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가 물러선 이유? '애플은 애플이라 부르면 안 된다'
CNBC "애플, 파트너사에 비밀유지계약 요구"…
과거 건당 500억원 벌금 사례도
"현대차는 지난주 초기 협상을 진행중이라고 했다가, 그 직후 애플의 이름을 빼면서 한발 뒤로 물러섰다. 이는 애플이 파트너사와 관계에 있어서 '비밀 준수'(secrecy)를 얼마나 중시하는지 보여준다."
지난해 10월 13일 캘리포니아주 쿠퍼티노시 애플파크에서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가 새로 나온 아이폰12를 선보이고 있다./사진=AFP |
미 경제매체 CNBC가 애플 특유의 '비밀주의'를 꼬집었다. CNBC는 14일(현지시간) '현대가 알게됐듯 애플과 비즈니스를 한다는 것은 아마도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Doing business with Apple means you probably can’t tell anyone about it, as Hyundai learned)'라는 제목의 보도를 냈다.
"애플 파트너사·공급사, 비밀유지계약(NDA) 요구받아"
현대차는 지난 8일 "당사는 다수의 기업으로부터 자율주행 전기차 관련 공동개발 협력요청을 받고 있으나, 초기단계로 결정된 바 없다"는 미확정 공시를 내면서 사태를 일단락했다. 현대차가 한발 물러선 것은 애플이 공급사 및 잠재적 파트너사에 대한 비밀 유지를 강조했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애플은 상장사이거나 주요 고객사의 경우에도 엄격한 비밀유지계약(NDA·Non Disclosure Agreement) 준수를 강요해왔다는 것.
정보통신기술(ICT)업계에서 공급 계약을 비밀로 하는 일은 흔하다. A업체가 B업체에 부품을 공급하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A는 이 사실을 공공연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애플의 NDA는 유별난 점이 있다.
애플과 관계 때문에 익명을 요구한 한 업계 관계자는 "애플은 공식적인 자리와 언론에 애플의 이름을 언급해선 안 된다고 파트너사에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애플의 NDA는 '뛰어넘어야 할 허점'이라고 했다.
지난해 10월 23일 아이폰12가 출시된 날 뉴욕시 5번가 매장 앞에 사람들이 거리두기를 준수하며 줄을 서 있다./사진=AFP |
1개 비밀 발설하면 549억 벌금…홍보도 애플 서면승인 받아야
애플의 과거 디스플레이 협력사였던 'GT어드반스드테크놀로지스(GT Advanced Technologies)'가 파산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이 하나 있다. 애플은 이 업체에 1개의 비밀유지가 깨질 때마다 5000만달러(약 549억4500만원)를 물어야 한다는 조항을 계약서에 넣었다. 또 다른 계약서에는 애플과 관련된 어떤 홍보도 서면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적시했다.
일부 업체는 제한적으로 애플과의 관계를 언급할 수 있다. 애플이 해당 업체와의 관계를 공식 언급하는 경우로서 대표적 사례가 코닝이다. 애플에 터치스크린용 유리를 납품하는 코닝은 2017년 이후 애플과 최소 4억5000만달러(약 4939억원) 규모 계약을 맺었고 애플은 보도자료에서 '미국 제조기업을 지원하는 사례'로 코닝을 언급했다.
웬델 윅스 코닝 최고경영자(CEO)는 애플이 최근 아이폰12 출시에서 새로운 강화유리를 언급하기 전까진 애플을 언급하는 것이 편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지난해 10월 실적 컨퍼런스콜에서 윅스 CEO는 "애플의 이름을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회사 내부에서도 애플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애플을 부르는 '코드명'이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실리콘밸리선 '과일 회사'로 통하기도
실리콘밸리에서는 애플을 '과일 회사'(Fruit Company)로 부르기도 한다. 심지어 애플은 캘리포니아주 쿠퍼티노시 본사 기념품샵에서 "나는 애플캠퍼스를 방문했고 이게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라고 쓰인 티셔츠를 팔기도 했다.
애플의 신비주의 집착은 고 스티브 잡스 창업주에서 비롯됐다. 잡스는 신제품 출시에서 '놀라움'이란 요소를 중시했고, 신제품 출시 이벤트를 '스펙터클한 일'로 만들기 위해 철저한 비밀유지를 강조했었다.
'놀라움과 즐거움'(surprise and delight)은 지금도 애플이 신제품 출시에서 중시하는 마케팅 컨셉트다.
고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주가 2010년 6월 7일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아이폰 4 신제품을 발표하고 있다./사진=AFP |
지난해 10월 공개된 애플의 '비즈니스 수행 정책'을 보면 애플은 직원들이 자사 비즈니스 정보를 공급업체에 알릴 때 '매우 선별적'이어야 하며 꼭 필요한 정보 이상을 말해선 안 된다. 또 공급사들도 애플의 기밀 유지 정책을 따라야 한다고 돼있다.
미국 오디오칩 제조업체인 시러스로직은 지난해 3월 미 증권거래위원회(SEC) 공시에서 애플이 자사 연 매출의 81%(12억8000만달러)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그 전까지 시러스로직은 프리젠테이션에서 '1번 고객'이라고 썼을 뿐 애플 언급을 피해왔다.
지난해 6월 반도체업체 브로드컴의 호크 탄 CEO는 무선사업 매출 전망에 대해 밝히면서 아이폰12가 예상보다 늦게 출시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하지만 애플이란 이름 언급은 피하고 '최대 북미 휴대폰 고객사'라고만 말했다.
황시영 기자 appl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