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궁극의 맛' 연출 신유청 "음식 냄새와 관객 마음도 세트"
인터뷰
'두산인문극장 2020: 푸드'의 두 번째 작품
"삶에서 음식 역할·기능 꾸밈 없이 보여줄것"
두산아트센터 Space111서 6월 2~20일 공연
[서울=뉴시스] 신유청 연출. 2020.05.25. (사진= 두산아트센터 제공) photo@newsis.com |
"이번 작업을 하면서 '음식'이 우리의 삶을 연결해주고, 만져준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의 내면으로 들어오는 것이잖아요.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거죠. 그래서 자연에서 키우는 재료들, 즉 자연 섭리 같은 재료가 담긴 것이 '궁극의 맛'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순수·상업을 불문하고 현재 연극계 최고 블루칩인 신유청(39) 연출의 궁극(窮極)을 연극계는 궁금해 하고 있다. 그래서 차기 행보가 주목받는다.
지금은 '두산인문극장 2020: 푸드'의 두 번째 작품인 연극 '궁극의 맛'을 우려내는 중이다. 최근 두산아트센터에서 만난 신 연출은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음식을 '궁극의 맛'으로 표현하면서, 삶에도 같은 원리를 적용했다.
"뜻에 맞게 사는 것이 '궁극의 맛'이지 않을까요. 그러면 보람이 따르고요. 살면서 '궁극의 맛'은 보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르죠."
얘기만 들어도, 속을 든든하게 만드는 신 연출은 '사람이 먼저'를 실천하는 연출가다. 배우, 스태프를 대할 때 조미료를 치지 않는 '진국'이라는 평가가 맛집 소문나듯, 연극계에 퍼져 있다.
츠치야마 시게루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재창작한 '궁극의 맛'은 도박, 폭행, 살인 등으로 수감돼 살아가던 재소자들의 속사정을 음식을 통해 그리는 작품. 자칫 편견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재소자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끄집어내서 조리해낼 것이라는 기대감이 드는 이유다.
"상대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고 만날 때 편견이 확립되죠. 그 편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자칫 폭력적일 수 있어요. 감옥의 경계인 담벼락은 물리적인 것이지만, 마음의 경계일 수도 있거든요."
메인 무대를 삼각형 모양으로 설정하고 그곳을 둘러서 객석을 만드는데, 실제 음식이 곳곳에 놓여 있게 된다.
라면 같이 쉬운 조리법의 요리는 현장에서 직접 조리된다. 무대, 객석의 경계를 가리지 않고 퍼지는 음식 냄새는 물리·심리적 경계를 무너뜨리는 일종의 장치다. 최근 몇 년 간 공연계에 유행한 '이머시브(관객 몰입형)의 '끝판왕'이 될 것으로 보인다.
"관객 마음도 세트가 되는 거예요. 의도가 잘 구현이 된다면, 경계를 구분하지 않은 냄새로 관객의 마음의 경계가 열리고 닫히겠죠. 중요한 체험이 생기는 겁니다."
신 연출은 '궁극의 맛'을 준비하면서 짐 자무시의 영화 '커피와 담배'(2006)를 떠올렸다. 똑같은 커피와 담배라도 소비하는 사람에 따라 각각 인생의 축소판이 보이는, 만화경 같은 풍경을 그린 수작.
[서울=뉴시스] 신유청 연출. 2020.05.25. (사진= 두산아트센터 제공) photo@newsis.com |
"커피와 담배는 놓여 있을 뿐인데, 그 안에 많은 것을 담고 있는 것처럼 우리 작품에서도 음식이 놓여 있을 뿐이지만 그 음식을 통해 사람들이 연결돼 있으면 했어요. 삶에서 음식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꾸밈 없이 보여줬으면 했죠."
지난해 말 두산아트센터로부터 '궁극의 맛' 연출을 제안 받은 신 연출은 이번에 각색 작업에 참여한 황정은·진주·최보영 극작가를 직접 섭외했다. '두산아트랩 2020' 선정 창작자로 이들이 함께 작업한 '이것은 실존과 생존과 이기에 대한 이야기' 쇼케이스를 눈여겨 보고, 옴니버스 형식 같은 이번 작품에 잘 어울릴 거 같다고 판단했다.
세 작가는 한국 사람의 정서와 다소 동떨어질 수 있는 원작의 일본 색을 덜어내고, 한국적 음식을 골라 에피소드를 녹여냈다. 자연스레 관객들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보편성을 띄게 됐다.
엄마에게 도착한 아들의 편지를 다룬 '무의 시간', 재소자·교도관·영양사가 자정의 조리실에서 빚는 소동을 그린 '자정의 요리', 탈북민 펑펑이 아줌마가 펑펑이 떡을 만드는 '펑펑이 떡이 펑펑', 영롱한 면가락을 향한 재소자들의 열망인 '파스타파리안', 교도소 접견소에서 벌어지는 상견례 이야기인 '왕족발', 국회의원 보좌관 K씨가 알게 된 맛에 대한 이야기인 '선지해장국', 교도소 미술치료실에 모인 재소자들의 아트워크를 담은 '체' 에피소드가 그렇게 완성됐다.
음식을 중심으로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는 '궁극의 맛'은 결국 연극 창작자들과 관객이 작품을 공유하고 삶에서 함께 공존하기를 꿈꾸는 행위와 닮았다.
사실 이번 '두산인문극장'의 음식 테마를 전달 받았을 때 신 연출은 '늦은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이미 수많은 미디어에서 다룬 음식이 닳고 닳은 소재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로나 19 시국에 '음식을 나누는 행위'는 확연히 다른 고찰을 가져왔고, 음식이 여전히 화두임을 증명하고 있다. "연극에서 음식을 다룰 때 기존 미디어와 다른 방식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을 찾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이처럼 연극의 힘을 믿는 신 연출은 최근 몇 년 간 끊임없이 작업을 했다. 대학로에 '신유청 연출밖에 없냐'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무엇보다 제56회 동아연극상 연출상을 그에게 안긴 '녹천에는 똥이 많다'와 '와이프'를 비롯 '조지아 맥브라이드의 전설' '언체인' '그을린 사랑' 등 순수와 상업, 공립과 민간을 나누지 않고 작업했다.
[서울=뉴시스] 연극 '궁극의 맛'. 2020.05.25. (사진= 두산아트센터 제공) photo@newsis.com |
경계를 나누는 일은 애초부터 그에게 없는 맛이었다. 어릴 때부터 이쪽 애들, 저쪽 애들하고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연극판에서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작업 제안이 들어오면 무조건 했어요. 가릴 것 없이 막 먹었죠. '가난이 긍정적인 작용'을 했다고 볼 수 있죠. 이것저것 따지고 할 여유가 없었으니, '나는 이런 스타일이야'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거든요." 연극판에서 경계가 나눠지는 것은 자금이 부유한가 그렇지 못한 것일 뿐,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같다고 했다.
점점 이름값이 높아지고 기대가 커지면서 "저라는 실체와 다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우려가 생기는 중이다. "그 기대와 저라는 실체가 '명실상부' 합체가 되는 날을 위해 열심히 가는 중"이라고 했다.
사실 신 연출은 영화에 관심이 있어서 계원예고에 입학했다. 그런데 학교에서 연극을 가르쳤으며, 야생마 같던 자신을 길들인 김달중 연출 때문에 연극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연극 입문도 사람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작업에 대한 흡족, 불만족도 작품의 완성도보다 끝난 이후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이어가느냐에 따라 갈린다.
"연극 작업은 다 재미가 있어요. 그런데 극이 끝난 후 사람들과 관계가 좋아지는 경우가 있고, 예전보다 못해지는 경우가 있죠. 작업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 이후의 사람들 관계도 제게는 중요합니다."
[서울=뉴시스] 신유청 연출. 2020.05.25. (사진= 두산아트센터 제공) photo@newsis.com |
한편 '궁극의 맛'은 6월 2~20일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 공연한다. 두산아트센터는 코로나19로 지친 창작자, 관객을 위해 무료로 공개한다. 예약을 통해 자리를 배정하고 있다. 윤성호 작가가 드라마터그로 참여했다. 배우 강애심, 이수미, 이주영, 이봉련 등이 출연한다.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realpaper7@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