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재계 순위 27위” 삼성가에서 유일하게 몰락한 비운의 집안
새한그룹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 새한그룹은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둘째 아들인 이창희 전 새한미디어 회장이 설립한 기업인데요 . 이창희 회장이 삼성 계열사가 아닌 본인만의 독자적인 사업을 벌이게 된 연유를 알기 위해선 1966년 당시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당시 삼성 그룹의 소유였던 한국비료의 수입품 컨테이너 안에서 사카린이 대량으로 발견된 일이 있었는데요. 훗날 이병철 회장의 장남 이맹희는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이 회장 사이에 밀약이 있었고, 그 내용은 밀수를 통해 거둔 수입을 박 전 대통령의 정치자금으로 쓰자는 것에 대한 내용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해당 사건은 정치권을 발칵 뒤집었는데요 . 이 일로 박 전 대통령은 ‘박정희는 대통령이 아닌 밀수 두목이다 ’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고 , 이병철 회장은 한국비료공업 경영에서 손을 떼고 경영 은퇴를 선언합니다 .
이 여파는 이병철 회장의 아들들에게도 미쳤는데요. 밀수는 주로 장남 이맹희가 주도적으로 실행했지만, 정작 법적 책임은 차남인 이창희가 지고 그는 1여 년간의 수감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이병철 회장이 경영에서 물러나고 , 둘째 동생이 감옥에 들어간 사이 장남 이맹희는 2년간 삼성그룹을 이끌었는데요 . 이후 아들의 경영활동이 탐탁지 않았던 이병철 회장은 다시금 경영 복귀에 신호를 걸었습니다 . 아버지로부터 경영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 첫째 형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이 둘째 이창희는 후계자 자리를 노리고 ‘부정한 비리 행위를 저지른 이병철 회장이 복귀하면 안 된다 ’라고 박 전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냈는데요 . 쉽게 말해 자신의 아버지를 대통령에게 고발한 것이죠 .
이렇게 좋지 못한 이유로 미국에 자리하게 된 이창희는 미국에서 본인만의 사업을 벌이기로 합니다 . 그는 1973년 미국의 화학 ·전자재료 회사와 손잡고 마그네틱미디어코리아를 세우는데요 . 이후 이창희는 1977년 새한전자를 인수 결정을 내리면서 새한미디어를 출범시킵니다 . 하지만 사업을 점차 키워나가겠다는 부푼 꿈은 그가 혈액암에 걸려 58세의 나이로 일직 세상을 떠나면서 이루지 못하게 되죠 .
그렇게 이창희가 더는 회장직을 할 수 없게 된 이후, 새한 그룹은 1995년 삼성그룹으로부터 제일합섬을 넘겨받는데요. 이를 계기로 새한미디어에서 새한그룹으로 사명을 바꾸게 됩니다. 이때 이 회장의 부인인 이영자 씨가 회장을, 장남인 이재관 씨가 부회장을 맡아 경영활동을 이어나갔는데요. 추후 차남인 이재찬 씨는 새한 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인 새한미디어 사장 직책을 맡게 됩니다.
그룹 태세를 갖춘 뒤 새한그룹은 공격적으로 외형을 확장해 나갑니다 . 문제는 당시 대부분 기업이 IMF 역풍을 맞아 최대한 지출을 줄이기 위해 구조조정에 주력했다면 새한 그룹은 오히려 대대적으로 투자를 벌이는데요 . 실제로 계열사 수도 단기간에 12개까지 확장했으며 , 한때 자산규모로는 재계 순위 27위까지 오르기도 했습니다 .
기업이 존폐 위기에 다다르자 이재관 부회장은 작은아버지인 이건희 회장에게 희망을 걸었는데요 . 정작 삼성 임원들조차 이재관 부회장을 만나 주지 않았고 , 오히려 삼성의 금융 계열사들에서 가장 먼저 돈을 거두어가는 바람에 새한 그룹은 더더욱 위기의 수렁 속에 빠지게 됩니다 . 이후 반전의 기회도 얻지 못하고 새한 그룹의 오너 일가는 회사 지분과 자택 등 대부분 자산을 내어놓고 경영에서 물러나게 되는데요 . 이로써 새한그룹은 삼성가에서 분가한 CJ, 한솔 , 신세계 등 여러 기업 가운데 유일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진 비운의 그룹으로 남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