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째 한 명도 없다’ 유독 여성 임원이 없다는 업계
주식, 펀드, 채권 등의 투자 업무와 자산 관리 업무는 무엇보다도 운용하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성과가 좌우됩니다. 즉 핵심 경쟁력이 바로 맨파워인 셈이죠. 능력과 성과주의에 기반한 인사 체계를 자랑하는 증권업계이지만, 여성들에게만은 유독 승진이 까다롭습니다. 지난 12월 13일 금융감독원에 공시된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대형 증권사 5곳(미래에셋대우, 한국투자증권, NH투자증권, 삼성증권, KB증권)의 올해 3분기 기준 여성 임원 숫자는 전체 임원 295명 중 14명으로 고작 4.7%에 그쳤습니다.
이러한 금융업계 내 여성 유리천장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한국투자증권입니다. 한국투자증권은 지난 2010년 2월 말 유일한 여성 임원인 박미경 상무가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지금까지 10년째 사업보고서상 등재된 여성 임원이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주요 금융지주와 은행 등을 포함하고 있는 금융업계도 상황은 다르지 않습니다. 국내 11곳의 금융지주, 은행의 여성 임원 비중은 전체 임원 132명 중 7명으로 5.3%에 불과해 여전히 한 자릿수에 그쳤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11곳의 전체 직원 중 여성 직원 비율은 평균 약 51%로 하위직에선 일하는 사람의 절반 이상이 여성이라는 점입니다. 전체 직원 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여성 직원들이 관리자를 넘어 임원급으로 승진하는 경우가 굉장히 드물죠.
이렇게 여성 직원의 임원 승진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업계마다 나름의 항변은 있습니다. 증권업계와 금융업계에서는 철저한 성과주의에 따라 인사가 판가름 나는 업계 특유의 분위기상 여성 직원이 임원까지 올라오기 어려운 다양한 요소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여성의 경우 출산이나 육아로 인해 경력에 공백이 생길 가능성이 있어 근속 연수가 남성보다 현저히 짧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영업과 접대 같은 특정 주요 업무에 남성을 선호하는 분위기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습니다.
2017년 채용 성차별을 지적받은 금융권은 이후 여성 인재 채용 비중을 점차 늘려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 직원의 승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최근 공시 자료에 따르면 미래에셋그룹의 2021년 임원 승진 인사는 총 141명으로 그중 남성 임원은 130명 이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삼성증권도 이달 초 성과주의 인사 원칙에 따라 총 5명의 임원을 승진시키는 인사를 단행했는데요. 5명 모두 남성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항공업계는 일반 대중들에게 대표적인 ‘여초 직장’으로 인식되는 업계입니다. 하지만 임원진의 여성 비율은 염전만큼 짜디짭니다. 대한항공은 2019년 3분기 기준 전체 임원 113명 중 단 4명의 여성 임원을 보유 중이며 조원태 회장의 첫 취임 후 단행된 임원 인사에서는 승진 인원 10명 중 여성은 0에 수렴했습니다. 제주항공, 티웨이항공, 에어부산, 진에어 등의 LCC 업계에서도 전체 임원 59명 중 여성 임원은 단 한 명도 없다고 합니다.
항공업계 관계자들이 말하는 여성 임원 부재의 이유 역시 금융권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결혼과 육아 등으로 인한 경력단절과 짧은 근속 연수가 주된 이유였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LCC 업계에서는 저가 항공 업계 자체의 짧은 업력을 이유로 들며 “제주항공의 경우 지난 2005년 설립됐고, 진에어 역시 2008년부터 시작했기에 임원까지 올라서는 여성이 없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가구 업계만큼 여성 소비자가 절대다수인 곳이 또 있을까요? 여성 소비자들을 주 타겟으로 삼기 때문에 여성 임원들도 많이 포진되어 있으리라 생각한다면 크나큰 오산입니다. 가구 업계는 업계 ‘빅3’(한샘, 현대리바트, 퍼시스)를 다 합쳐도 여성 임원은 4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앞다퉈 여성 친화적인 브랜드를 표방하던 가구 업계지만, 정작 사내에는 여성 임원을 보기가 어려운 것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그나마 업계 1위인 한샘에서 매년 1~2명씩 여성을 임원으로 승진시키고 있습니다. 2020년 한샘 정기 승진 인사 단행을 살펴보면 12명 중 남성 임원은 10명, 여성 임원은 2명으로, 남성 임원이 여성 임원보다 여전히 5배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성 친화적인 마케팅과 경영 방침을 강조해온 가구 업계에서 여성들의 유리천장과 관련해 업계 관계자는 “주요 소비자 특성상 젊은 여직원 비율은 높지만 연차가 많이 찬 여성 승진자가 아직 많이 없기 때문에 여성 임원 비중이 적은 것”이라며 이유를 설명했는데요. “가구 업계는 기본적으로 제조업 기반이기 때문에 생산직에서 남녀의 성비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라고 덧붙였습니다.
다양한 업계에서 여성 임원의 비중을 확대해나가는 추세이지만 사실 전반적인 국내 산업 구조상 북미나 유럽에 비해 턱없이 못 미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한국의 기업 내 여성 임원 비율은 2.1%로 OECD 국가 중 8년째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28위인 일본의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친다는 것이 참 안타깝네요.
이러한 고질적인 유리천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선진국의 성공 모델을 벤치마킹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OECD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대상 회원국 49개국 중 선진국 30개국에서 ‘여성 임원 할당제’를 도입하여 고위 임원의 남녀 성비 균형을 맞추거나 자발적인 목표를 설정해 여성 임원의 비율을 점차 높이고 있습니다. 결혼과 출산, 육아 등의 이유로 여성들의 높은 퇴사율을 운운하기보단 ‘결혼하면 퇴직한다’라는 각서를 쓰게 했던 1970년대의 관행과 남성 중심의 경영 문화를 비판하고 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필요할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