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마', 남자가 입어봤다[남기자의 체헐리즘]
남기자의 체헐리즘
[머니투데이 남형도 기자] [편집자주] 수습기자 때 휠체어를 타고 서울시내를 다녀본 적이 있습니다. 장애인들 심정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생전 보이지 않던, 불편한 세상이 처음 펼쳐졌습니다. 뭐든 직접 해보니 다르더군요. 그래서 체험해 깨닫고 알리는 기획 기사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체헐리즘' 입니다. 제가 만든 말입니다. 체험과 저널리즘(journalism)을 하나로 합쳐 봤습니다. 사서 고생한단 마음으로 현장 곳곳을 몸소 누비겠습니다. 깊숙한 이면의 진실을 알리겠습니다. 소외된 곳에 따뜻한 관심을 불어넣겠습니다.
[이틀간 치마 입고 출·퇴근, 시선에 옴짝달싹 못하고 결국 포기…통풍 잘돼 여름에도 시원, '편견' 없었다면]
서울 명동 한복판에, 치마를 입고 섰다. 지나가던 행인에게 찍어달라고 했다. 당당한 척하지만, 실은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사진=명동 행인 |
걸을 때마다 치마 위 하얀 꽃들이 물결처럼 넘실댔다. 사뿐사뿐, 흡사 아무것도 안 입은 듯 가벼운 느낌이었다. 한여름 오후 기온은 섭씨 29도, 푹 찌는 공기는 마스크 안에서 맴맴 돌아 숨구멍을 턱턱 막았다. 더위를 많이 타는 내겐 고역이었다. 그때였다. 휙 불어온 바람이 치마 안까지 들어와, 두 다리와 엉덩이를 시원히 감싸는 게 아닌가. 더웠던 몸이, 순간 기분 좋게 시원해졌다. 오감(五感)을 곤두세워 그 느낌을 한땀 한땀, 메모장에 적었다. 이 좋은 걸, 남성들에게 꼭 알려야 했기에.
이 모든 일은, 38년이 지나도록 살아 있는 나의 몹쓸 호기심에서 시작됐다.
어느 주말이었다. 아내와 난 저녁을 먹으며, 벌써 다섯 번째 사망한, 내 바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사인(死因)은 바지의 한계점을 고려하지 않은, 두 다리의 장력 때문이랄까. 쉽게 말해, 하체가 뚱뚱한데 의자에 자꾸 양반다리를 하고 앉으니 가운데 부분이 터진 거였다. 수선 비용이 3000원인 것까지 외울 정도였다. 아내는 실소를 터트렸다. 영 면목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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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꽉 끼는 바지 탓을 했고, 여름이라 덥고 답답하다며 토로했다. 아내는 "내가 입는 치마는 참 편하고 시원한데"라고 했고, 난 "그게 그렇게 시원해?"라고 하지 말았어야 할 질문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같이 안방으로 향했고, 아내는 편한 베이지색 치마 하나를 건넸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것은 내 뱃살을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난 탄성이 터졌다. "대박이야, 신세계다. 왜 이제 알려줬어?"
난 치마를 체험해보겠다고 했다. 아내는 그렇게까지 돈을 벌진 않아도 된다고, 그 정도로 집이 어렵진 않다고 했다.
그래서 난 아내에게 진지하게 얘기했다. 38년 동안 바지를 입었었고, 중요 부위가 상당히 억압돼 있었다고. 왼쪽으로 향할지, 오른쪽으로 갈지 항상 갈팡질팡했다고. 그러니 어쩌면 치마는 남성에게 더 적합한 옷인지도 모른다고. 그로 인해 몇몇 남성들이 치마를 입고, 그래서 그곳이 좀 더 시원해지고, 그러면 저출산 해결에 다소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그것이 '나 비효과(화려한 치마가 나를 감싸네)'라고 말이다.
내 멘탈이 허락하는 데까지 체험해보기로 했고, 정확히 이틀(15~16일)을 채웠다. 치마를 벗으면서 거실 바닥에 쓰러졌고, 장장 10시간을 푹 자고 일어나 다시 두통약을 먹었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다음은 나를 스쳐 간 두 벌의 치마를 추억하며, 세세하게 남긴 기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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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를 처음 사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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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치마를 사고 싶었는데, 차마 그러지 못했다./사진=남형도 기자 |
아내는 치마를 빌려주겠다 했지만, 난 새로 사기로 맘먹었다. 그 치마는 재질이 좀 두꺼웠고, 혹시 허리 고무줄을 늘어나게 할까 봐 몹시 두려웠다. 그리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 했으니까(아무 말).
기왕 사는 거 취향에 맞게 잘 사고 싶었다. 월요일(15일) 점심에 명동에 갔다. 매장 한 곳에 들어갔다. 형형색색의 치마들이 날 유혹했다. '트로피컬(열대 지방의)' 느낌이 나는 치마가 내 시선을 붙잡았다. 취향 저격이었다. 돈 없어서 못 간, 하늘빛 몰디브 해변이 떠올랐다. 그러나 도무지 용기가 나질 않았다. 몇 번 만지작거리다가, 발걸음을 아쉽게 돌렸다.
첫 도전이니 조금 무난한 걸 고르기로. 밝은 푸른빛이 감도는 부들부들하고 시원한 재질의 치마를 집었다. 살짝 주름이 지지만, 전반적으로 평범한 편이었다. 옷걸이에서 빼내어 두어 번 접었다. 그리고 3층에 있는 남성 탈의실로 향했다. 심장이 괜스레 쿵쿵거렸다. '난 부끄럽지 않아', '그냥 호기심 많은 서른여덟 살이야', 하체가 더운 것뿐이야', 그리 자기 암시를 했다.
이 치마가 그나마 도전해볼만한 것 같아서, 입어보기로 했다./사진=남형도 기자 |
남성 탈의실 앞을 여성 직원이 지키고 있었다(그냥 서 있는 거지만 그리 느껴졌다). 작전상 후퇴를 했다. 남성복 몇 벌을 보며 딴짓을 했다. 한 10분쯤 지나니, 직원이 잠시 자릴 비웠다. 이때다 싶어 황급히 탈의실로 들어갔다. 양쪽으로 닫는 기이한 문 구조라, 살짝 진땀을 뺐다. 치마를 걸고, 바지를 벗었다. 고무줄을 늘여 치마를 입었다. 입는 게 이렇게 편할 수가. 그것부터 이미 맘에 쏙 들었다.
탈의실 에어컨 바람이 치마 안으로 솔솔 들어왔다. 긴장하느라 더워진 다리가 찬바람과 만나 시원해졌다. 난 묘한 황홀감을 느꼈다.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잠시 그 기분을 만끽했다.
아내에게 치마 입은 모습을 보여줬더니 매우 웃었다./사진=남형도 기자 카톡 |
구매 전 아내에게 검사를 받기로 했다. 사진을 찍어서 보여줬다. 키읔(ㅋ)이 13개나 이어진 답장이 돌아왔다. 생각보다 멋이 난다고 했다(이런 게 진짜 사랑). 더 끌어 올려 보라고 했다. 티를 넣고 확 끌어 올렸다. 한복 치마 같이 됐다. 아내는 키읔(ㅋ)을 11개 보내더니, "티는 안구보호를 위해 바깥으로 빼줄래?"라고 책망했다. 그 말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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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한복판에서 치마를 입고 거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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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풍이 잘돼 참 시원했다. 여름엔 치마가 제격인 것 같다./사진=남형도 기자 뒤통수 셀카 |
할인해서 2만2900원, 생애 첫 치마를 득템하고, 매장 바깥으로 나왔다. 종이봉투에 담아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화장실로 향했다. 거기서 갈아입을 참이었다. 화장실 안 두 칸이 모두 잠겨 있었고, 그중 한 곳에선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화생방 훈련을 방불케 했다. 잠시 뒤 문이 열렸다. 처음 보는 이에게 속으로 응원을 건넸다. 그리고는 숨을 참고 들어가 치마를 잽싸게 갈아입고 나왔다.
걷는 기분이 이리 가뿐했었나. 두 다리가 참 홀가분했다. 빙 둘러 감싸는 게 없었고, 중요 부위를 압박하던 것도 사라졌다. 걸을 때마다 허벅지에 닿는 치마의 가벼운 느낌, 그 틈으로 공기가 살포시 들어와 스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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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어쩌다 불어오면, 치마 아래까지 들어와 발목부터 무릎, 그리고 허벅지와 엉덩이까지 열을 식혀줬다. 상체는 땀이 쉬이 마르지 않는데, 하체가 시원하니 몸 전체가 한결 쾌적해졌다. 치마를 위아래로 살짝 흔드니, 바람을 더 많이 빨아들일 수 있었다.
다소 불편한 점도 있었다. 우선 구매한 치마엔 주머니가 없어서, 스마트폰과 지갑을 손에 들어야 했다. 무심코 주머니 쪽에 손을 찔러 넣으려다, 허전하단 걸 깨달았다. 뭘 들고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아 적응하는 데엔 시간이 좀 필요했다.
또 하나는 허벅지살이 많아 걸을 때마다 양옆이 살짝살짝 쓸린다는 것. 땀이 차기 시작하니, 마찰력이 증가해 쓸리는 느낌이 심해졌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허벅지를 살짝 벌리고, 팔자걸음으로 걸었다. 그러니 다소 나아졌다. 양쪽 허벅지가 서로 닿지 않는 사람이라면, 좀 더 편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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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에 옴짝달싹, 움츠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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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을 때도, 통풍이 참 잘 된다./사진=남형도 기자 |
'대체로 바지보다 편하다', 이게 전반적인 느낌이었으나 정작 고된 건 따로 있었다.
사람들 시선이었다. 반응은 반반으로 갈렸다. 알아챈 사람과 그렇지 않고 스쳐 지나간 사람. 치마 입은 걸 본 사람은, 한 번쯤은 꼭 바라보고 갔다. 눈길이 머무는 순서는 이랬다. 치마를 보고, 내 얼굴을 보고, 다시 치마를 보고. 계단에서 올라오던 한 아주머니는 "어머!"하고 외마디 말을 던졌고, 건너편에서 오던 직장인 여성 세 명은 날 가리키며 웃었다. 서로 스친 뒤 뒤돌아보진 않을까 싶어서 뒤돌아봤는데, 나와 눈이 마주쳤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회사에 돌아가기가 좀 두려워졌다. 고개를 숙이고 건물에 들어가니, 친절한 경비아저씨가 날 맞았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한 뒤 아저씨를 보니, 내 치마를 보고 있었다. 황급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싶었는데, 17층까지 올라가 있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스마트폰 친구였다. 가만히 화면을 보고, '남형도 기자'를 검색했다(심심할 때 하는 취미).
회사에서의 기본 자세. 편하니까, 업무가 더 잘 된다. 정말이다./사진=편안해서 나른한 남형도 기자 |
5층에 도착해 회사에 들어갔다. 들어가는 길엔 후배 셋 정도가 앉아 있었다. 정면을 보고 침착하게 걸었다. 치마가 유난히 펄럭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행히 아무도 못 본 듯했다. 그리 무사히 자리에 앉았다. 오른쪽에 앉은 상사는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바람직했다. 그 역시 날 못 봤다.
잠자코 앉아 있었다. 오후 4시쯤 됐을까, 위기의 순간이 찾아왔다. 누군가 편집국 회의 테이블에, 감자칩 과자를 갖다 놓는 게 아닌가. 평소 같으면 첫 번째로 달려갔겠으나, 괜스레 움츠러들었다. 일단 상황을 지켜보며 재고 수량을 파악해보기로 했다. 조금씩 줄어들었다. 옆 상사도 가져와 내게 "하나 드셔보세요"라고 건넸다. 짭조름하고 고소하고 바삭한 게 너무 맛있었다. 이성을 잃고 치마를 펄럭이며 일어나 가져왔다. 10분도 안 돼 한 봉지를 다 비웠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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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 반응 "옆에 앉은 남기자 치마 보고 깜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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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릴 것인가, 올릴 것인가. 난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사진=결국 내린 남형도 기자 |
오후 4시쯤 되니 쉬가 마렵단 신호가 왔다. 화장실에 갔다. 소변을 보려다, 치마에 구멍이 없단 걸 문득 깨달았다. 순간 치마를 위에서 아래로 내릴지, 반대로 올릴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고무줄을 내리기로 올바른 결정을 하고, 시원하게 쉬를 누었다.
그리 왔다 갔다 몇 번을 했고, 자주 눈에 띄었고, 치마를 입었단 걸 다들 안 것 같았다. 그래서 메신저를 통해 물었다. 보기에 어떻냐고. 다음은 그에 대한 증언들이다.
백모 후배(여) : "순간 제 두 눈을 의심했어요. 잘못 본 게 아닌가 해서요."
박모 후배(여) : "원탁 쪽으로 잠깐 오셨을 때, 기사 쓰다 슬쩍 봤어요. 잘못 본 건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살짝 일어났어요. 팀장 뒷모습을 다시 확인했어요."
구모 후배(여) : "얼핏 봐선 그냥 통바지 입으신 줄 알았습니다. 만약 길에서 봤는데 색깔이 있고 좀 더 치마 같은 옷이었다면, '저 남자 치마 입었네?'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근데 왜 입었을까?' 이런 얘길 했을 것 같아요."
오모 후배(남) : "저는 보고 여성들이 입는 치마 같단 생각이 잘 안 들 었습니다. 생각외로 되게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운동화랑 좀 안 맞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상사에게 보여줬더니 "어머! 치마 입고 오셨어요?"하고 아연실색했다. 어떠냐 물었더니, 잠깐 일어나줄 수 있냐고 했다. 일어났더니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는 반응을 정리해 알려주겠다고 했고, 다음날이 된 뒤에야 피드백이 왔다.
권모 상사(여) : "여자인 저도 치마를 잘 입지 않는데, 옆에 앉은 남기자가 치마 입은 것 보고 깜놀했어요. 치마를 안 입는 이유는 그에 어울리는 구두 등에도 신경을 써야 해서요. 그런데 너무 편하게 치마 입고 양말과 신발을 신은 거 보고, 그냥 치마도 바지처럼 입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도 잘 입게 되진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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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짧고, 시원한 치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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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짧은 치마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소재가 얇아 참 시원했다./사진=실은 두려운 남기자 |
퇴근해서 돌아오니, 아내는 "어디 보자"며 날 위아래로 훑었고, 웃음이 터졌다. 그래놓고 "생각보다 잘 어울린다"며 위로를 건넸다. 그러더니 한 번 입어보고는 "예쁘네, 잘 샀다"고 칭찬했다. 그래서 난 "내 거니까 탐내면 안 된다"고, 부부 사이라도 선을 명확히 그었다. 괜찮은데 치마가 좀 두껍다고, 다닐 때 덥지 않았냐고 했다. 그래서 조금 그랬다고 했더니, 더 얇고 짧은 여름 치마로 입어보라고 했다(즐기는 듯).
다음 날 아침, 치마를 입고 출근했다. 비슷한 경험을 한 뒤, 점심엔 새 치마를 사러 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회사에서 송모 편집국장을 만나 깜짝 놀랐다. 도망가려 했는데, 타이밍이 늦었다. 송 국장은 "그렇게 입고 출근한 거야?"라고 물었고, 그렇다고 했다. 그가 "누가 뭐라고 안 해?"라고 다시 묻기에, 그렇다고 다시 빠르게 답했다. 그러니 송 국장은 "안에 아무것도 안 입은 거냐"며 원치 않는 호기심을 보였다. 그래서 "속옷은 입었지요"라고 한 뒤, 재빠르게 도망쳤다.
다시 명동 매장에 갔다. 전날 눈여겨 봐둔 치마가 있었다. 검은색 바탕에, 흰색 꽃이 활짝 핀 주름치마였다. 아내 조언대로 치마를 만져봤다. 소재가 시원하고 얇았다. 집에 있는 냉장고 바지와 유사한 느낌이었다.
그걸 들고 3층에 있는 남성 탈의실로 향했다. 다행히 앞쪽에 직원이 없었다. 첫 번째 칸에 들어가 문을 닫았더니, 잠시 뒤 어떤 남성이 문을 벌컥 열었다. 그는 치마 입은 날 보더니 매우 심하게 놀라며 "죄송합니다"라고 외치고 나갔다. 아래쪽을 보니 그가 벗어놓은 옷가지들이 있었다. 옷을 갈아입다 잠시 나갔었던 모양이었다. 바깥으로 나와 다른 칸으로 가서, 치마를 입어봤다. 흡족히 맘에 들어, 1만7000원쯤 주고 구매를 했다. 이틀새 치마가 두 개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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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가 짧아지니, 신경 쓰이던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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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를 입고 앉아서 쉬고 있다. 다행히 다리털은 별로 없는 편./사진=남형도 기자 |
명동역 화장실에 가서 치마를 갈아입고 나왔다. 치마가 무릎 정도까지 왔다. 전날 입었던 것보다 훨씬 가볍고 시원했다. 이날 기온은 섭씨 29도, 바람도 안 불어 무더웠으나 통풍이 시원스레 잘 되는 편이었다.
명동을 좀 걷다가, 더워져 가게 한 곳에 들어갔다. 물 한 통을 사며 잠시 더위를 식힐 요량이었다. 아무도 안 보는 곳에 가서, '니킥(무릎을 들어 올려서 치는 격투 기술) 자세'를 몇 번 취했다. 그 사이로 에어컨 바람이 대량 유입돼 시원해졌다. 맨살이라 빠르게 식힐 수 있으니, 이런 건 좋구나 싶었다.
치마를 입고 계단을 올라갈 땐,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사진=남형도 기자 |
하지만 길이가 짧아진 만큼 시선은 더 쏠렸다. 발목까지 오는 긴 치마였을 때 50% 정도 쳐다봤다면, 무릎까지 오는 걸 입으니 80~90% 정도가 바라봤다. 시선이 대놓고 치마를 따라가는 경우도 많았다. 태연한 척하려 했으나, 낯이 뜨거워졌다.
계단을 내려가거나 올라갈 때도, 사람들이 신경 쓰였다. 아내가 "치마 입을 때 속바지를 입는다"고 했던 이유를 알게 됐다. 바람이 갑자기 세차게 불 땐, 치마가 훌렁 뒤집힐 것 같았다. 황급히 치마를 붙잡았다. 앉을 때도 다소 불편했다. 나도 모르게 다리를 모으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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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를 벗고, 두통약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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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집에 와 치마를 벗었다. "고생했어"란 아내 말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거실 바닥에 널브러졌다. 온몸을 두들겨 맞은 듯 피로감이 심했다. 저녁 식사로 닭갈비를 먹은 뒤엔 체기가 올라왔다. 밤에는 결국 두통약을 먹었다. 그리고 밤 10시가 되자마자 뻗어버렸다. 숱한 시선을 받아내느라, 나도 모르는 사이 진이 다 빠져 있었다.
치마를 입어본 뒤 그간 전혀 몰랐던, 참 좋은 선택지였단 걸 깨달았다. 한여름 더위를 많이 타는 나로선 더 그랬다. 하체를 압박하지 않아 후련했고, 중요 부위는 자유로웠고, 더울 땐 조심하며 무릎까지 살짝 올렸다. 회사에선 늘 부채질을 많이 했었는데, 치마를 입으니 때론 한기까지 느껴졌다. 몸이 편하니까 업무 효율도 좋아졌다.
바지는 불편했지만, 또 편하기도 했다. 어쩔 수 없는 것일지./사진=남형도 기자 |
그러나 다음날은 다시 바지를 입었다. "그건 잘못됐어"라고, "그 옷은 좀 이상해"라고, "그러니까 바지 입어"라고 규정짓는 암묵적 눈길을, 도저히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바지를 입으니 다시 익숙한 불편함이 시작됐지만, 마음만은 참 편했다. 잠시 '비정상'의 범주에 속해 있었던 나는, 이틀 만에 다수가 정해놓은 '정상' 범주로 되돌아갔다. 그러니 오가는 사람 그 누구도, 날 바라보거나 속닥이지 않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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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옷장 한편에 고이 걸린 치마를 보며, 이젠 알아버린 편함이 그리워졌다. 무더위는 이제 시작인데, 사놓은 건 쉬이 입을 수 없게 됐다. 장마철에 젖은 바지를 말리느라 애를 안 써도 좋겠단 생각을 했으나, 상상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됐다. 패기롭게 도전한 치마 도전기는 이렇게 끝났다. 생애 첫 치마 두 벌은 쓸쓸히 떠나보내야만 할 것 같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치마가 참 편했다고(물론 불편한 치마도 있다). 못 믿겠다면, 방문을 잠그고 몰래 한 번 입어봐도 좋다.
그게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를. 그러면 먼 훗날 조용히 치마를 꺼내 입고, 밝은 대낮에 동네에서 '플라잉 니킥(뛰어올라 무릎을 올려 치는 것)' 몇 번을 날리며, 하체에 강풍을 불게 해 만끽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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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epilogue). 돌발 퀴즈 하나.
여기 기자를 포함한 7명의 사람들이 지하철에 서 있습니다. 누가 남성이고, 누가 여성일까요?
정답을 아시는 분은 기사 댓글로 남겨주세요. 다섯 분께, '남기자의 체헐리즘' 책을 선물로 드립니다. 힌트는 기사 안에 있습니다.
1. 남-남-여-남-여=남-남
2. 여-남-여-여-남-남-여
3. 남-여-남-남-여-남-남
4. 여-남-여-남-남-여-남
5. 누구든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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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남형도 기자입니다.
에필로그 퀴즈 정답은 5번입니다 :)
정답을 맞춰주신 독자님 다섯분을 선정해보았습니다.
네이버 독자(fbek****)님, 다음 독자(박 세희)님, 다음 독자(닉네임)님, 네이트 독자(hk41****)님, 머니투데이 홈페이지 독자(Adel Suh)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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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한번 해보았습니다- 남기자의 체헐리즘> 책을 발송해드리겠습니다.
참여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남형도 기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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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형도 기자 human@m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