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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지지 않으려면 일을 해야돼요"

[엄상익의 마음길따라 세월따라] (39) 새벽 다섯시에 출근하는 노인 변호사

군복무시절 선배 법무장교였던 분과 만나 조용한 참치 집에서 점심을 했다. 군시절 나는 이십대 중반의 중위였고 그는 삼십대 말 쯤의 중령이었다.


계급 사회의 어깨에 달린 계급장은 독특한 기능을 했다. 사람들 속에서 몽둥이를 손에 쥐어주거나 완장을 채우면 그 사람의 태도가 달라진다. 인간에게 왕관을 씌우면 그의 걸음걸이가 달라지고 영혼이 변한다. 계급 사회에서 모자에 붙인 계급장이 그 역할을 했다. 계급은 아랫사람을 누르고 주눅 들게 하는 요소였다.


그런데 잠시 본 그 선배는 나보다 계급이 위라는 의식이 전혀 없었다. 그는 명문인 서울고와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군법무관시험을 치고 군에 들어온 장기 장교였다. 당시 최고 미남 영화배우 신성일을 능가할 정도로 미남이었다. 키도 컸다. 동기생 누구도 그가 탁월한 미남임을 인정했다.


사십년 전 그와 저녁의 회식 술 자리를 같이 했던 기억이 있다. 그는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도 따뜻한 것 같았다. 하급자라고 말을 막 하지 않고 존댓말을 썼다. 그런 분과 사십년 만에 다시 함께 점심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공통된 화제는 군시절의 얘기였다. 그가 마음을 활짝 열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육군 중위 때 전방사단에 근무했었죠. 그 당시 군부대 지역의 읍내에는 다방이 있었고 그곳에 있는 아가씨가 예쁘면 장교들 높은 사람부터 낮은 사람까지 그 아가씨를 상대로 경쟁을 하는 분위기였어요.”


그런 시절이 있었다. 내가 전방에 근무할 때 군의관들이 부대 근처 접대업소 여성들의 건강검진을 하고 병이 있으면 치료를 해 주기도 했다. 그 여성들의 건강이 병사들과 연관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선배가 말을 계속했다.


“그 다방에 있던 인기가 많은 미스 오라는 여성이 나를 좋아한 거 같아요. 내가 당시 부대 근처에서 하숙을 했는데 밤만 되면 낮은 하숙집 담을 넘어와 내 방으로 들어오려는 거예요. 옆방에는 다른 장교가 묵고 있는데 참 곤란했죠.


그런데 더 곤혹스럽게 된 건 사단의 참모장 대령이 그 아가씨한테 반한 거예요. 그러다가 아가씨가 나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들은 겁니다. 자기는 계급이 높은데 하급자인 나를 좋아하는 게 납득이 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나중에는 부대에서 대령이 육군 중위만도 못하다고 푸념을 하더라는 소리를 들었죠. 나는 그때 동해안의 부대로 멀리 옮기게 됐어요.”


남자가 키가 크고 눈에 띄게 잘생기면 곳곳에서 여난(女難)을 겪게 되는 것 같았다. 그동안의 기나긴 세월이 그를 풍화시킨 것 같았다. 머리는 하얗게 눈이 덮이고 윤기 나던 얼굴에도 거무스름한 얼룩이 보였다. 그래도 그의 얼굴에서 정결하게 살아온 지난 세월이 느껴졌다.

◇ 이미 고령화사회에 접어든 일본에선 많은 노인들이 스스로 일을 찾아 하고 있다. 사진은 자신 텃밭에서 유기농 채소를 가꾸는 일본 할머니. 

◇ 이미 고령화사회에 접어든 일본에선 많은 노인들이 스스로 일을 찾아 하고 있다. 사진은 자신 텃밭에서 유기농 채소를 가꾸는 일본 할머니. 

“선배님은 인생의 말년을 지금 어떻게 보내십니까?”


그는 팔십 고개를 넘어섰다. 삶의 지혜를 얻고 싶었다.


“그래도 사람이 망가지지 않으려면 일을 해야 겠습디다. 군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지 지금도 저녁 아홉시면 자고 새벽 세시면 일어나요. 그리고 아침 다섯시면 내 사무실에 가서 앉아요. 아마 내가 대한민국 변호사중에서 제일 먼저 출근하는 변호사일 거예요. 큰 돈은 못벌지만 자잘구레한 사건은 여러 개 있어요. 일주일이면 법정에 거의 열 번은 나가는 셈일 거예요. 내 법대 동기 변호사 중에 아직도 일을 하고 법정에 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죠. 아마. 그 외의 시간은 명상을 하면서 보내요.”


선배의 말은 내게 일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느끼게 해 줬다. 오랫동안 하던 일이 지겨웠다. 법정에 가기도 싫었다. 조용한 강가의 집을 찾아 그곳에서 편한 노년을 보냈으면 하고 돌아다녀 보고 있는 중이었다. 갑자기 백년전에 살았던 현자인 노인의 말을 책에서 읽은 기억이 떠올랐다. 그 현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이 있는 곳이 곧 자기가 살 집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작정하는 게 좋은 거네. 아무리 좋은 경치라도 기분이 좋은 건 이사한 당초 뿐이고 몸이 익숙해지면 조금도 다를 것이 없거든.’


그 말도 맞을 것 같았다. 현자는 또 이렇게 책에서 내게 말했다.


‘무슨 일이건 분수에 맞는 착실한 일이란 크건 작건 귀한 거야’

글 | 엄상익 변호사

경기중-고, 고려대 법대를 나오고 제24회 사법시험(1982)에 합격했다. 6공 때, 국정원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 특별보좌관실에 근무하며 권부의 이면을 보았다. 변호사를 하면서 ‘대도 조세형’, ‘탈주범 신창원’ 등 사회 이목을 끌은 대형사건 피의자들을 변호했다. 글쓰기를 좋아해 월간조선을 비롯, 조선-중앙-동아일보 등에 칼럼을 연재했고 수필집, 장편 소설 등 1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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