윤창식’이다. 그 역시 독립운동 자금을 만들던 사업가였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건강뿐만 아니라 민족의 건강을 생각하는 동화약방의 정신은 이렇게 이어져나간다.
활명수 최대 라이벌의 등장, 까스명수
활명수가 만병통치약이라고 불렸을 시절에는 보명수, 통명수, 회생수, 활명회생수 등이 시장에 등장했다. 동화약방은 활명수를 지키기 위해 1910년 8월 15일 우리나라 최초로 상표등록이란 것을 한다. 바로 ‘부채표’다. 이후로 사람들은 알게 된다. 부채표가 아니면 활명수가 아니란 사실을.
부채표를 모르면 한국인이 아닙니다 |
일제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도 지나쳤다. 하지만 진정한 적수는 1965년에 나타났다. 바로 삼성제약(그 삼성 아니다)의 ‘까스명수’다. 까스명수는 60년대 대중들이 콜라, 사이다를 즐겨 마시는 것을 보고 소화제에 탄산가스를 넣었다. 그렇다. 우리가 아는 활명수는 원래 탄산이 없었다.
동화약품(1962년에 동화약방에서 바뀜)은 처음에는 까스명수를 무시했다. 이 또한 사라지리라. 하지만 새롭고 청량감 있는 소화제의 등장에 활명수의 자리는 위협을 받기 시작한다. 대책을 세워야 할 때는 한 가지 결정만이 남았다. 70년 동안 지켜온 활명수를 지킬 것인가, 우리도 따라서 탄산을 넣을 것인가.
결국 대세를 막을 수 없었다. 동화약품은 ‘까스활명수’란 이름의 탄산 버전 소화제를 시장에 내놓는다. 안돼. 우린 망했어. 이젠 원조가 아니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결과는 대성공. 이미 소화제와 동의어인 활명수가 탄산 버전으로 나오자 사람들은 너도나도 까스활명수를 찾았다.
물론 나는 까스명수, 까스활명수, 박명수도 구분 못 했음 |
까스명수 최후의 작전, 약국을 탈출한다
2011년 까스활명수와 까스명수의 대결구도에 또 한 번 전환점이 찾아온다. 바로 정부에서 ‘의약외품’을 지정해 소화제나 감기약 중 일부를 편의점, 마트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허가한 것이다. 지금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는 휴일이나 밤에 약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일이 많았다.
발표가 났다. 까스명수 의약외품! 까스활명수 약품! 왜 명수는 되고, 활명수는 되지 않았냐고 물으신다면. 답해드리는 게 인지상정. 까스활명수에 들어가는 현호색이라는 재료가 식품이 아닌 약품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한발 먼저 마트와 편의점에 진출한 까스명수는 역전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결과적으로 그러지 못했다. 대세인 까스활명수가 약국에 있기에 사람들은 여전히 소화제는 약국에서 구매를 했다. 또한 까스명수는 대형유통사의 흐름을 타지 못했다. 그사이 동화약품에서는 ‘까스활’이라는 마트와 편의점용 까스활명수를 발매해 까스명수를 막는다. 사람들이야 까스활명수(큐)나 까스활이나 알게 뭐람?
변한 것과 변하지 않는 것, 활명수의 길
품절인데 있는 건 자랑. 못 입고 다니는 건 안 자랑 |
121년이 지난 지금도 까스활명수는 소화제 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이쯤 되면 오래된 브랜드 취급을 받을 법한데 여전히 쿨하다. 여러 브랜드, 아티스트와 콜라보레이션을 통해서 리미티드 에디션을 내놓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는 쇼미더머니 래퍼들과 뮤직비디오를 찍더니, 올해는 의류브랜드 게스와 함께 ‘게스활명수’라는 옷을 냈다. 굳이 왜 이걸 쓰냐면 지금 게스활명수 티를 입고 글을 쓰고 있거든(자랑).
하지만 활명수의 진짜 가치는 변하지 않는 것에 있다. 활명수는 지난 2013년부터 다양한 비정부기구(NGO)와 협약하여 물 부족 국가 어린이들에게 깨끗한 물을 전달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름하야 ‘생명을 살리는 물’ 프로젝트. 바로 활명수의 이름 자체에 집중한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활명수. 나는 활명수가 단순히 약이나 음료를 넘어 ‘생명을 살리는 물’이 되기를 바란다. 오래되었지만 믿음직하고, 무엇보다 답답한 현실의 답답함을 뚫어주는 진짜 소화제의 발걸음을 응원해본다.
PS.
마시즘 구독자 ‘노모뎀’님이 제보를 해주었다. 동화약품 유튜브에 올라온 1967년 활명수TV에 이를 실제 제작했다는 당시 미군이 댓글을 단 것이다. 외국인이 두루마기를 입고 치킨 뜯고 활명수를 마시는 힙터지는 아이디어는 그냥 제작여건 때문에 그런 것인가…! 물론 실제일지 아닐지 모르겠지만 기록으로만 전달되던 콘텐츠에 당사자가 나타나는 것은 너무나 새롭고 흥미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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