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워홀은 日記를 입으로 썼다!
앤디워홀. 미메시스 제공 |
사람은 두 종류로 나뉜다. 일기를 쓰는 사람과 일기를 쓰지 않는 사람.
일기를 쓴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자기 절제가 몸에 밴 사람만이 일기를 써나갈 수 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정신이 말똥말똥해야 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술에 떡이 되어 나무토막처럼 침대에 쓰러지는 사람이나 자기 직전까지 TV리모컨을 손에 쥐고 있다가 쓰러지는 사람은 불가능하다.
일기의 분량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또 일기라고 해서 매일 쓸 필요도 없다. 길든 짧든, 꾸준히 일기를 쓴다는 행위가 중요하다. 수첩에 그날그날에 있었던 일과 약속, 식사 장소, 메뉴만 적어놓고 핵심적인 대화 골자만 기록해도 그날 하루는 시간이 지나도 어느 정도는 복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마저 하지 않으면 그날은 새카맣게 날아간다. 인생의 금쪽같은 하루가 망각된다. 나의 존재가 시간과 함께 휘발된다.
일기를 쓴다는 행위는 번잡한 일상의 대로에서 벗어나 내면으로 나 있는 오솔길을 홀로 걸어가는 일이다. 소설가 이승우는 소설 '캉탕'에서 일기를 이렇게 규정한다. '일기는 자기를 향해 쓴 기도이고, 기도는 신을 향해 쓴 기도이다.'
일기장은 나만의 은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공간이다. 일기는 내가 읽으려고 쓰는 것이지 남이 읽으라고 쓰는 것이 아니다. 일기의 독자는 '나' 한 사람뿐이다.
그러나 어떤 인물의 경우,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그 일기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가장 유명한 일기는 이순신(1545~1598)의 '난중일기'(亂中日記)다. 물론 이순신은 '난중일기'라는 제목으로 쓴 일이 없다. '임진일기', '병신일기', '정유일기'라는 표제를 달아 써나갔을 뿐이다.
200년 흐른 뒤 이 세 종류의 일기를 한데 묶어 편찬하면서 편의상 '난중일기'라고 이름 붙였다. '난중일기'는 1592년부터 1598년까지의 기록이다. 이순신과 관련해 쏟아져 나온 소설과 연구서들은 대부분 '난중일기'를 일차 자료로 쓰인 것들이다.
이탈리아를 여행 중인 괴테 |
창부 찾아간 기록까지 남긴 괴테
역사에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후세 사람들이 연구해야 하는 경우 편지와 더불어 일기가 결정적인 일차 자료가 된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도 거의 매일같이 일기를 쓰고 편지를 쓴 사람이다. 괴테가 정말 대단한 것은 일기에 아주 은밀한 이야기까지 빼놓지 않고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런 사적인 기록을 통해 우리들은 18세기 로마의 사회상을 엿볼 수가 있다.
괴테는 바이마르공국에서 추밀원 고문으로 10년간 근무한 후 아우구스트 대공에게 알리지 않은 채 비밀리에 이탈리아 여행을 떠난다. 본명과 신분을 숨긴 채 괴테는 이탈리아에 잠입했다. 모든 속박과 구속에서 벗어나 평소 꿈꿔온 자유로운 연애를 즐긴다. 괴테의 위대한 점은 술집을 드나든 아주 사소한 일까지 있는 그대로 전부 일기에 기록했다.
그뿐이 아니다. 괴테는 매일 매일의 지출 장부를 기록했다. '세탁비 3리라' 하는 식으로 말이다. 지출 장부에는 '안다레아 돈나'(여자에게 가다)라는 가끔 보인다. 창부를 찾아간 내밀한 기록까지 남긴 사람이 괴테였다. 괴테는 이런 일기를 바탕으로 말년에 '이탈리아 여행기'라는 대작을 쓸 수 있었다.
프라하 대학 시절의 프란츠 카프카 |
'일기'라는 키워드로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도 흥미진진하다. 카프카는 프라하 대학에 입학하면서 일기를 썼다. 그러나 대학생 시절의 일기는 남아 있지 않다. 본인이 폐기하고 유언에 따라 일부가 소각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909년부터 1923년까지의 일기다. 타계 1년 전까지 쓴 그 일기장이 모두 12권에 달했다. 물론 며칠 건너뛰는 경우도 있었다. 여행 일기는 따로 썼다. 카프카는 프라하대학을 다니던 스무 살에 독서클럽 친구인 오스카르 폴라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독서의 목적과 관련, '한 권의 책은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며 명쾌한 촌철(寸鐵)의 명구를 남긴 바 있다.
1910년 12월16일 자 일기를 보면, 일기에 대해서도 카프카의 통찰력이 번득인다. 일기의 앞부분을 읽어본다.
'나는 일기 쓰는 것을 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나를 확인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만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바로 지금처럼 때때로 내 안에 가진 행복이란 느낌을 기꺼이 설명하고 싶다. 그것은 거품이 이는 어떤 것이다. 이것은 기분 좋게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는 것으로도 나를 완전히 채워주고, 또 내게 능력이 있다고 믿게 한다. 그런데 이 능력이 부재하다는 것은 매순간, 지금도 역시, 아주 확실하게 나를 설득할 수 있다.'
1910년 12월19일 자 일기를 보면 흥미로운 기술이 보인다.
'사무실에서 일을 시작했다. 오후에는 막스에게 들렀다. 괴테의 일기를 조금 읽었다. 먼 과거가 이 삶을 이미 진정시키며 꽉 쥐고 있는데, 이 일기는 거기에 불을 붙인다. 넓은 잔디밭을 보고 있노라면 공원의 울타리가 눈에 안정감을 주고 또 우리를 동등하지는 않지만 존중하게 만들 듯이, 전체 과정의 투명함은 그 일기를 신비스럽게 만든다….'
1915년 10월1일자는 '마르셀랭 드 마르보 장군의 회상록'을 읽고 '나폴레옹이 범한 과오들'이라는 제목의 독서 노트를 남겼다. 카프카는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패한 나폴레옹의 과오를 18가지로 요약‧정리했다. 카프카는 1924년 폐결핵으로 눈을 감았다. 폐결핵 투병 중이던 1923년에는 일기를 딱 한번 썼다.
앤디 워홀의 1982년 5월의 일기. 리차드 기어, 데브라 윙거, 스티븐 스필버그 등의 이름이 보인다. 조성관 작가 제공 |
워홀의 일기는 뉴욕 예술계 이면사
팝 아트의 황제, 앤디 워홀(1928~1987)도 일기를 썼다. 엄청난 분량의 일기를 워홀은 죽고 나서가 아닌 살아생전에 출판했다. 생전에 일기를 책으로 냈다는 것도 보통 사람의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일기를 쓰는 방법이었다. 워홀이 일기를 쓰기 시작한 시점은 뉴욕에서 팝 아트로 입지를 굳힌 뒤였다. 팩토리에서 작업도 해야 하고 뉴욕의 명사로서 매일 소화해야 하는 스케줄도 많았다. 그렇게 바쁜 팝 아트의 황제가 어찌 일기를 쓸 수 있었을까?
워홀은 일기를 손이 아닌 입(口)으로 썼다. 워홀은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전날 아침부터 잠잘 때까지 있었던 일을 비서에게 시시콜콜 털어놓았다. 비서는 이것을 받아 적은 뒤 일기로 타이핑했다. '앤디 워홀의 일기'(미메시스 간)는 이렇게 탄생했다. 워홀은 일기 하나에서도 평범하지 않다. 워홀스럽다.
2009년에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온 이 책은 자그마치 942쪽이다. 여름날 대청마루에 누워 목침으로 써도 될 정도의 두께다. '앤디 워홀의 일기'를 어디든 펴보면 뉴욕 예술계의 이면사(裏面史)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 앤디 워홀이 아니었으면 어찌 1960~1980년대 뉴욕 야사(野史)를 접할 수 있겠는가. 당연한 이야기지만 앤디 워홀을 연구할 때 '앤디 워홀의 일기'는 가장 많이 인용되는 참고 서적이다.
조성관 작가 author@naver.com @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