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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by 피클코

“한때 재계 순위 27위” 삼성가에서 유일하게 몰락한 비운의 집안

삼성이 흔들리면 나라 경제도 흔들린다는 말을 언론에서 한 번쯤 들어보셨을 텐데요. 이 말은 삼성이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그만큼 지대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특히 삼성 계열사를 이끄는 이재용, 이부진, 이서현의 경우 경영자인 동시에 셀러브리티로서 대중의 주목을 받고 있는데요. 이들과 마찬가지로 삼성 DNA를 갖고 태어났으나 굴곡진 삶을 살다간 ‘비운의 황태자’로 불리는 인물이 있습니다. 삼성 가문에서 아픈 손가락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인물에 대해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새한그룹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 새한그룹은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둘째 아들인 이창희 전 새한미디어 회장이 설립한 기업인데요 . 이창희 회장이 삼성 계열사가 아닌 본인만의 독자적인 사업을 벌이게 된 연유를 알기 위해선  1966년 당시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당시 삼성 그룹의 소유였던 한국비료의 수입품 컨테이너 안에서 사카린이 대량으로 발견된 일이 있었는데요. 훗날 이병철 회장의 장남 이맹희는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이 회장 사이에 밀약이 있었고, 그 내용은 밀수를 통해 거둔 수입을 박 전 대통령의 정치자금으로 쓰자는 것에 대한 내용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해당 사건은 정치권을 발칵 뒤집었는데요 . 이 일로 박 전 대통령은  ‘박정희는 대통령이 아닌 밀수 두목이다 ’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고 , 이병철 회장은 한국비료공업 경영에서 손을 떼고 경영 은퇴를 선언합니다 .


이 여파는 이병철 회장의 아들들에게도 미쳤는데요. 밀수는 주로 장남 이맹희가 주도적으로 실행했지만, 정작 법적 책임은 차남인 이창희가 지고  그는 1여 년간의 수감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이병철 회장이 경영에서 물러나고 , 둘째 동생이 감옥에 들어간 사이 장남 이맹희는  2년간 삼성그룹을 이끌었는데요 . 이후 아들의 경영활동이 탐탁지 않았던 이병철 회장은 다시금 경영 복귀에 신호를 걸었습니다 . 아버지로부터 경영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 첫째 형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이 둘째 이창희는 후계자 자리를 노리고  ‘부정한 비리 행위를 저지른 이병철 회장이 복귀하면 안 된다 ’라고 박 전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냈는데요 . 쉽게 말해 자신의 아버지를 대통령에게 고발한 것이죠 .

이에 대한 박 전 대통령의 반응은 이창희가 기대하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 박 전 대통령은 오히려 아들이 아버지를 고발하는 행위에 대해 이창희를 크게 꾸짖습니다 . 결국 , 이 소식은 이병철 회장이 귀에 들어갔고 , 이병철 회장은  ‘내가 살아있는 한 한국 땅을 밟지 말라 ’며 이창희를 미국으로 보내버리는데요 . 삼성가 비운의 황태자로 불린 이창희의 불운의 역사는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

이렇게 좋지 못한 이유로 미국에 자리하게 된 이창희는 미국에서 본인만의 사업을 벌이기로 합니다 . 그는  1973년 미국의 화학 ·전자재료 회사와 손잡고 마그네틱미디어코리아를 세우는데요 . 이후 이창희는  1977년 새한전자를 인수 결정을 내리면서 새한미디어를 출범시킵니다 . 하지만 사업을 점차 키워나가겠다는 부푼 꿈은 그가 혈액암에 걸려  58세의 나이로 일직 세상을 떠나면서 이루지 못하게 되죠 .


그렇게 이창희가 더는 회장직을 할 수 없게 된 이후, 새한 그룹은 1995년 삼성그룹으로부터 제일합섬을 넘겨받는데요. 이를 계기로 새한미디어에서 새한그룹으로 사명을 바꾸게 됩니다. 이때 이 회장의 부인인 이영자 씨가 회장을, 장남인 이재관 씨가 부회장을 맡아 경영활동을 이어나갔는데요. 추후 차남인 이재찬 씨는 새한 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인 새한미디어 사장 직책을 맡게 됩니다.

그룹 태세를 갖춘 뒤 새한그룹은 공격적으로 외형을 확장해 나갑니다 . 문제는 당시 대부분 기업이  IMF 역풍을 맞아 최대한 지출을 줄이기 위해 구조조정에 주력했다면 새한 그룹은 오히려 대대적으로 투자를 벌이는데요 . 실제로 계열사 수도 단기간에  12개까지 확장했으며 , 한때 자산규모로는 재계 순위  27위까지 오르기도 했습니다 .

무리한 확장으로 새한의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는데요 . 1995년경  7천억원대에 머무르던 부채는  3년 새  1조 7천억원 대로 치솟았습니다 . 급기야 금융기관들이 투자한 돈을 도로 거둬들이기 시작하면서  2000년 새한그룹은  ‘워크아웃 ’이라 불리는 재무 개선 작업에 착수했는데요.

기업이 존폐 위기에 다다르자 이재관 부회장은 작은아버지인 이건희 회장에게 희망을 걸었는데요 . 정작 삼성 임원들조차 이재관 부회장을 만나 주지 않았고 , 오히려 삼성의 금융 계열사들에서 가장 먼저 돈을 거두어가는 바람에 새한 그룹은 더더욱 위기의 수렁 속에 빠지게 됩니다 . 이후 반전의 기회도 얻지 못하고 새한 그룹의 오너 일가는 회사 지분과 자택 등 대부분 자산을 내어놓고 경영에서 물러나게 되는데요 . 이로써 새한그룹은 삼성가에서 분가한  CJ, 한솔 , 신세계 등 여러 기업 가운데 유일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진 비운의 그룹으로 남게 됩니다 .

경영 일선에 물러난 이후 장남 이재관 부회장과 차남인 이재찬 사장은 평탄하지 못한 삶을 살았는데요 . 삼성가의 측근은  “이창희 회장의 아들들은 삼성 기념행사에도 잘 참석하지 않고 , 가족모임에도 잘 나오지 않고 거의 은둔 생활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 두 형제에게 닥친 시련은 여기서 끝이 아녔는데요. 지난  2010년 이재찬 사장은 극단적인 선택으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 실제로 그는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주변 가게들에 수십만 원에 달하는 외상도 있었다고 하는데요 . 현재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재관 부회장 역시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한 상황에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고 하네요 . 지금까지 삼성그룹에서 떨어져 나와 여러 가지 고초를 겪었던 새한그룹 오너 일가에 대해 알아봤는데요 . 여러분은 새한그룹 오너 일가에게 주어졌던 여러 선택의 순간들 가운데 어떤 선택이 가장 자충수였다고 보시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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