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까불면 쏴버려"…전쟁이 호재가 된 비정한 증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
전쟁 위기가 주식시장에 호재가 될 수 있을까. 국제유가 폭락이 주식시장의 최대 악재라면 그럴 수 있다. 중동에서의 전쟁은 유가를 끌어올리는 재료니까.
이런 비정한 상황이 실제로 벌어졌다. 22일(현지시간) 이란 함정들이 미 군함을 도발할 경우 격침하라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지시가 국제유가를 폭락에서 건져냈고, 반등한 유가가 주가를 밀어올렸다.
미국 경제방송 CNBC의 간판 앵커인 투자전문가 짐 크레이머는 "트럼프 대통령의 공격 지시가 국제유가 선물에 대한 공매도 환매수(숏커버링)를 촉발해 유가를 끌어올렸다"고 말했다.
트럼프 '이란 함정 격침' 명령에 유가 급반등
이날 뉴욕증시에서 블루칩(우량주) 클럽인 다우존스산업평균지수는 전날보다 456.94포인트(1.99%) 오른 2만3475.82에 거래를 마쳤다.
대형주 위주의 S&P(스탠다드앤푸어스) 500 지수는 62.75포인트(2.29%) 상승한 2799.31,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종합지수는 232.15포인트(2.81%) 뛴 8495.38을 기록했다.
유럽증시도 오름세였다. 범유럽 주가지수인 스톡스유럽600은 전날보다 5.83포인트(1.80%) 높은 330.14로 마감했다.
최근 사상 초유의 '마이너스 기름값'을 연출하며 '디플레이션'(물가하락) 공포를 몰고왔던 국제유가가 반등에 성공한 게 주식시장에 안도감을 줬다.
이날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WTI(서부 텍사스산 원유) 6월 인도분은 전날보다 배럴당 2.21달러(19.1%) 뛴 13.78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지난 20일 마이너스(-) 40달러까지 떨어졌던 5월 인도분은 전날 거래가 만료됐다.
런던 ICE 선물거래소에서 국제유가의 기준물인 6월물 북해산 브렌트유는 저녁 8시28분 현재 배럴당 1.47달러(7.60%) 떨어진 20.80달러를 기록 중이다.
코로나19(COVID-19) 사태에 따른 글로벌 수요 급감과 원유 저장공간 부족 탓에 전날까지 사상 최악의 폭락세를 보인 국제유가가 기술적 반등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미국과 산유국인 이란의 군사적 긴장 고조도 한몫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아침 트위터를 통해 "나는 미 해군을 상대로 바다에서 이란 고속정들이 우리 함정을 성가시게 하면 발포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지시는 이란 혁명수비대 소속 소형 고속정 11척이 걸프해역 북부에서 훈련 중이던 미 해군과 해안경비대 함정 6척에 접근한 사건 일주일 만에 나왔다. 이 사건은 지난 15일 미 함정이 지역 순찰 일환으로 훈련을 진행하던 중 발생했다.
미국과 이란 간 무력 충돌 상황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미 국방부는 이란이 충돌이나 그 이상의 상황을 야기하는 위험하고 도발적 행동을 했다고 비난했다. 미국은 이란 고속정이 약 1시간 동안 미 함정 주변을 맴돌며 한때 10야드(약 9m) 거리까지 접근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이란 혁명수비대는 19일 자신들의 작전 수행을 미 해군이 비전문적이고 도발적 방식으로 방해했다고 반박했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아라비아 왕세자/ AFP=뉴스1 |
"유가 쇼크, 다른 분야 파급 가능성 주시"
그러나 국제유가 반등세가 계속 이어질 것으로 단언하긴 이르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선진국들의 봉쇄(락다운)가 유지되는 한 수요가 살아날 수 없는 탓이다.
루쏠드그룹의 짐 풀젠 수석전략가는 "이번주 투자자들은 코로나19 위기가 잦아들더라도 셧다운된 분야의 경제적 충격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석유는 2∼3개월만 수요가 없어도 과잉공급 때문에 가격이 마이너스로 갈 수 있다"고 했다.
미즈호증권은 다음달 국제유가가 배럴당 마이너스 100달러까지 추락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프루덴셜파이낸셜의 퀸시 크로스비 수석전략가는 "석유 시장의 문제가 다른 분야 또는 다른 자산으로 파급될 가능성을 주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TI·치폴레 등 예상밖 실적 호조
코로나19 사태 속에서도 일부 기업들이 예상 밖의 실적 호조를 보인 것도 주식 매수 심리를 자극했다.
멕시칸 패스트푸드 체인 치폴레는 1/4분기 온라인 매출이 81% 신장했다는 소식에 주가가 12% 넘게 뛰었다. 반도체업체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도 호실적에 주가 5% 가까이 올랐다.
금융정보업체 레피니티브에 따르면 현재까지 S&P 500 소속 기업들 가운데 84곳이 1/4분기 실적을 발표했는데, 이 중 67%가 시장 전망치를 웃도는 실적을 내놨다.
대표적 안전자산인 금 가격도 뛰었다. 이날 오후 4시44분 현재 뉴욕상업거래소에서 4월물 금 가격은 전장보다 49.30달러(2.92%) 급등한 1737.10달러를 기록했다.
미 달러화도 강세였다. 같은 시간 뉴욕외환시장에서 달러인덱스(DXY)는 전 거래일보다 0.11% 오른 100.37을 기록했다. 달러인덱스는 유로, 엔 등 주요 6개 통화를 기준으로 달러화 가치를 지수화한 것이다.
스티븐 므누신 미국 재무장관 |
므누신 "늦여름까진 경제활동 재개 기대"
스티븐 므누신 미국 재무장관은 늦여름까진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봉쇄(락다운)가 대부분 풀릴 것으로 기대한다며 시장에 기대감을 불어넣었다.
므누신 장관은 이날 폭스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우리가 빨리 일터로 돌아가길 희망한다"며 "여름 후반부가 될 때까지 전부는 아니라도 경제활동을 재개할 수 있길 고대한다"고 말했다.
그렌메드트러스트의 마이클 레이놀즈 투자전략책임자는 "터널 끝의 빛이 보인다"며 "경제활동 재개가 어떤 식으로 이뤄질지 어렴풋하지만 가시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날 미 상원이 4840억달러(약 600조원) 규모의 코로나19 추가 지원 패키지를 통과시킨 것도 투자심리에 도움을 줬다. 코로나19 사태에 대응한 4번째 지원책으로, 역사상 두번째로 큰 규모다. 이날 상원의 포결에 이어 이르면 23일 하원의 표결이 예상된다.
이번 패키지의 핵심은 중소기업을 위한 급여보호프로그램(PPP) 자금 3210억달러를 추가하는 것이다. PPP는 코로나19 사태에도 직원을 해고하지 않는 직원 500명 이하 중소기업이 직원들에게 급여를 지급할 수 있도록 2년간 최대 1000만달러를 무담보로 빌려주는 프로그램을 말한다.
앞서 의회는 2조2000억달러 규모의 '슈퍼 경기부양책'를 통해 PPP에 3500억달러를 배정했지만, 신청이 몰리면서 2주일도 안 돼 자금이 모두 바닥났다.
이 과정에서 유명 햄버거 체인 쉐이크쉑(Shake Shack) 등 일부 대기업들이 중소기업용 PPP 자금 지원을 신청해 논란이 일었다. 쉐이크쉑은 비난 여론에 부딪혀 결국 신청을 철회했다.
뉴욕=이상배 특파원 ppark14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