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무님마저 함께 점심 먹기 꺼려진다는 신입사원의 정체
재벌 3세의 ‘갑질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의 차녀인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물컵 갑질은 세상을 들썩이게 만들었습니다. SPC그룹 허영인 회장의 차남인 허희수 부사장은 대마 밀수 및 흡연 혐의로 수사 대상에 오르기까지 했습니다.
일각에선 대벌 3세의 갑질 논란은 도덕적인 비난으로만 끝나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기업의 경영 리스크를 키우는 것은 물론 기업 가치도 떨어뜨린다는 이유인데요. CEO 스코어의 조사에 따르면 30대 그룹 오너 3세 임원이 입사 후 임원 승진까지 걸린 기간은 평균 3.5년에 불과했습니다. 대졸 신입사원이 대리를 다는 기간보다 1년이나 더 빠른 셈입니다.
창업가가 사업을 일구고 2세가 그룹을 키웠다면 3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금수저입니다. 입사 후 바로 임원이 되며 왜곡된 특권의식에 젖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이와는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는 재벌 3세들이 있습니다. 신입사원부터 시작하면서 현장 경험을 쌓고 있는 건데요. 그들은 누구인지 왜 낮은 직급부터 시작하는 건지 그 이유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1일 재계에 따르면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장남인 최인근 씨가 최근 SK그룹의 에너지 계열사인 SK E&S 전략기획팀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1995년생인 최인근 씨는 2014년 미국 브라운대학교에 입학하여 물리학을 전공한 뒤 글로벌 컨설팅 기업인 보스턴컨설틴그룹 인턴십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재계 관계자는 “평소 최 씨가 미래 에너지, 신재생 에너지 등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어 수시채용에 지원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지주사 SK가 지분 90%를 보유하고 있는 SK E&S는 도시가스지주회사로 시작해 액화천연가스(LPG)로 사업을 확대해온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최근 신재생에너지사업과 분산형 에너지 기술 기반으로 ESS(에너지저장시스템), VPP(가상발전소)등 에너지 솔루션 사업에 적극 나서고 있는 SK E&S는 주목받는 계열 사 중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최근 환경에 대한 관심도가 증가하고 문재인 정부의 탈원조, 탈석탄 기조에 맞춰 신재생사업이 차세대 사업으로 떠올랐습니다. 재계 일각에선 그룹 장남인 최인근 씨가 앞으로 친환경 신사업 분야를 주도할 것이라는 분석도 내놓고 있습니다.
이번 최 씨의 입사로 최태원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나비 관장 사이의 세 자녀가 모두 SK에 입사하였는데요. 첫째 딸인 최윤정 씨는 SK바이오팜 책임매니저로 근무하다 지난해 휴직 후 미국 스탠퍼드대학교에서 바이오인포매틱스(생명정보학)석사과정을 밟고 있다고 관계자들은 전했습니다. 둘째 딸 최민정 씨는 지난해 SK하이닉스 입사해 미국 워싱턴 DC에 사무소가 있는 대외협력총괄산하 INTRA 조직에서 대리 직급으로 일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2019년 8월 한국금융지주 김남구 부회장의 장남 김동윤 씨가 한국투자증권에 입사해 영업지점 사원으로 근무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2018년 4월 해외 대학 출신 공채를 통해 입사한 김 씨는 4개월여간의 연수를 거친 뒤 강북센터 지점에 인사발령을 받았다고 관계자는 전했습니다. 직급은 사원입니다.
일각에선 김남구 부회장의 장남이 핵심 계열사로 꼽히는 한국금융지주에 입사해 정식 발령을 받은 것은 한국금융지주 3세 경영의 본격적인 시동이라고 해석하고 있는데요. 김 씨가 본사가 아니라 영업지점의 말단 사원으로 발령받은 것은 현장에서 경험을 쌓고 일을 배우게 하는 동원그룹 가문의 내력이 이어진 것이라고 업계 관계자들은 풀이했습니다.
김남구 부회장 역시 동원산업의 평사원으로 입사하기 전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수개월 동안 참치잡이 원양어선에서 18시간씩 일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아직까지는 김 부회장의 나이가 많은 편이 아니고 장남인 김동윤 씨가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비추어볼 때 경영승계를 거론하기는 이른 것으로 보입니다.
금융 투자업계 관계자는 “동원그룹의 보수적인 경영승계 시스템을 고려하면 경영 수업이 장기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김 부회장은 최근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채용설명회에서 “본인이 지원하여 합격했고 배치를 받았으면 더 이상 신경 쓸 부분은 없을 것”이라며 “경영권 승계는 먼 훗날 이야기”란 말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대리급으로 시작하는 재벌가 자녀들도 많습니다. 2018년 LG그룹의 대표이사에 오른 구광모 회장은 대리로 입사하였으며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아들인 정기선 현대중공업 부사장도 대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재현 CJ회장의 장녀 이경후 CJ ENM 상무는 대리부터, 장남인 이선호 CJ제일제당 부장은 평사원으로 입사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았습니다.
재벌가 자녀들의 입사 직급이 낮아지는 원인에 대해 전문가들은 후계자가 내실 있는 경영 수업을 받는 게 그룹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 때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과거에는 재벌 2세들을 임원진 전면에 배치시켜 안정적인 경영 승계가 이뤄지도록 하는 것을 더 중시했었다”며 “지금은 실무 경험을 풍부하게 쌓아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분위기가 된 것 같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말했습니다.
비교적 낮은 직급에서 회사 생활을 시작하는 미래의 오너들은 조직과 잘 어우러지기 위해 노력한다는 평을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공정성 이슈에 예민할 뿐만 아니라 갑질 논란 등은 사회적인 뭇매를 맞을 정도입니다. 따라서 최근 재벌가 자녀들은 지탄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행동을 조심한다고 전문가들은 전했습니다.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미래의 오너들의 행보에 귀추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