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한보·삼미’ 잘 나가던 국내 대기업 집어삼킨 사업 아이템은?
“기업의 명운을 걸다”
허니버터부터 마라와 흑당까지. 좀 참신하다 싶으면 너도나도 참여하는 일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유행하는 아이템 하나만 생겨도 수많은 프랜차이가 나타난다. 본래 프랜차이즈는 특정 아이템에 대한 노하우를 공유하는 차원이었으나 이제는 그저 유행 제품의 카피캣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같은 유행 제품 프랜차이즈는 수명이 짧다는 것이 특징이다. 때문에 퇴직 후 자영업에 뛰어든 이들이 퇴직금을 잃고 빚만 남는 일이 발생한다. 소비 트렌드가 SNS 등으로 빠르게 변화한다는 점도 이 같은 반짝 프랜차이즈를 늘린다는 분석도 있다.
이처럼 잘 되는 사업에 너도나도 손을 뻗다 망한 사례는 단순히 자영업자에 한하지 않는다. 사실상 대한민국이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던 시기, 대기업들은 돈이 된다 싶으면 각종 사업에 뛰어들었었다. 이중 3개의 대기업을 쫄딱 망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외환위기까지 불러온 투자 아이템이 있었다.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조금 더 알아보자.
1. 3개 대기업을 집어삼킨 ‘철강’
철강 하면 떠오르는 기업은 포스코다.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주역인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가 그 전신으로, 대한민국의 대표 철강 회사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포스코가 철강으로 성공함에 따라 1980년대 대기업들도 너 나 없이 철강산업에 뛰어들었다.
2. 삼미그룹
철강으로 흥했으나 철강으로 망한 삼미그룹은 김현철 회장이 이끈 기업이었다. 재계에서는 쌍용그룹의 김석원 회장, 한화의 김승연 회장과 더불어 이들 세 기업 회장들을 ‘재벌가 3김’으로 일컬었었다. 이중 삼미그룹은 스테인리스 등의 특수강을 전문화해 1990년도 초 세계 특수강업계 2위까지 성장한 기업이었다.
김현철 회장은 삼미그룹의 2대 회장으로, 창업자인 아버지와 달리 현장 경영을 꺼린 인물이었다. 창업자인 고 김두식 회장은 목재 사업을 통해 번 돈으로 철강에 진출해 특수강 국내 1위의 기업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1980년 김두식 회장의 이른 타계로 29세의 김현철 회장이 그룹 경영을 맡으면서 삼미그룹의 위기가 찾아왔다.
그는 공장과 밀접했던 아버지와 달리 공장 운영을 현지 책임자에 의존하는 한편 방문도 꺼렸다. 내실을 다지기 보다 세계 1위를 위해 볼륨을 키우는 경영을 했다. 미국 알택과 캐나다 아틀라스 특수강 공장을 인수하는 등 해외 진출을 시도했으나 4년 연속 적자를 보았다. 결국 1997년 3월 주 채권은행의 대출 연장 거절로 부도를 맞이했다. 삼미특수강은 포스코에 인수되고 김현철 회장은 현재 해외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3. 기아자동차 그룹
지금은 현대자동차그룹 산하에 있지만 한때 기아자동차는 현대자동차의 라이벌이었다. 기아그룹도 철강에 무리하게 투자하면서 부도에 이르렀다. 기아는 자동차 전문 기업이었지만 외환위기에 부도난 당시 기업들처럼 1980년대 말 다각화 전략을 구사했다.
기아는 적극적으로 철강 산업에 진출했다. 1986년 기아 특수강을 설립해 1조원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수익이 변변치 못했다. 외환위기를 대비해 삼성이 몸집을 줄이는 1997년에도 기아는 바다를 메워 공장을 세웠다. 그 결과 1997년 7월 자금난과 부채를 견디지 못한 기아도 부도에 이르렀다. 현재 기아 특수강은 2003년 세아그룹에 편입되어 2004년 세아베스틸로 이름을 바꿔 존속하고 있다.
4. 한보 그룹
세무공무원의 신화 정태수가 세운 한보 그룹은 각종 비리로 구설수에 오른 기업이다. 대치동의 은마아파트가 이 기업의 작품이다. 부동산 투자에 성공한 이후 승승장구하여 대한민국 재계 서열 14위까지 올랐다. 역시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다각화했으며 철강에 투자했다. 한보그룹은 1990년대 초부터 임해 철강공업단지 설립을 추진했다.
제철소 설립을 추진한 한보 철강은 연간 800,000M/T 규모의 철강재 생산 업체로서 한보 그룹의 핵심기업이었다. 그러나 1989년 건설 부문의 손실로 부채비율이 300%를 초과했고, 차입금 의존도도 50%가 초과한 상태였다. 임해 철강공업단지에 들어가는 자금의 대부분을 외부 차입금에 의존하여 1996년 11월에는 그 금액이 약 5조에 이르렀다.
결국 1997년 자금난을 견디지 못했으며 금융기관 또한 제철소 완공 이후에도 적자경영이 불가피하다 판단해 대출금을 회수를 결정했다. 한보그룹은 그동안 기존 사업 중 생기는 문제를 뇌물로 해결해 왔으나 부도를 피할 수 없었다. 수많은 기업이 함께 도산하며 한국의 대외 신용도가 실추되어 외환위기의 시발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한보 철강의 부지와 시설은 현대자동차가 인수해 현재의 현대제철이 되었다.
한때 롯데그룹도 철강에 손을 대려 했었다. 그러나 이는 포항제철 설립 이전의 일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대규모 제철소 건설 요청을 받은 롯데는 가와사키 제철소 등의 협조로 제반 준비에 있었다. 그러나 이후 제철소 방침이 국영기업화로 바뀌며 모든 자료를 박태준에게 넘기고 1967년 제과업으로 한국에 진출하였다. 이후 포항제철은 박태준에 의해 1968년 설립되어 1973년 마침내 첫 쇳물을 뽑아냈다.
글 임찬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