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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좋은날] 평범함을 꿈꾸다

만난 적은 없지만 왠지 모르게 친숙한 당신에게 이 글을 보냅니다. 장애를 지닌 채 살아내고 있는 한 사람으로써, 옳은 길이라고 장담할 순 없지만 이런 길도,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는 걸, 부끄럽지만 제 이야기를 통해 전해보려고요.


많은 이들이 저마다의 꿈을 꾸며 오늘을 살아갑니다. 길게는 머지 않은 내일의 행복이나 짧게는 퇴근 후에 만날 오랜 친구들과의 술 약속에 대한 기대 같은 꿈을요. 그리고는 그 꿈을 향해 열심히 노를 젓습니다.


제게도 꿈이 있습니다. 저들의 노를 젓는 속도 보다는 턱없이 느리지만 저들이 향하는 꿈 보다는 한없이 소소하지만, 삶이라는 바다에 놓여졌기에 삶의 물결이 출렁이는 대로, 흐르는 대로 표류하기 보다는 평범함이라는 등대의 빛을 쫓아 노를 젓는 꿈이요.


그 여정의 시작은 이랬습니다. 원인불명의 척수성 근위축증, 소위 말해 근육병이란 장애는 제게서 많은 평범함들을 가져갔습니다.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에 한 번 쯤은 신어 본다는 소리 나는 신발의 추억도, 또래들과 어울려 사회생활의 대부분을 미리 경험해 본다는 유치원 생활도, 조막만한 손과 발로 열심히 연습한 재롱잔치용 율동을 정작 당일에는 지켜보는 눈들이 많아진 탓에 반대로 추거나 우두커니 서 있어서 더 예쁘고 귀엽게 기억되었을 부모님의 기쁨도요.


조금 더 자라서는 친구들과의 공놀이도, 사춘기의 반향 섞인 방황도, 어쩌면 이루어졌을지도 모르는 첫사랑을 고백할 용기마저도 포기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포기 당해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평범함이기에 더욱 꿈꾸게 됐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지 못한 것들, 포기해야만 한 것들 뒷편에 분명 얻어진 것들도 있었습니다. 또래들과 뛰어 놀지 못했기에 책과 접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책을 통해 뛰어서는 가보지 못 할 여러 세상을 알아감으로 견문을 넓힐 수 있었고,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해 집에서 엄마와 지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정서적으로 안정적인 사람으로 커갈 수 있었습니다. 보통보다 잦은 병원의 출입과 그 속에서 마주한 아픔과 눈물들은 제 나이보다 일찍 철이 들게 했습니다.


원하는 만큼 평범하진 못했지만 나름의 평범하지 않음으로 당차게 학업을 이어갔고, 그간의 경험과 생각들이 쌓여 꽤 괜찮은 대학까지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진학 후 몇 년 간은 부단히 노를 저은 탓에 드디어 평범함에 닿아보는 듯 느껴졌습니다. 학교의 배려로 듣고 싶은 강의도 모두 들었고, 동기들과 보내는 시간들도 참 즐거웠으니까요. 하지만 애석하게도 병은 꾸준히 진행되어 갔고,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에는 필기가 힘들어질 정도로 근육의 힘이 소실되어졌습니다. 어렵게 손끝에 닿았던 평범함이 또 다시 멀어지는구나 싶었습니다.


한동안은 참 우울했습니다. 졸업은 했지만 일자리는 찾기 어려웠고, 사라져 가는 몸의 힘을 생각하면 마땅한 자리를 찾는다 해도 잘 해낼 자신이 없었습니다. 잔잔히 흘러갔던 사춘기가 이제서야 찾아온 듯 한참을 잿빛의 세상에서 지냈습니다. 하지만 삶에서 맞닥뜨리는 어둠은 동굴이 아닌 터널이라고 한 누군가의 말처럼 시간의 바람은 제 삶에 드리웠던 잿빛 구름을 서서히 걷어내기 시작했고, 다시 평범함으로 향하는 노를 손에 쥐어 줬습니다. 그렇게 노를 다시 젓다 보니 취업이라는 파도를 생애 처음으로 넘고 있었습니다.


첫 취업의 기쁨은 생각보다 컸습니다. 회사에 소속되었다는 소속감, 첫 월급의 신기함, 그 신기함의 일부로 바꾼 효도선물까지, 살아있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만큼 평범함에 다시금 가까워지는 듯 했습니다. 하루하루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해내면서 딴에는 이 몸으로 이 정도면 평범하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제 생각일 뿐이었나 봅니다. 평범함에는 달콤한 맛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계약직의 계약만료라는 쓴 맛이 알려주었고, 재취업까지의 공백은 컴퓨터 키보드 사용을 수월하게 해주던 왼손의 약해짐으로 이어졌습니다. 마우스를 클릭할 힘만 겨우 남은 제 눈 앞엔 큰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던 거죠.


하지만 이번엔 밀려오는 큰 파도에 맞서 보기로 했습니다. 떠밀리지 않기로요. 이번에도 떠밀린다면 평범함의 빛을 영영 잃고, 삶이라는 바다에서 정처 없이 표류할 것 같았으니까요.


일 외에도 의지할 곳, 마음 쏟을 곳, 나의 현재를 붙잡아 줄 곳이 필요하다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일자리를 구하면서도 다른 무언가를 더 해보기로 마음 먹었고, 한가지 생각이 스쳤습니다. 


'글을 써보자!'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내려 놓으며 살아온 삶이다 보니 쌓여온 생각이 많았고, 그 생각을 표현하고 싶었고, 하나의 글이 가져다 주는 다독임과 북돋음의 힘을 알기에 부족하지만 진심을 담은 글로 누군가에게 따뜻한 마음이 들게 해주었으면 싶었습니다. 그래서 쌓여온 생각들을 조금씩 글로 옮겨 보기 시작했고, 그 글들을 웹에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고, 새로운 일에 적응 하면서도 글쓰기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꾸준히 올리다 보니 올린 글들을 좋게 봐주시는 본들이 생겨났고, 그 분들을 위해서라도 제 자신을 위해서라도 몸이 허락하는 한, 새로운 생각이 생겨나는 한 계속 글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세상에 내 생각을 알리는 게, 나아가 그들의 공감을 얻는다는 게, 흔들리는 마음의 중심을 잡아 주었고, 글을 쓰며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 평범함으로 향하는 노를 계속 저을 수 있는 힘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오늘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여전히 일을 하는 중이고, 여전히 몸의 힘을 잃어가는 중이며, 여전히 글도 올리는 중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평범함을 향해 노를 젓는 중입니다.


비단 저 뿐만이 아니더라도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 정도의 차이에 상관없이 평범함을 꿈꾸리라 생각합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이?', '내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하면서요. 저 역시도 해 본 생각이기에 그런 생각 후에 밀려오는 기분이 얼마나 무겁고 어두운지 잘 알고 있고요.

하지만 이런 생각은 하늘의 별을 따 보려는 것 같은 허망한 희망을 꿈꾸는 생각일는지도 모릅니다. 가정으로만 가능한, 이루어지거나 실현되지는 않을 일이니까요.


'스톡데일 패러독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희망을 갖기보다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범위 안에서 희망을 갖자는 말입니다. 앞서 제가 첫 직장과의 계약만료 이후에 다가온 파도와 맞선 것도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일는지도 모릅니다. 앞으로도 수 차례 다가올 파도에 더 이상 제 희망이 쓸려가지 않고 남아 있기를 바랐으니까요.


현실을 직시 한다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 안에서 찾아 보는 희망은 더욱 그럴 테고요. 하지만 직시하고 나면, 내 현실을 오롯이 마주하고 나면, 내가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한계치와 정도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 정도를 알아내고, 현실과 타협점을 찾아간다면 저와 당신을 포함한 그 누구더라도 평범함을 향해 나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당신에게 보내는 이 글을 마무리하며, 저 역시도 그토록 쫓았고, 쫓고 있고, 앞으로도 쫓게 될 평범함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평범함은 그저 나와는 동떨어져 있다 생각했기에 동경해오고 막연히 쫓아 왔지만 어쩌면 평범함이란 각자에게 주어진 삶 그 자체가 아닐까 하고요. 삶이란 바다 위에서 그 평범함을 계속 유지해 나가기 위해 꾸준히 노를 젓는 것이고, 반대로 노 젓기를 멈춘다면 평범함에서 멀어진 채 한참을 표류하게 되는 것이고요.


나는 당신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표류하는 쪽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렵더라도 주어진 현실을 직시하고 당신만의 노를 열심히 저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이들의 것보다 거세게 느껴질 파도가 수 차례 밀려올 파도를 잘 이겨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준다면, 그렇게 해 나간다면 당신도 충분히 평범한 사람이리라 생각해 봅니다.


당신을 많이 아끼는 친구로부터...​​

by 어느좋은날

- 필자 소개 -

하루하루 몸의 힘을 잃어가는 중이지만 그에 따라오는 슬퍼지려 하는 마음을 글로 추스르며 여느 30대처럼 주어진 오늘을, 어느 누구 못지않게 평범하게 살아내려 노력 중인 30대장애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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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병과 싸우며, 혹은 함께 살아가며 마음의 소리를 글로 옮기는 분들과 근육병을 통해 세상을 더욱 밝게 바라보는 근육병자조모임 '청년디딤돌' 친구들의 이야기를 허브줌에서 풀어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