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의 탄생과 당신이라는 삶
조동범, 속도의 인문학
당신은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온다. 매끈한 자동차가 칠월의 햇살에 눈부시다. 당신이 쥔 스티어링휠의 질좋은 가죽의 감촉이 부드럽게 손 끝에 와닿는다. 당신은 엑셀러레이터를 밟아 어렵지 않게 속도를 높인다. 속도계는 어느덧 시속 100km를 훌쩍 넘기지만 평화로운 오후와도 같이, 속도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당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낯선 도시의 바다가 펼쳐진 해변도로에 가닿을 것이다. 당신이 출발한 곳과 낯선 고장의 바닷가는 꽤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그 거리가 아무렇지도 않은 오후의 한순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의 자동차가 칠월의 햇살을 가로지른다. 차창 밖으로 무수히 많은 시간이 지나가고,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속도가 되어 사라진 오후의 어느 한순간을 감각하며 일상의 속도 속으로 잠입해 들어간다.
속도는 이제 일상이고,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을 말할 때처럼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이제 우리에게 속도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지 오래이다. 이러한 속도에 익숙해진 우리의 삶은 속도에 무감각해짐으로써 속도의 비극에 매몰되기 시작했다. 속도는 과연 언제부터 우리 삶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했는가. 아마도 인간의 삶에 속도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된 것은 마차가 발명된 이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속도가 인간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애초부터 존재했던 것임은 분명하다. 당연히 속도는 인간의 삶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이며, 그것의 빠르기는 때로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우주의 역사는 애초를 알 수 없고 그 끝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속도의 빠르기와는 다른 감각을 갖게 한다. 그것은 마치 느리게 흘러가는 순간들의 집합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지리멸렬하게 흘러간 과거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우주의 속도는 결코 느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우주의 속도는 현대의 과학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만큼 빠른 것이었다. 하지만 현대 이전의 속도는 단순한 시간의 흐름일 뿐이었다. 그것의 빠르기는 그저 과거로부터 미래를 향해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현대 이전의 속도는 삶과 세계의 총체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속도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단순히 빠르고 느린 것에 국한되는 속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속도는 단편적인 빠르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세계를 총체적으로 지배하는 하나의 개념이다. 그리하여 속도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과 세계를 파악하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삶과 세계의 모든 실체와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한 빠르기를 넘어서는, 현대문명사회의 속도는 삶의 의미와 사유, 세계의 구조와 질서, 환희와 고통, 소비와 욕망 등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속도는 언제나 우리의 삶 또는 세계와 끊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 수밖에 없다. 속도는 우리의 삶과 세계와 끊임없이 관계를 맺음으로써, 그것 자체가 우리의 삶과 세계를 의미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어느덧 우리의 삶과 세계는 속도 자체가 되어 스스로 멈출 수 없는 하나의 괴물로 진화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현대적 의미의 속도는 언제부터 우리의 삶과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는가. 이와 같은, 현대적 개념으로서의 속도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마차의 발명 이후에 생겨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마차 이후의 대표적인 탈거리인 자동차의 발명 이후에 본격적으로 우리 삶에 영향을 주기 시작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주지하듯 속도는 단순히 빠르거나 느리게 움직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삶 전반을 이루는 그 모든 것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우리의 삶과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속도는 생산량과 긴밀한 관계에 놓임으로써 물질적 풍요로움과 관계를 맺거나, 강도 높은 노동을 통해 고통스런 삶의 양상과 관계를 맺기도 한다. 이외에도 속도는 우리 삶의 무수히 많은 영역 안에서 삶과 세계를 주도하며 그것을 지배하게 된다. 그리하여 속도는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현대 이전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 삶의 패러다임은 과거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어버리게 된다. 이제 속도는 자의든 타의든, 그것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든 부정적으로 인식하든 우리의 삶과 세계를 이루는 중요한 축이 되어버린지 오래이다. 따라서 속도는 당연하게도 긍정과 부정이라는 두 얼굴을 지닌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속도가 지니고 있는 이와 같은 양가적 모습에도 불구하고, 속도는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인식을 전제하는 경우가 많다.
당신이 자동차를 타고 출근을 하거나 여행을 떠날 때, 전화를 통해 누군가와 통화를 할 때, 그리고 대형마트의 따사로운 조명 아래에 놓인 물건을 쇼핑할 때에도 속도는 당신의 삶과 하나가 되어 펼쳐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속도라고 인식하지도 못한 채, 지극히 당연하고 익숙한 삶의 양상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당신이 한가로운 커피집에 앉아 무미건조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조차도 속도는 당신의 삶을 지배하며 무서운 기세로 달려간다. 물론 당신이 먼 곳을 여행하는 친구와 문득 통화를 하고 싶을 때, 다른 도시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질 때, 속도는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경이로운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속도로 점철된 현대문명사회가 비극을 향해 쉼없이 나아가고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당신은 속도에 내몰린 채 더 많은 일에 시달릴 것이며, 더 많은 것들을 소유하기 위해 끊임없는 욕망에 시달릴 것이다. 그리고 속도의 노예가 되어 현대의 비극 속으로 끊임없이 추락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 삶의 필연인 속도는 그렇게 긍정과 부정이라는 양면을 번갈아 보여주며 우리의 삶을 쥐고 흔든다.
하지만 속도가 대체적으로 긍정보다는 부정을, 자연스러운 것보다는 인위적인 것을, 인간적이기보다는 비인간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은 부인할 수는 없다. 속도는 분명히 황폐한 삶의 국면과 긴밀한 관계 속에 놓인다. 그래서 우리는 속도 위에 놓인 우리의 삶과 세계를 불안정한 것으로 인식하고 그 상태로부터 벗어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그러나 속도는 무작정 거부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는 속도를 거부하고 느리게 사는 것을 꿈꾸지만 어쩌면 그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소망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느리게 사는 것을 꿈꾸지만 속도의 세계를 결코 떠날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느리게 사는 것을 꿈꾼다는 것은 속도를 떠날 수 없다는 말과 같은 의미일지도 모른다. 제주의 올레길이나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느리게 걷는 것은 속도의 비극을 벗어나기 위한 간절함 때문이지만, 그 길의 끝에 속도로 가득한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더 불행한 것은 우리가 이와 같은 비극적 속도를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속도가 우리 삶 전반을 지배하고 영향을 미치지만 정작 우리는 이러한 속도의 의미를 감지하지 못한 채 그저 소비할 뿐이다. 속도의 비극성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우리의 삶과 세계는 그것을 거부하고 벗어날 수 없는 지점에 이르고 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속도를 부정하고 싶은 경우에도 우리 삶은 대체적으로 속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현대문명사회의 시스템은 속도를 소비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우리를 속도 안에 가두고 지배한다. 불행하게도 우리 삶이 속도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앞으로도 요원해 보인다. 물론 현대문명사회의 비극성에 대해 우리는 무수히 많은 고민을 토로하고 공유하며 그것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본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그러한 비극적 인식을 통해 우리는 속도를 벗어날 수 없음을 재확인하고 좌절할 뿐이다.
그러나 속도로부터 비롯되는 가장 큰 비극은, 그것이 비극임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속도를 애타게 갈망하고 소비하는 우리 삶의 모습 때문일 것이다. 속도가 비극이라는 인식은 우리의 이성 안에서만 인지되고 사유될 뿐, 그것은 결코 우리 삶의 전면에 부각되지 않는다. 속도가 비극이라는 이성적 판단과는 별개로 속도의 비극은 우리의 삶과 강력한 친화력을 드러내게 된다. 그리하여 그곳에 남게 되는 것은 속도의 쾌락과 소비와 욕망뿐이다. 이로써 속도를 비극으로 인식하는 이성적 판단과, 그것이 전달하는 쾌락과 욕망을 향유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개념이 된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과 세계는 복원될 수 없는 폐허를 향해 끝없는 추락과 질주를 하게 된다. 바로 그곳에 속도를 즐기기 위해 안달이 난 우리들의 모습이 있으며, 그것을 즐기고 소비하고 욕망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 존재한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바로 그것이 벗어날 수 없는 우리 삶의 실체이고, 되돌릴 수 없는 세계의 본질이다.
조동범(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