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찬영의 한의사 칼럼] 은퇴한 아버지와 지내며 벌어지는 일
습관 되어버린 ‘화’…어떻게 하나?
근심 가득한 얼굴로 화병 클리닉 진료실에 내원한 30대 여성 I씨. 미혼인 그녀는 부모님과 함께 셋이 살고 있는데, 반년 전 은퇴하신 아버지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유난히 깔끔한 성격의 아버지는 은퇴 후 집안 청소를 자청해 전담하기로 한 뒤부터, 하루에도 수차례 온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기로 돌리고 걸레질을 했다. 조금이라도 더러워지는 꼴을 보지못하는 통에 늘 아버지는 집안 곳곳을 확인하는데 일상이었고, I씨는 옆에서 덩달아 불안해지며 편치 않아졌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I씨가 깔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스스로도 깔끔한 편이라고 생각했으나 아버지는 그 정도가 지나치다는 것이다. 자신의 방 만은 건드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으나, 어느날 I씨가 외출한 사이 아버지가 I씨의 방을 청소한 사건을 계기로 갈등은 폭발했고, 그 뒤부터 아버지 얼굴만 보면 화가 치민다고 했다. 아버지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어도 봤으나, 아버지는 스스로에게 문제가 전혀 없다고 말하며 변화될 기미가 없다고 했다.
밖에서 친구들에게 고민상담을 하며 아버지를 이해하려고도 시도해보았는데, 단지 그때뿐, 밖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측은한 생각을 하고 집에 들어가도, 이상하게 아버지의 모습만 보면 측은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화가 치밀어서 본인 스스로도 괴롭다고 했다.
I씨 아버지의 모습이 ‘병적인’ 깔끔함이냐, 그럴만한 수준은 아니냐를 떠나서 현재 I씨가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은 본인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도 아버지의 모습만 보면 ‘욱’ 하고 화가 나는 것으로 보였다. 그녀는 화가 올라오면 스스로 조절이 힘들어져 청소하고 있는 아버지 모습을 보고 소리를 지르거나,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게 되고, 그 다음에는 후회가 물밀듯 몰려오는 것이 괴롭다고 했다.
I씨는 이미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을 때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일종의 ‘습관’이 되어버렸고, 그 이후로는 화를 내는 것을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욱 하고 화가 치밀어 오름을 경험하고 있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면 습관처럼 몸에 익듯이, 마음도 반복적인 생각이나 감정 경험을 통해 습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I씨에게는 지금 I씨가 겪고 있는 원치 않는 분노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습관 같은 것이니 너무 자책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다만, 이 습관에서 벗어나오기 위해서는 일정기간 동안 연습이 필요한데, 잘 따라줄 것을 부탁했다.
첫번째는 급한 불 끄기.
화가 났을 때 화가 난 자신 스스로를 이완시킬 수 있도록 틈틈이 이완훈련하기. 이 방법으로 I씨에게는 복식호흡을 교육하고, 동시에 스스로 “나는 편안하다", “내 몸과 마음은 차분하다"라는 말을 천천히 반복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 방법을 화가 치밀어 올랐을 때 쓰도록 했다.
두번째는 다시 생각하기.
감정의 불이 조금 사그라들었다면, 방안에서 부글부글 화를 마냥 참고 삭이는 것이 아니라 다음 7가지 질문이 적힌 종이를 인쇄해 주고, 답을 적어보는 시간을 갖도록 했다.
(1) 지금 내가 화난 이유는 무엇인가?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2) 지금 내 몸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무엇인가
(3) 지금 내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은 무엇인가
(4) 지금 내가 화를 내면 이 상황이 나아지는가? 나빠지는가
(5) 지금 내가 화를 내면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무엇인가
(6) 지금 내가 화를 내면 상대방에게 일어나는 일은 무엇인가
(7) 지금 내가 화를 내는 방법 외에 그 목적을 달성할 대안이 있는가
쉽게 말해 차가운 이성이 뜨거운 감정을 식힌다는 전략이었다. 처음 이 숙제를 받은 I씨는 급한 불을 끄는 것은 어느 정도 할 수 있었으나, 7가지 질문에 답하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했다. 필자는 처음이라 자연스러운 것이니 꾸준히 더 해보자고 했다. 그러기를 한달. I씨는 7가지 질문에 점점 더 답을 빠르게 내릴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에 대한 습관적인 분노도 빠르게 식어갔다. I씨는 자신을 쉽게 화가 나게 했던 스위치가 꺼진 듯한 느낌이라고 했다.
아직 I씨 아버지의 모습이 바뀐 것은 아니었지만, I씨는 분로로부터 한결 자유로워진 것으로 보였다. I씨는 마지막 상담에서 여전히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이제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고, ‘본인은 얼마나 괴로울까’ 라는 측은한 마음이 크게 든다고 했다. 가족의 평화를 위해 서로 갈등이 있었던 부분을 적극적으로 대화로 풀어보겠다는 의지도 보였다.
분노도 습관이 된다. 그리고 I씨처럼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가 그 분노의 대상이 된다면, 분노 뿐 아니라 자책감, 후회, 미안함의 감정들이 얽혀 더 큰 괴로움을 만들어 낸다. 이 악습관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I씨가 했던 방법처럼, 스스로 분노의 불길을 조절하는 방법을 익히고, 동일한 상황에서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훈련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이 한 가지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뜨겁게 불타오르는 분노는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린다. 차갑고 냉철한 이성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있던 따뜻함까지도. 그래서 그 분노를 걷어내다 보면, 우리는 종종 선물처럼 그 안에 있던 따뜻한 마음을 다시 되찾게 되기도 한다. 마치 I씨가 아버지에게 느낀 그 측은함과 자비심처럼.
글 | 권찬영 한의사
권찬영 한의사(한의학 박사, 한방신경정신과전문의)는 부산 동의대학교 한의과대학 조교수로 학생들을 강의하고 있으며, 부속 한방병원 한방신경정신과 화병&스트레스 클리닉에서 환자분들을 진료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명상학회 T급 명상지도전문가입니다. 노인의학, 통합의학, 심신요법, 비약물요법 등에 관심이 많고, 근거기반의학과 환자의 의료선택권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아날로그 감성을 좋아하고, 고양이를 좋아하며, 교육과 진료 후 남는 대부분의 시간은 논문을 읽고 쓰거나 블로그를 운영하며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