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사 수마노탑을 돌며
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만항재의 안개./사진제공=이호준 여행작가 |
강원도 정선군과 영월군, 태백시 3개 시·군이 경계를 이루는 고개 만항재(1330m)는 찾아올 때마다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오늘은 안개가 잔치를 벌여놓고 있다. 야생화 숲속을 가득 메운 안개는 들개 떼처럼 우우우 몰려왔다 순식간에 자취를 지운다. 안개라기보다는 산허리에 걸린 구름, 운무(雲霧)다. 그 풍경 속으로 피서객들이 우르르 섞여든다. 그들 사이를 슬그머니 빠져나와 지척에 있는 정암사로 향한다. 고즈넉한 절집 풍경이 그리웠던 참이다. 정암사는 알려진 이름에 비해 그리 큰 절은 아니다. 지은 지 오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건물 두어 채를 빼면 아주 단출한 절집이다. 곳곳이 피서객들로 북적거리지만 평일 한낮의 절집은 고요 속에 잠겨 있다. 오로지 냇물만 소리 내어 바깥세상과 소통을 꿈꾼다.
관음전 지붕 위에도 꽃이 피었다. 척박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도, 세상을 밝게 비추는 꽃이라니. 그 어떤 생과 사도 부처의 가피(加被)로 오고가는 것일 터. 인연의 깊은 뜻 앞에 고개 숙인다. 정암사는 통도사·법흥사·상원사·봉정암과 함께 국내 5대 적멸보궁이 있는 사찰이다. 신라 고승 자장율사가 645년(신라 선덕여왕 14년)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걸음은 자연스럽게 적멸보궁 쪽으로 향한다. 수마노탑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하고 참배하기 위해 세운 법당. '번뇌가 사라져 깨달음에 이른 경계의 보배로운 궁전'이란 뜻을 가졌으니, 걸음에 경건한 마음을 더한다.
언덕 위에서 바라본 정암사 풍경./사진제공=이호준 여행작가 |
적멸보궁에 닿기 전에 먼저 발길을 잡은 것은 한 그루 주목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본래의 줄기는 죽었는데 그 틈에서 나온 가지들은 성성하게 뻗어 잎을 피웠다.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안내문을 보고서야 고개를 끄덕인다. 1300년 전 정암사를 창건한 자장율사가 주장자(拄杖子)를 꽂아 신표로 남긴 나무인데,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일부가 회생해서 성장했다는 설명이다. 1000년도 더 묵은 주장자가 살아서 가지를 뻗다니 신기하다는 말 외에 설명할 만한 문장이 없다. 주목이란 나무가 '살아서 1000년, 죽어서 1000년, 쓰러져서 1000년'이라더니 여기서 이런 이적을 보였구나. 어찌 모든 것을 논리로만 따져 물으랴. 소멸과 탄생이 각각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적멸궁(寂滅宮)'이라는 편액이 붙은 적멸보궁은 비어 있다. 수마노탑에 모신 진신사리가 곧 부처이기 때문이다. 범인의 눈에는 부처가 앉아 있지 않은 법당이 낯설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텅 비어 있으니 또 가득 차 보인다. 착시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부처님이 여기 앉아 있지 않으니 온누리에 있겠구나. 허리 숙여 합장하고 돌아서 나온다.
쏟아져 흐르는 석간수에 목을 축인 뒤, 산 중턱의 수마노탑으로 향한다. 정암사를 여러 번 찾는 것은 이 탑을 보기 위해서다. 계단이 꽤 가파르다. 걸음 하나마다, 흐르는 땀 한 방울마다, 번뇌를 내려놓는다는 생각으로 천천히 오른다. 정암사 절집들이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일 무렵 드디어 훤칠한 탑 하나가 나타난다.
정암사 수마노탑./사진제공=이호준 여행작가 |
수마노탑이다. 이 탑에는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가져온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보물 제410호로 지정돼 있다.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가지고 온 마노석으로 만든 탑이라 하여 마노탑이라고 불린다. 마노석은 보석의 하나로 원석의 모양이 말의 뇌수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노탑 앞의 수(水)는 자장율사의 불심에 감화된 서해 용왕이 마노석을 이곳까지 무사히 실어다 주었기 때문에 '물길을 따라온 돌'이라는 뜻으로 붙은 것이다.
탑의 형식은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서 쌓은 7층 석탑이다. 길이 30∼40㎝, 두께 5∼7㎝의 크고 작은 회록색 석회암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올렸다. 1972년 탑을 해체, 복원할 때 내부에서 사리 및 관련 기록이 발견됐다. 사적기에 신라 자장율사가 세웠다고 전해지나, 탑지석에 의하면 탑의 현재 모습은 1653년 중건 때 갖춰진 것이고, 초층의 하단은 고려 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느린 걸음으로 탑을 한 바퀴 돌며 돌마다 틈마다 배어있는 민초들의 소망을 읽어낸다. 그중 가장 절실하게 가슴에 닿는 것은, 이곳 만항에 투박한 삶을 기댔을 광부들의 염원이다. 암흑 같은 현실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을 끝내 놓지 못했을 그들. 사람은 떠나고 없지만 어느 한구석에 눈물 자국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세심하게 들여다본다. 탑 중간중간에는 풀과 나무가 손을 뻗어 허공을 더듬고 있다. 이 높은 곳까지 벽돌을 나르고 탑을 쌓은 것이 우연이 아니었듯, 이 또한 인연의 소치리라.
바람이 불지 않으니 층층마다 매달린 풍경은 달콤한 잠에 빠져 있다. 그 빈자리에 새소리 하나 들어와 살포시 앉는다. 탑돌이를 하는 여인들에게 방해가 될까 봐 슬며시 물러난다. 걸음은 속세로 향하되 마음은 남아 탑을 돈다. 작은 염원 하나 품는다. 고통 받고 아픈 모든 이들의 손을 잡아주소서.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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