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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의 '딴짓' 부질없는 운장대…속세 떠난 '초월의 세계'

속리산국립공원 화북-문장대-천왕봉-법주사 14.8㎞ "마음 씻는 산행"

문장대 올라 '풍경수채화' 두 눈에 담고…천왕봉선 광활한 '산의 바다' 음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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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대. 사방팔방의 화려한 풍경을 바라보면 절로 글이 나올만 하다 © 뉴스1

속세를 떠나 속리산(俗離山)을 간다. 속리산은 한 때 법주사와 문장대를 묶어 수학여행의 메카였고, 속리산국립공원은 속리산을 중심으로 충청북도와 경상북도 경계에 걸쳐있는 여러 산과 계곡을 묶어 지정한 '연합국'이다. 문장대~천왕봉 능선의 서쪽은 보은, 동쪽은 상주이고, 공원면적의 절반에 해당하는 북쪽의 쌍곡, 선유동, 화양동계곡은 괴산, 그리고 대야산의 동쪽은 문경이다. 공원구역의 중심과 외곽으로 백두대간이 관통하는 국토의 척추로서, 최근에 북쪽으로부터 산양이 들어와 정착했고, 남쪽으로부터 반달가슴곰이 다가오고 있는 생태통로이기도 하다.


속리산 풍경은 설악산, 북한산, 금강산과 닮았다. 약 1억6000만 년 전에 함께 태어난 '화강암 형제'들이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깎이고 다듬어진 둥글둥글한 화강암들이 여러 봉우리에 빼곡하게 얹혀져 있다. 그 돌무더기 사이에서 휘어지고 갈라진 낙락장송과 안개와 구름이 어우러져 한 폭의 수묵화가 되는 속리산이다.


속리산국립공원의 수려한 자연 곳곳에는 천년 고찰이 들어서 있고, 계곡의 명소마다 유교의 구곡문화(九曲, 계곡의 아홉 굽이에 의미를 두는 관념)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세조임금, 임경업, 송시열 등 유명인들의 흔적과 속세를 떠난 무명인들의 스토리가 연연히 전해져 오고 있는 역사의 산, 인문의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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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ws1 김초희 디자이너

속리산 여행은 크게 법주사와 주변을 둘러보는 사찰관람과 소풍, 문장대나 도명산, 대야산을 다녀오는 산행, 그리고 쌍곡·선유동·화양동에서 즐기는 계곡유람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속리산의 최고봉은 천왕봉(1058m)이지만, 산행의 중심은 4m 낮은 문장대(1054m)다. 기자는 상주 쪽 화북에서 문장대에 올라 천왕봉을 거쳐 법주사로 내려서는 등로를 나선다. 속리산의 이목구비를 자세히 접하는 코스다.

◇ 화북~문장대~천왕봉 6.8km “문장대는 풍경 자랑, 천왕봉은 풍경 양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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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북에서 문장대로 향하는 오르막에서 탁 터진 산자락 풍경 © 뉴스1

경북 화북주차장에서 문장대까지는 3.4㎞, 천천히 걸어 2시간 거리로, 가장 빨리 올라갈 수 있는 코스다. 햇빛 쏟아지는 임도의 끝, 반야교를 넘어서며 다리 입구에 설치된 소독판에 등산화 바닥을 적신다. 신발바닥에 붙어있을지 모를 외부의 식물씨앗이나 미생물 유입을 막는 장치다. 세계적으로 야생의 자연에 가장 큰 해를 미치는 요인 중 하나가 외래종이다. 예전에 소나무를 전멸시피다 했던 솔잎혹파리나 뱀까지 마구 잡아먹었던 황소개구리가 대표적인 외래종이다.


컴컴한 숲에서 슬슬 올라가는 쉬운 길이지만, 엊그제 내린 장맛비로 공기가 축축해서 몸도 금방 축축해진다. 문장대까지 절반쯤 되는 지점에서 이제 좀 쉴까 할 때, 커다란 '쉴바위'가 나타난다. 배낭을 풀고, 건너편 바위 틈으로 나가, 툭 터진 산자락 전망을 바라본다. 폭염의 햇빛이 따갑지만, 땀에 젖은 몸에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 시원하다. '쉴'바위가 맞다.


쉴바위 이후로, 어느 산이나 그렇듯 정상에 가까울수록 길은 가팔라지고 계단이 많아진다. 앞서 간 사람의 땀방울이 번진 돌계단에 내 흔적을 줄줄 떨어뜨리며 올라서니, 이윽고 사람들이 웅성웅성대는 소리가 가깝다. 문장대와 천왕봉 갈림길이 있는 공터다. 오른쪽으로 200m 가면 문장대다. 1960년대 말의 산행기에 보면 이곳에 여관, 다방, 매점이 있었고, 문장대에 쇠다리를 걸쳐놓고 10원씩 '통행료'를 받았다고 한다. 문장대 정상석은 문장대 아래에 세워져 있는데, 생뚱맞게 경상북도 땅이라는 주소가 곁들여 씌여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충청도 땅으로 알아서 '구역'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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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대 입구에 서있는 정상석 풍경. 이 비석처럼, 정상석을 정상풍경을 배경으로 세워서 정상의 경관을 보호하는 것이 좋다 ©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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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대로 오르는 3단 철계단. 마지막 3단은 거의 수직으로 경사가 급하다. © 뉴스1

3단으로 설치된 철계단을 올라 문장대 꼭대기에 닿았다. 올라서는 사람마다 와아~ 하는 탄성을 지르며 난간에 다가선다. 국토의 중앙 산꼭대기인 여기에선 과연 뺑 둘러 시선이 막히는 곳이 없다. 동쪽 능선으로 문수봉, 신선대, 비로봉, 천왕봉이 장쾌하게 늘어서 있고, 서쪽으로 가까이 관음봉, 멀리 묘봉의 바위성(城)들이 조각처럼 빚어져 있다. 바다처럼 시퍼런 하늘과 솜뭉치같은 뭉게구름과 초록빛 산자락과 회색 바위봉우리들이 '풍경시합'을 하는 경연장이다.


'산의 바다'가 넘실대는 난간의 모서리에서 양팔을 수평으로 뻗으니, 영화 '타이타닉'에서 파도를 가르는 배의 선수(船首)에서 팔을 쭉 벌려 "날고 있어요!"라고 외쳤던 주인공의 심정이다. 이 가슴 뛰는 경관 앞에서 세조임금은 어떻게 책을 읽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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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대에서 속리산 풍경을 바라보는 탐방객. 산은 마음의 티끌과 두려움을 녹이고, 꿈과 용기를 준다 ©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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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높은 바위봉우리에 늘 구름이 걸려 운장대(雲藏臺)로 불렀는데, 조선의 세조가 이곳에 올라 글을 읽었다 해서 문장대(文藏臺)로 개명했다고 한다. 임금이 정말 올라왔다면 길이 없었을 당시에 얼마나 많은 가마꾼과 신하, 궁녀들이 고생했을까, 요즘 말로 정말 갑질이었을 것이다. 피부병이 심했던 세조임금이 다녀가서 그랬을까. 문장대 정상의 넓고 매끈한 암반에 십여 개의 구덩이가 숭숭 패여있다. 지질학적으론 풍화작용을 심하게 받아 생긴 나마(gnamma, 가마솥바위)이지만, 스토리텔링을 하자면 세조임금에게 핑계를 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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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대에서 바라본 천왕봉(가운데)까지 종주능선길 © 뉴스1

문장대에서 천왕봉까지는 3.4㎞의 울퉁불퉁한 능선길이다. 십여 개의 봉우리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길인데, 사람에 따라 쉬운 길이기도 하고, 중간에서 하산길을 택하는 어려운 길이기도 하다. 30분쯤 가니 라면과 막걸리를 파는 신선대 휴게소가 있다. 이 험한 백두대간의 마루금 정상이 어떤 연유로 개인 땅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파라솔을 펼쳐놓은 벤치의 가장자리에 신선대 표지석이 초라하게 박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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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대와 입석대 사이에 있는, 엄마와 아기 고릴라 바위 © 뉴스1

휴게소를 내려서서, 경업대 갈림길을 지나, 입석대까지의 종주길은 대부분 답답한 숲길과 거대한 바위틈이다. 좁은 길에 우거진 조릿대가 얼굴을 때리고, 앵앵거리는 벌레가 입으로 들어오고, 폭염에 후끈한 공기가 끈적거려 땀이 비 오듯 하는 고행의 길이다. 내가 선택한 길이다.


그러려니 하고 쭉 나아가니 풍경이 탁 터지면서 임경업 장군이 세웠다는 입석대가 우뚝하고, 비로봉의 바위무더기가 웅장하게 펼쳐진다. 답답했던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다. 능선길의 바위들은 모두 각이 없고 둥글둥글하다. 장대한 세월동안 다듬어진 '바위영웅'들이다. 비로봉 뒤에 피라미드 모습의 천왕봉도 스카이라인이 유순하다. 냉장고를 통과하듯 시원한 바위석문(石門)을 통과해 천왕봉에 다가선다.

◇ 천왕봉~세심정~법주사~상가 8km “천왕봉 광활한 조망, 법주사 금빛 부처님 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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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 1000m급 정상이 소박하지만, 여기서 바라보는 경관은 광활하고 무한하다 © 뉴스1

꾸역꾸역 걸어 도착한 천왕봉은, 이런 1000m급의 산정상이 있을까? 할 정도로 협소하고 밋밋한 돌무더기다. 협소하고 밋밋하다니. 기자는 자신의 '협소한 통찰력'을 책망한다. 문장대에서 둘러본 경관이 화려해서 사람을 들뜨게 한다면, 여기서 바라보는 사방팔방의 풍경은 광활하고 초연해서 사람을 착 가라앉힌다. 같은 속리산이지만, 문장대는 여전한 속세이고, 여기 천왕봉이야말로 속세를 떠난 ‘초월의 세계’다. 최고봉이지만, 다른 봉우리들에게 명성을 다 내 준 천왕봉의 여유를 음미해 본다.


천왕봉 정수리에 빗물이 떨어지면 0.1mm의 차이로 각각 동쪽의 낙동강, 남쪽의 금강, 북서쪽의 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들 삼파수(三派水)는 간발의 차이로 운명을 달리했다가 결국 바다 어디선가 다시 만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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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에서 내려다 본 속리산. 산이 바다처럼 넘실대는 광활한 풍경 © 뉴스1

왔던 길을 300m 돌아나와 하산길을 내려선다. 약 3㎞의 내리막길은 끝까지 경사가 급하고 계단이 많다. 장거리 산행 끝이라 무릅과 발목에 신호가 오기 시작한다. 무릎보호대를 조이고, 스틱을 탁탁 박으며 천천히 내려선다.


30분쯤 내려서면 상환암이다. 상환(上歡)은 환희심(즐겁고 기쁨 마음)이 넘친다는 뜻이다. 절벽 위 좁은 터에 작은 전각 몇 개를 올린 암자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본다. 아래의 깊은 골짜기를 은폭동(隱瀑洞)이라 한다. 커다란 바위에 가려 소리만 들리는, 숨어있는 폭포가 있는 계곡이다. 속세를 떠난 산에서, 풍경마저 숨기고 있으니, 이곳은 속리산 안의 속리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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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환암. 절벽 위에 얹혀진 암자는 속세를 떠난 나룻배와 같다 © 뉴스1

다시 20분쯤 내려가 계곡물을 만나 청량한 자연수를 몇 모금 들이키고, 5분쯤 내려가면 세심정(洗心亭)이다. 예전엔 마음을 씻는 자리였지만, 지금의 정자는 음식점이다. 여기서 문장대로 가는 등산로 입구에 '이뭣고다리'라는 교량이 있다. '이뭣고'는 나의 참모습은 무엇인가?라는 화두(話頭/깨닫기 위해 풀어야 하는 의제)다.


이제 산은 다 내려왔고, 세조길이라 쓰인 '게이트 조형물'을 통과해 계곡길을 걷는다. 피부병이 심하던 세조가 요양차 속리산을 오고갔던 길이다. 소나무, 서어나무, 물푸레나무가 울창한 숲밑 그늘길이다. 평평한 바닥은 황마매트와 목재데크로 덮여 발에 걸리는 게 없다. 동행이 있으면 그의 손을 잡고 눈 감고 걸어도 되는 길, 휠체어도 편안하게 갈 수 있는 '무장애 탐방로'다.


계곡길의 끝에 더덕막걸리 한 대접을 지나치기 어려운 휴게소가 있고, 그 밑에 고요한 저수지의 테두리를 둘러가는 데크길이 이어진다. 혹시 전에 보았던 수달의 귀여운 얼굴을 볼 수 있을까, 저수지 둘레에 나무뿌리가 뒤엉킨 지점들을 눈여겨 둘러본다. 그곳이 수달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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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 천왕문 앞에서 절을 지키는 '잣나무 수문장'의 표표한 기상 © 뉴스1

저수지를 지나면 곧 법주사다. 템플스테이를 권유하는 현수막에 "다 잘될거야, 마음 속 뚫린 구멍들에게 따듯한 위로를 합니다"라는 따듯한 문구가 있다. 법주사(法住寺)라는 이름은 꽤 묵직하다. 법(부처의 진리)이 머무는 절이다. 법주사의 수많은 문화유산 중에서 하나를 고르라면 첫 번째는 팔상전이고, 두 번째는 금동미륵대불이다. 팔상전(捌相殿)은 우리나라 유일의 5층 목탑 건물이다. 목탑 안에 석가모니의 생애를 여덟 장면으로 그린 팔상도가 있다.


33m 높이의 길쭉하고 웅장한 금동미륵대불(金銅彌勒大佛)은 신라시대에 청동으로 만들어져 천년 간 내려오다, 구한말에 당백전(화폐)의 재료로 쓰기 위해 청동을 녹여버렸다. 그 엽전이 단 6개월만 유통되었다 하니 너무 억울한 일이다. 이후 이 불상은 시멘트, 청동으로 바뀌었다가, 청동 위에 80kg의 금막을 입혀 현재의 금빛 나는 랜드마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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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 금동미륵대불과 팔상전 © 뉴스1

법주사를 나와 속세로 나가는 길목인 일주문에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한글세대는 알아듣기 어렵다. '충청도 제일의 절' 이렇게 바꾸면 어떨까. 매표소를 빠져나가며, 예전에 어떤 글에서 "돈은 절이 받고 인심은 충청도가 잃는다"는 문장이 생각났다.


법주사에서 버스터미널까지 약 2km의 소로를 오리숲이라고 한다. 길 옆으로 상가건물이 빼곡하다. 예전에 그 많던 수학여행과 단체유람객들을 받아내던 식당촌이다. 정통 한정식과 산채비빔밥, 갖가지 버섯을 넣고 끓여내는 버섯전골의 명성은 여전하다. 속리산에서 잠깐 살았던 기자에게 가장 각인된 맛은 올갱이국이다. 주변에서 잡은 올갱이(다슬기)에 시래기와 배추를 넣어서 끓여낸 올갱이 된장국은 속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최고의 해장국이다.


산에 가는 이유 중 하나는 속세의 시시비비로부터 벗어나 초연한 시간과 공간을 갖기 위해서다. 그러기에 딱 좋은 속리산이다. 버스 차창으로 정이품송이 지나간다. 한 쪽의 큰 가지가 부러져 좌우대칭의 폼은 망가졌지만, 800년이 넘는 연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장관 소나무'로서의 품격은 흐트러지지 않았고, 푸릇푸릇한 바늘잎들은 청년의 짙푸름을 유지하고 있다. "몸은 변하지만 기상은 변치 말라!"는 노송의 덕담을 들으며 속세로 나아간다.


(서울=뉴스1) 신용석 기자​ stone1@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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