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여성과학자의 신조, “난 포기하지 않는다”
코로나 백신으로 세계를 구한 커털린 커리코 이야기
노벨생리의학상 수상 후 기자회견을 하는 커털린 커리코의 모습 /AFP 연합뉴스 |
살다 보면 가망이 없어 보이는 일에 계속 매달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들에게는 자연스레 회의적인 시선과 걱정스런 조언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도전을 막는 다양한 압박들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인내심을 발휘해 성과를 거두는 사람들이 있다. 2023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 커털린 커리코(68)가 바로 그러하다.
연봉도 삭감되고 정규직의 기회도 잃었지만 자신이 믿는 가치를 끝까지 밀고 나간 여성 과학자의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 딸의 곰인형 뱃속에 전재산 넣어 미국行
커리코는 1955년 헝가리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냉장고나 TV도 없는 가난한 살림살이였지만 커리코는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다.
헝가리 최고의 명문대인 세게드대에 입학한 커리코는 생물학과 생화학을 전공했다. 그중에서도 생체 내에서 단백질을 만들어내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mRNA 분야에 푹 빠졌다.
그러나 헝가리에서는 연구를 계속해나가기 어려웠다. 연구실 예산이 떨어지자 커리코는 1985년에 남편과 함께 미국행을 결심했다.
당시 헝가리는 공산 국가였고 자국 화폐의 반출은 절대 불가했다. 커리코는 딸의 곰인형 뱃속에 전 재산인 900파운드(약 147만원)을 몰래 넣었고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에서 커리코는 수십년 동안 비정규직 교수직을 전전했다. 1989년 펜실베이니아 의대 계약직 교수가 된 커리코는 ‘깍두기’ 신세였다.
의대 교수가 대부분인 곳에서 그녀 혼자 이학박사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커리코는 꾸준히 mRNA 연구를 진행하며 자신만의 길을 걸었다.
◇ 승진 박탈, 연봉 삭감에도 꿋꿋했던 ‘마이 웨이’
그러나 학교는 순순히 그를 냅두지 않았다. 펜실베이니아대학은 별다른 성과가 없는 mRNA 분야에 대한 연구를 중단하기를 요구했다.
연구를 중단하지 않을 경우 정교수로의 승진은 불가했다. 그러나 커리코는 승진을 포기하고 연구원으로 직위가 강등되는 걸 감수했다.
커리코 가족이 미국으로 떠날 때 돈을 숨긴 곰인형과 그의 딸의 모습 /워싱턴포스트 |
연봉 또한 자연스레 삭감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커리코는 암 진단을 받고 수술대에 올랐다. 남편은 헝가리에 발이 묶여 있었으며 대학생 딸의 학비도 마련해야 하는 시기였다.
그러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듯이 커리코는 조력자를 만나게 된다. 1997년 그는 mRNA에 관심이 있던 동료 과학자 드루 와이스먼을 우연히 만났다.
펜실베이니아 의대 전염병 학과장이었던 드루 와이스먼은 커리코처럼 바이러스 해결에 단백질을 활용하는 방안을 찾고 있었다.
둘은 함께 연구를 진행하게 되고, 8년을 버티며 연구를 진행한다.
마침내 2005년에 커리코와 와이스먼은 면역반응을 회피하는 mRNA 기술을 개발한다. 이후 이를 활용한 백신과 치료법을 개발하자는 제의가 들어오게 되고, 이로 인해 탄생한 회사가 바로 코로나 백신으로 유명한 모더나다.
모더나 탄생 이후에도 성과가 지지부진한가 싶었지만, 판세를 바꾼 건 바로 코로나19였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대위기 속에서 커리코의 뚝심은 빛을 발했다.
최소 4년이 걸리는 임상 백신 개발에 커리코의 mRNA 기술이 더해지자 25일 만에 백신이 개발되는 기적이 탄생했다.
팬데믹은 종료되었고 노벨위원회는 커리코와 와이스먼의 업적을 인정해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여했다.
커리코는 수십년 동안 ‘포기하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난 포기하지 않는다”를 계속해서 되뇌었다고 말했다.
아무도 믿지 않았던 그의 뚝심이 세계를 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