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이 지나도 여전히 남은 질문, '날 보러와요'
대학로에 나가면 언제나 수많은 포스터들이 다닥다닥 붙어 서서 관객들을 기다린다. 대학로를 자주 나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아차리겠지만, 한 달 아니 몇 주만 지나도 이 포스터들은 완전히 새로운 공연들로 싹 바뀌어 있다. 관객들은 늘 새로운 이야기에 갈증을 느끼고, 창작자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관객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야기의 소비 속도가 점차 빨라지는 가운데, 공연들의 공연 주기 또한 점점 짧아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 편의 연극이 20년 동안 꾸준히 공연되면서 관객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주목할 만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그 작품이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유효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1996년 첫 막을 올렸던 김광림 작, 연출의 <날 보러와요> 역시 그러한 연극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날 보러와요>는 지난 1986년부터 6년간 경기도 화성 일대에서 부녀자 여러 명이 강간, 살해당한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다. 우리에게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의 원작으로 더 친숙한 작품이기도 하다. 실제로 영화의 성공 이후, 연극에 대한 관심이 다시 뜨거워져 재공연이 여러 차례 이루어지기도 했다. 2003년 개봉해 한 해 동안 57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살인의 추억>은 그해 한국영화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웠고, 많은 이들을 공포와 분노로 잠 못 이루게 만들었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연쇄살인사건을 둘러싼 범인(용의자들)과 경찰의 계속되는 대결은 끝이 없는 미궁 속을 헤매는 듯한 답답함을 안겨주었다. 또한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상당히 끔찍한 공포감을 안겨주기도 했는데,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과 범죄영화의 특성상 매우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그려지는 살인 현장은 그 자체로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관객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가장 유력한 범인으로 지목된 마지막 용의자 박해일이 터널 속으로 사라지며 남긴 미묘한 미소는 십 수 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미해결로 남겨진 화성 살인사건에 대한 답답함과 암울함을 더욱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의 원작인 연극 <날 보러와요>는 영화와 달리 서스펜스와 스릴, 공포가 지배하는 작품이 아니다.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이 전개되는 흐름은 거의 같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완전히 다르다. 일단 이 작품에는 살인이나 시체 같은 끔찍한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대신 처음부터 끝까지 대부분의 장면이 경찰서에서 이루어지면서, 무대 위에는 개성 강한 수사팀이 만들어내는 캐릭터의 향연이 펼쳐진다. 인권수사를 지향하는 김반장, 시인 지망생 김형사, 지역 토박이 박형사, 무술 9단 조형사 등 각기 다른 캐릭터를 지닌 수사팀은 각기 다른 자기만의 논리를 주장하면서 진지한 수사과정 틈틈이 허를 찌르는 웃음과 위트를 선사한다. 여기에 정신이상자, 술주정뱅이, 성도착자를 맡은 용의자 역할 배우의 능청맞은 연기변신이 어우러지면서 범인 심문 장면은 심각하고 무섭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허술하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사실 여기에는 단순한 웃음 이상의 의미가 숨어 있다. 무엇보다 영화에서 각각 다르게 등장했던 ‘용의자’ 역할을 단 한 명의 배우가 맡아 일인다역으로 소화한다는 점은, 이 작품이 단순한 수사극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준다. ‘범인’이라 확신했던 용의자가 끝내 풀려나고, 다시 같은 사람이 모습을 바꾸어 등장하고, 다시 불확실한 상태에서 풀려나고… 맥이 풀릴 만큼 허무하게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이 작품은 결코 잡히지 않는, 아니 잡힐 수 없는 진범을 쫓는 헛된 노력을 시니컬하게 그려낸다. 그러면서 과연 진실은 무엇이며, 진실이란 게 정말 세상에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하는 다소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연극 <날 보러와요>는 명백한 범죄 장르물이었던 영화 <살인의 추억>과 달리, 수사물의 형식을 빌려 형이상학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다.
1996년 초연 이후 꾸준히 공연되며 화제를 모았던 연극 <날 보러와요>가 초연 20주년을 기념해 다시 무대에 올랐다. 이번 무대는 무엇보다도 초연 무대를 꾸렸던 원년 멤버들이 다시 한 자리에 모였다는 점에서 시선을 끈다. 원년멤버인 이대연, 권해효, 유연수, 김뢰하, 류태호 등을 주축으로 한 OB팀이 오랜만에 한데 뭉쳤고, 이와 함께 2006년부터 <날 보러와요> 재공연에 참여했던 손종학, 김준원, 김대종, 이원재, 이현철 등이 YB팀으로 다시 무대에 선다. 이미 무대와 스크린을 장악하고 있는 베테랑 배우들이 20년 전, 떨리는 초연 때의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 함께 무대에 선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공연이다. 개성과 연기 스타일이 각기 다른 OB와 YB 팀의 연기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1월 22일부터 2월 21일까지, 명동예술극장
사진제공 | 프로스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