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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주목·이천년 천제단·수호신 장군봉…민족의 영산 기운이 서리다

태백산 8.4㎞ 산행

겨울 눈꽃, 여름 야생화 산행…검은 지평선서 불쑥 솟는 일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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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 주목. 천년을 산 주목이 죽어서도 천년을 버티며, 허공에 팔을 휘저어 춤사위를 표현하고 있다. 멀리 함백산이 보인다 © 뉴스1

이름이 품위 있는 우리나라 산을 꼽자면 태백산(太白山)이 떠오른다. '크게 밝은 산'이라는 뜻이다. 우리 민족이 유독 신성하게 생각하는 산은 민족 신화의 발원지인 백두산인데, 그 백두산의 정기가 남쪽으로 내려와 솟구친 산이 태백산이고, 뿌리 맺힌 산이 지리산이다. 이에 백두산, 태백산, 지리산을 우리 민족의 영산이라 부른다. 태백산은 삼국시대 이래로 국가에서 제사를 지냈던 성지였고, 무속인에겐 신내림(신의 능력을 받는 일)을 받기 위한 필수적인 순례지였다. 현재도 산의 정기를 받기 위해 새해 첫 산행이나 시산제를 지내려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산이다.


태백산은 국토에서 가장 큰 산줄기인 백두대간의 허리에서 남과 북을 연결하고 낙동정맥을 빚어내 영남의 골격을 이룬다. 태백산에서 발원한 물이 검룡소에서 한강으로, 황지에서 낙동강으로 흘러 국토에 생명을 불어넣고 사람의 삶과 문화를 일구게 했다. 태백산은 그 이름처럼 눈의 산, 겨울의 산이다. 태백산 입구 당골에서 매년 1월에 눈꽃축제를 해왔고, 이때 맞춰 전국서 관광버스와 눈꽃열차가 당도한다. 안타깝게도 코로나 여파로 올해 눈꽃축제 행사는 취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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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1 김초희 디자이너

◇장군봉~천제단~당골…'살아 천년, 죽어 천년' 노목의 숲

태백산은 산세가 웅장하지만, 정상으로 향하는 모든 코스가 완만해 쉽게 오르내릴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가는 코스는 유일사 입구 주차장(895m)에서 장군봉(1567m)에 오르고, 천제단을 거쳐 당골(870m)로 내려오는 약 4시간 코스다. 산은 높지만 시·종점과 정상의 높이 차이가 700m 이하다.


유일사 입구 주차장에서 산행에 나선다. 망경사까지는 화장실이 없으니 주차장 화장실을 '억지로라도' 이용하는 편이 좋다. 눈길에서 필수인 아이젠과 스패치를 장착하고 스틱 높이를 허리보다 약간 높게 맞춰 출발한다. 유일사 쉼터까지 2.4㎞는 시멘트 포장과 흙길이 이어진 넓은 임도다. 초입은 급경사라 금방 숨이 차고 땀이 밴다. 어떤 코스든지 초반엔 천천히 오르면서 체력을 안배해야 한다. 워밍업이다.


가로수처럼 늘어선 낙엽송을 툭 건드리니 뒤에 가던 사람에게 눈발이 후두둑 떨어진다. 눈 내린 숲에서 흔히 하는 장난이다. 임도의 끝을 앞두고 대형 주목 한그루가 외롭게 서 있다. 주목은 군락을 지어 자라기 때문에 나머지 주목은 다 잘려 이 임도를 통해 반출됐을 것이다. 속도 차이에 따라 흩어진 일행이 유일사 쉼터에서 다시 만난다. 여기서 유일사가 내려다보이지만, 100m 급경사 길을 내려갔다 올라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제 임도를 벗어나 본격적인 등산로다. 돌계단과 나무계단이 반복되는 능선 오르막에 차가운 바람이 세차다. 시야가 트이는 곳에서 저 멀리 선자령의 하얀 풍차가 성냥개비처럼 서 있다. 약 800m를 숨차게 올라 태백산의 상징인 주목군락을 만난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의 노목, 거목들이 즐비한 천년의 숲이다. 사람들이 연신 탄성을 지르며 셔터를 눌러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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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 주목의 여름. 위로 솟구치는 청년주목 옆에서 천년 세월의 잔가지를 옆으로 뉘이고 있는 노인주목. ©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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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 주목의 겨울. 청년주목의 풍성한 이파리들이 눈송이를 흠뻑 이고 있는 가운데, 노인주목의 검은 줄기와 가지가 기품을 뿜어내고 있다. 사진 안주봉 © 뉴스1

◇“여유를 배우다”…붉은 나무의 장수 비결 '느림의 미학'

주목(朱木)은 '붉은'나무란 뜻으로, 나무껍질과 줄기의 속이 붉다. 작고 동그란 열매도 붉은데 맛은 달지만 독이 있다. 산에서 열매든 버섯이든 곤충이든 붉은색 생물체에겐 독 성분이 있을 확률이 높다. 눈에 잘 띄는 약점을 보완해 스스로 방어 물질을 분비하는 것이다.


주목이 장수하는 이유는 바로 '느림'이다. 나무줄기 두께가 10년 동안 1㎝ 정도밖에 자라지 않는다. 그만큼 재질이 단단하고 썩지 않아서 오래 살고, 죽어서도 천 년을 버틴다. 주목의 유전자를 복제해 사람에게 투입하면 오래 살 수 있을까? 수명은 아니더라도 그런 단단한 체력과 느림의 여유가 전해졌으면 한다.


태백산의 주목들은 살았든 죽었든 뒤틀리고 휘어지고 갈라진 몸에 장구한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죽은 나무에서도 기품과 위용이 뿜어져 나온다. '웅웅~ 휙휙~' 숲이 흔들리는 세찬 바람에 가지가 밑으로 옆으로 휜 나무들이 오히려 그 바람을 향해 저항하듯 서 있다. 천 년 동안 불었던 바람이 불자 눈송이가 툭 떨어지며 하얀 눈보라가 안개꽃같이 날린다. 노목과 바람과 눈이 그들의 절절했던 운명을 표현하는 가운데, 우리 철없는 사람들은 즐겁게 사진 찍고, 어린이처럼 뽀드득뽀드득 눈길을 오른다.


정상이 가까워져 오자 길 끝에 파란 하늘이 열린다. 고려시대 문인 안축이 '태백산에 오르다'라는 시에서 "몸은 날아가는 구름을 따라 학을 탄 듯하고, 높은 비탈에 걸린 돌길은 하늘의 사다리인가!"라고 읇었다. 그런 곳을 올라 장군봉에 이른다.


태백산 정상인 장군봉(1567m)에서 인근의 천제단(1561m)까지 펑퍼짐한 고원이 이어진다. 여기서 바라보는 조망은 백두대간의 중심답게 광활하고 아득하다. 코발트 빛 새파란 하늘 아래 수많은 봉우리와 능선들이 너울거리고, 산등성이에서 갈려 나온 산자락들이 수많은 계곡을 가르며 밑으로 사라진다. 풍경의 겉이 하얀 눈 이불에 덮여 아른아른 반짝거린다.


여기서 보는 일출은 장엄하다. 검은 지평선에서 불쑥 솟아오르는 햇덩어리가 천지창조를 하듯 온 세상을 크게 밝힌다. 태백(太白)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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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제단과 태백산 표지석. 천제단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氣)를 느끼게 된다. © 뉴스1

◇태백산 정기 품은 천제단…1470m 고지대 약수는 '꿀맛'

장군봉에서 5분쯤 거리에 태백산의 상징인 천제단(天祭壇)이 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길쭉한 말굽 형태 돌담 안으로 계단을 올라가면 돌로 쌓은 제단이 있고, 거기에 '한배검'이라 붉게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다. 한배검은 민족 신화에서 단군을 높여 부르는 이름, 또는 환인·환웅·단군의 삼신일체를 말한다. 이 제단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뭔가 이 주위에 '기'가 서려 있다는 느낌이 온다.


이 '천제단 영토'에서 좀 생뚱맞은 것은 한문으로 태백산이라 적힌 거대한 비석이다. 사람 키 두 배 되는 매끈한 가공석이 천제단의 신성한 기운이나 예스러움과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다. 키 낮은 자연석으로 바꿔 천제단에 어울리는 문화경관이 됐으면 좋겠다고 소망한다.


장군봉과 천제단의 한겨울에는 잠시도 서 있기 어려운 세찬 바람과 사진 한 장 찍기 어려운 한파가 몰아치는 날이 많다. 국립공원에서 텐트를 치는 것은 금지인데, 몇 년 전부터 비닐막 쉘터(텐트)를 치고 추위를 피하는 '전문가'들이 많아졌다. 비닐 막은 단속의 대상이 아니지만, 이 안에서 취사나 흡연·음주를 하면 과태료가 부과된다. 정상에서 좀 머무르니 등에 밴 땀이 차갑게 식어 오싹하다. 어서 내려가야 한다고 몸이 이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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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막 쉘터. 장군봉과 천제단 일원에서 비닐막 텐트를 치고 추위를 피하는 사람들 © 뉴스1

천제단에서 태백산 종점인 당골광장으로 내려가는 길은 두 갈래다. 능선을 따라 부쇠봉과 문수봉(1517m)을 거치며 태백산을 더 조망하고 당골로 내려가는 약 7㎞ 코스가 있고, 망경사로 내려가 반재를 거쳐 당골로 내려서는 4.4㎞ 코스가 있다. 대부분 1시간 반쯤 걸리는 망경사 방향 단거리 코스를 택한다.


천제단 밑에는 '비운의 왕' 단종을 산신령으로 모시는 단종비각(碑閣)이 나타난다. 인근 영월에서 운명한 단종이 태백산에 들어와 산신이 됐다는 전설이 있다. 여기서 조금 내려선 망경사에서는 우리나라 가장 높은 곳(1470m)에 있다는 용정샘의 물맛이 청량하다. 절 한쪽 매점에서 컵라면을 판매해 주말이면 사람들이 길게 늘어선다. 망경사를 떠나 가파른 내리막을 걸어 반재에서 한 번 쉬고 쭉 내려가 교량 3개를 넘는다. 석장승을 지나 곧 당골광장에 도착한다. 여기에 전국에서 온 산악회 버스와 대중교통이 하산객을 기다린다.


산 위에서는 '정상주'가 금지돼 산 밑에서 '하산주'와 뜨끈뜨끈한 국물로 뒤풀이하는 것으로 산행을 마무리한다. 4시간의 짧은 산행이지만 천 년의 주목과 2천 년 역사의 천제단에서 받은 깊은 울림과 기운이 몸속에 들어왔다.


태백산은 겨울의 눈꽃 산행도 좋지만 여름의 야생화 산행으로도 그만이다. 다음번 태백산 산행으로 금대봉에서 대덕산으로 이어지는 하늘의 꽃밭을 거쳐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로 내려가는 숲길을 가자고 결심해 본다.


​(서울=뉴스1) 신용석 기자 = ​stone1@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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