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불상을 옮겨놨나…기암괴봉 품은 천불동계곡
설악산국립공원② 중청대피소~천불동~설악동 10.4㎞…사방팔방 비경
신전같이 수려한 바위병풍 신선대…깎아지른 절벽 사이 오련폭포 '장엄'
잠에서 깨어나는 천불동계곡. 중청대피소 앞에서 바라보는 푸르스름한 천불동계곡에 흘러드는 구름이 몽환적이다. |
◇ 중청대피소 풍경 "코 고는 소리, 부스럭 소리에 비몽사몽"
국립공원 대피소 예약은 평소에는 선착순제, 성수기에는 추첨제를 한다. 성수기 주말에 대피소를 예약하는 것은 로또 다음으로 어려운 일이다. 코로나 시국으로 침상을 줄여서 운영하니 당첨확률은 더욱 떨어진다. 가장 예약이 어려운 대피소는 지리산의 장터목과 설악산의 중청대피소다.
30년 가까이 강풍에 시달리던 중청대피소는 건물이 노후되어 조만간에 재건축을 할 예정이다. 국립공원공단에서는 산꼭대기에서의 환경오염(난방연료/쓰레기) 때문에 순수한 대피인원만 수용하고, 숙박인원은 인근의 희운각대피소를 증축하여 수용한다는 계획이다. 따라서 기자의 오늘 숙박은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대피소 취사장의 풍경은 많이 바뀌었다. 버너와 코펠로 음식을 하는 사람은 줄었고, 찬물을 넣어도 내용물을 펄펄 끓여내는 발열식품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컵라면과 빵으로 때우는 사람도 많다. 대피소에서 판매하는 음식은 생수와 햇반뿐이다. 몰래 홀짝거리는 사람이 있긴 있지만, 술을 먹는 사람은 확실히 줄었다. 따라서 취사장의 소음도 줄고, 침실에서 코 고는 사람도 적어졌다.
과거의 중청대피소. 주말 성수기의 꽉 찬 침상에서 국립공원 레인저가 슬라이드 영상물을 상영하고 있다. |
요즘의 중청대피소. 코로나 때문에 침상의 일부만 예약받아 한적하다. 침낭과 매트를 가져와야 한다. |
대피소에서 잠에 드는 것은 정말 힘들다. 소등시간인 9시가 빠르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들과 한 방에서 누워있는 것도 어색하며, 씻지 않은 몸에서 냄새가 나지 않을까 서로 걱정한다. 코로나 때문에 담요를 대여하지 않으므로 침낭과 매트를 가져오지 않은 사람은 딱딱한 바닥이 배겨서 계속 뒤척거려야 한다. 난방이 잘 되어 춥지 않지만 어떤 사람은 덥다고, 어떤 사람은 춥다고 대피소 직원을 부른다.
가장 큰 문제는 소음이다. 경험자들은 귀마개를 가져온다. 첫 번째 소음은 코 고는 소리다. 서너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코를 곤다. 따라서 10여 명이 코를 골면 교향곡처럼 소음의 합이 대단하다. 두 번째 소음은 배낭을 정리하는 소리다. 소등을 한 후에도 계속 꺼냈다 들였다 하며 내는 비닐봉지의 부스럭 소리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세 번째 소음은 핸드폰이다. 핸드폰 음이 울리면, 당사자가 깜짝 놀라 음을 끄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핸드폰을 켠다. 수십 개의 조명이 번쩍거린다.
마지막 소음은 뒤척거리는 소리다. 누군가 끄응거리거나 헛기침을 하거나 돌아눕는 소리가 나면 이때다 싶어 몸을 뒤척이거나 앓는 소리를 내는 사람이 많다. 이때까지 참다가 방귀를 뀌는 사람도 있다. 웃음을 참는 큭큭 소리도 들린다. 참다못한 몇몇 사람이 밖으로 들락날락하는 소리는 더욱 크게 들린다.
대략 두세 시간이 지나면 그런 소리들에 익숙해져 잠에 드는 사람이 많아진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사람들과 일찍 깬 사람들이 배낭을 싸서 나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시계를 보니 3시다. 덩달아서 일어나는 사람들로 대피소는 점점 부산해진다.
ⓒ News1 윤주희 디자이너 |
◇ 중청대피소~희운각-양폭 3.9㎞ "구름 위에서 비경을 보고, 구름 밑에서 비경을 통과하고!"
중청에서 바라본 아침의 공룡능선. 붉은 바위들이 스스로 빛을 내며 잠에서 깨어나는 모습이다. |
혹시 일출을 볼 수 있을까, 대피소 바깥에 나와보니 온 세상이 구름과 안개에 잠겨있다. 대청봉은 까맣고, 하늘은 컴컴하다. 6시에 대피소를 내려서면서 산 아래를 내려다본다. 푸르스름한 천불동계곡과 불그스름한 공룡능선으로 하얀 구름이 흘러드는 풍경이 몽환적이다. 다른 곳에는 없는 이런 비경을 언제 또 볼 것인가? 한참 바라보는 비현실적인 풍경이다.
중청봉 허리를 돌아서 소청으로 내려가는 기다란 계단이 축축하다. 여기서 내려다보는 초록 숲과 그 밑의 우람한 용아장성 풍경도 참 멋지다. 설악산은 둥그런 고급 케이크다. 어느 한 조각을 잘라도 고급 맛이다.
소청봉 주변 풍경. 산 정상은 단풍이 알록달록 시작되고 있다. 가운데 용아장성 봉우리들이 용의 이빨처럼 뾰족하고, 오른쪽에 공룡능선이 보인다. |
소청에서 희운각까지 1.3㎞는 설악산에서 가장 경사가 급한 돌길이다. 올라서는 사람도 내려서는 사람도 “여기만 통과하면 돼!” 라고 하는 깔딱고개다. 내려서는 길 모퉁이에서 공룡능선을 장쾌하게 바라보는 포인트가 있는데, 오늘은 안개 커튼에 가려져 있다.
먼 곳의 풍경이 보이지 않으니 가까운 풍경에 집중하게 된다. 내리막 초입의 자작나무들과 재회한다. 가지는 바람에 시달리지만, 줄기는 더 굵어져 흔들림이 없다. 등산로 옆에 뿌리가 뽑힌 채 누운 나무들, 흙이 무너져 뿌리가 공중에 뜬 나무들, 밑동에 커다란 구멍이 나서 쪼개지기 직전의 나무들을 본다. 어떤 것은 자연의 순리이지만 어떤 것은 사람 발길에 의해 그리 된 것들이다. 그런 나무들의 껍질에 풀과 이끼와 버섯이 뿌리를 내렸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다.
중청과 소청에서 만난 야생화. 왼쪽은 과남풀(칼잎용담). 약효가 좋아 부처를 의미하는 관음풀(觀音草)로 부르다 변형된 이름이다. 가운데 구절초(九節草)는 음력 9월 9일이 되면 줄기의 마디가 9개가 된다는 이름뜻이다. 오른쪽은 산부추. 사투리로 정구지라 부른다. |
기다란 계단과 다리를 넘어, 한참 증축 공사 중인 희운각대피소에 도착한다. 중청이나 소청대피소에서 새벽에 내려온 사람들은 대부분 희운각에서 아침 식사를 한다. 계곡물을 식수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희운(喜雲)은 최태묵 선생의 호다. 1969년 인근에서 동계훈련을 하던 산악인 10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그런 사고를 막기 위해 대피소를 지어 기증한 분이다. 사고가 났던 장소를 죽음의 계곡이라고 부르는데, 희운각에서 근무하는 레인저들의 꿈에 죽은 사람들의 혼령이 자주 나타난다고 한다. 지리산의 벽소령대피소 레인저들도 그런 얘기를 많이 한다.
신선대. 신들이 사는 신전과 같이 장엄하고 수려한 바위병풍. |
희운각에서 5분쯤 걸어, 전망데크 위에서 신선대를 올려다본다. 공룡능선과 천불동계곡을 가르는 거대한 바위병풍이다. 천 개의 불상이 있는 것과 같아서 천불동(千佛洞)인데, 이 신선대에 절반의 불상이 있다고 할 정도로 수려하고 장엄하다.
전망데크를 내려서면 곧 무너미다. ‘물이 넘어가는 곳’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빗물이 떨어져 왼쪽으로 기울면 머나먼 서해로 나아가고, 오른쪽으로 기울면 가까운 동해로 간다. 바늘 끝의 차이로 운명이 크게 갈리는 것이다. 사람의 인생과 같다. 마침 빗줄기가 후드득 거리고 싸한 바람이 분다. 기후 앞에 사람은 무력하다. 우비를 꺼내 입을 뿐 날씨를 탓하진 않는다.
무너미에서 30분쯤 급한 내리막을 천천히 내려서면 계곡물을 만난다. 물이 불어 쏴아~ 하는 소리가 시원하다. 곧 낮게 떨어지는 2단 폭포를 만나는데 이 폭포의 이름은 없다. 무명(無名)폭포다. 다른 산 같으면 귀한 대접을 받을 텐데, 설악산이라 명함을 내밀 수 없는 것이다.
조금 더 내려가면 이름 난 폭포가 있으니 바로 천당폭포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포로 보이기도 하지만, 밑에서 올라올 때 길이 너무 험해서 ‘도달하기 어려운 폭포’라는 의미이다. 단아하게 떨어지는 물줄기는 하얀 옷고름 같고, 물을 받아내는 웅덩이는 초록 치마와 같다. 너무 예쁘다.
◇ 양폭~비선대~설악동 6.5㎞ "명품 폭포들이 즐비한 수묵화 풍경을 내려서다"
천당폭포에서 떨어져, 협곡을 통해 양폭으로 쏜살같이 내달리는 물줄기. |
다이내믹한 양폭. 음폭은 왼쪽의 음폭골에 숨어있다. 그곳은 출입금지구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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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 양쪽은 깎아지른 절벽이다. 낙석을 막는 철그물 지붕이 올려진 철계단을 내려가 양폭(陽瀑)이 힘차게 쏟아지는 모습을 보고, 왼쪽으로 음폭(陰瀑)이 있는 음폭골을 들여다본다. 이 두 개의 폭포를 합쳐 이곳을 양폭(兩瀑)이라 부른다. 여러 물길이 모이는 양폭에 홍수가 잦다. 그래서 대피소 본채의 계단과 별채인 간이화장실 계단을 로프로 묶어 놓았다.
오련폭포. 폭포를 중심으로 양쪽의 깎아지른 절벽이 장엄한 풍경이다. 가을엔 쓸쓸하고 겨울에는 으스스하며 무섭다. |
오련폭포의 가을. 사진 국립공원공단. |
양폭대피소에서 10분쯤 내려가 오련폭포 옆으로 절벽에 붙인 데크를 내려선다. 다섯 개의 폭포가 연이어 내려가서 오련(五連)폭포다. 폭포 전체를 조망하는 포인트가 없어 아쉽지만, 폭포줄기를 중심으로 기다란 절벽이 협곡을 이룬 경관은 장엄하다. 수직 절벽에 여름에는 여러 개의 폭포가 생겨나고, 겨울에는 절벽에 붙은 눈더미와 얼음이 계단으로 쏟아져 ‘야성’을 드러내는 협곡이다.
천불동계곡의 수묵화. 도화지에 바위를 조각하고 나무를 심고 안개를 뿌린 듯하다. |
오련폭포부터 비선대까지가 천불동계곡의 핵심이다. 천 개의 불상을 닮았다는 이름처럼 기기묘묘한 바위봉우리들이 낙락장송과 어우러진 비경이 계속 이어진다. 한라산의 탐라계곡, 지리산의 칠선계곡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계곡임을 실감하게 하는 절경이다. 귀신과 닮았다는 귀면암(鬼面巖)마저 귀여운 얼굴로 보이는 즐거운 길이다.
산책로 수준으로 길은 부드러워진다. 눈 감고도 갈 이 길에서 길을 잃고 헤맸던 때가 생각난다. 폭설이 내렸던 어느 날, 혼자 러셀(russell/눈을 쳐내며 길을 내는 일)을 하다가 눈에 묻힌 길을 찾지 못하여 절벽으로 미끌어지고 난간에 매달리며 헤맸던 기억이다. 산을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는 교훈을 절실하게 ‘배웠던’ 경험이었다.
천불동계곡의 겨울. 수없이 다닌 길이지만, 폭설이 내려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맸던 장소. |
비선대에 도착해 천불동 입구에 우뚝 선 미륵봉(장군봉), 형제봉, 선녀봉(적벽)을 알현한다. 그 아래의 넓은 암반에 옥빛으로 담긴 계곡물이 하얗게 굽이치며 내려가는 풍경은 최고의 한국화다. 아직 설악동까지 3㎞가 남았다. 장거리 산행의 후반부에서는 먼 거리다. 와선대를 지나 저항령 계곡의 끝에 있는 교량에서 저항령을 바라본다. 오목한 고개(低項)라는 뜻인데, 한글로는 '버틴다'는 뉘앙스가 있다.
저항령에서 버티다가 밀렵꾼의 총탄에 맞아 숨을 거둔 ‘설악산의 마지막 곰’을 생각한다. 1983년의 일이다. 지리산에서처럼 설악산에서 반달가슴곰을 복원한다면, 이 저항령에 곰을 방사해 40년 전의 곰 영혼을 위로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대청봉 일출. 동해바다에서 끓어오르는 일출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지만, 변화무쌍한 구름과 안개, 눈보라, 비바람으로 그 모습을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
기다란 소나무들이 가로수처럼 늘어선 숲길을 지나 설악의 세계에서 사람의 세상으로 나아간다. 우수에 젖은 한계령에서 대청봉에 올라 광활한 풍경에 감동하고, 천 개의 바위에 불이 붙은 듯 아름다운 천불동계곡을 내려왔다.
과연 설악산은 최고의 명산이다. 우리에게 하나밖에 없는 설악산이다. 설악산을 단지 좋아하는 수준을 넘어서, 정성으로 보듬고 존중하는 세상이기를 바란다.
신용석 기자 = stone1@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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