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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어원(語源)”

변종모의 마음 속의 길 #3

콘수에그라, 스페인 / Consuegra, Spain 

“바람의 어원(語源)”

바람 같은 말이다. 너의 친절도, 나의 노력도, 결과 없는 결말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바람이다. 태어나고 죽는 것이 나의 의지가 아니라 할지라도, 살며 사랑하는 일만을 나의 의지로 받아들여 굳은 뼈는 생명을 존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냥, 그렇기 때문이다. 사는 게 욕심인가? 사랑하는 게 욕망인가? 모두가 한 바퀴 생의 굴레에서는 한 줄기 바람 같은 것이다. 심하게 불면 휘어지고, 잔잔하게 불면 잠들 듯. 모든 것이 바람 같다. 파란 하늘을 짊어진 그 언덕의 평화에 비한다면 너의 아름다움쯤이야 실바람도 못 되는 것을. 잡으려 하지 말라. 잡을 수 있는 건 네가 스스로 허물어지지 말자는 너의 의지뿐이다. 잡으려 하지 말고 가두려 하지 말라. 너도 나에겐 바람이고 나 또한 다른 누군가에겐 또 그렇게 바람일 것이다. 어쩌다 또 심한 바람이 불면 그 또한 쉽지 않을 것이니 살아가는 동안 몇 번은 더 그렇게 휘어져야만 한다. 부디, 휘어지더라도 꺾이지는 말자. 너는 너로서 아름답고 나는 나대로 귀한 것을. 너와 나의 인연을 실패라고 한다면 그것은 보잘것없이 부는 바람도 못되겠지만, 그 또한 나에겐 폭풍인 것을. 

바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마음속에서 커다란 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것이 있다. 무엇인가에 도달하지 못한 마음은 늘 그렇게 맴돌다가 사라지거나 다시 거세게 움직이기를 반복한다. 새하얀 풍차를 떠올렸을 뿐인데 마음이 그랬다. 마드리드(Madrid)에 처음 도착하는 날부터 조급해지던 마음이 자꾸만 알지 못하는 곳으로 회전한다. 여덟 명이 쓰던 방 안에는 밤새도록 피곤한 여행자들의 코 고는 소리가 지나치게 거슬려 결국 잠을 제대로 청하지 못했다. 사실은 코 고는 소리보다 가슴속 한 구석에서 쉬지 않고 돌아가는 어지러운 상상 속의 풍경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것은 폭풍우 속의 거인이기도 했다가 맑은 날의 아름다운 풍차이기도 했다. 그렇게 상상 속의 형상들이 뒤엉켜 두꺼운 소설책처럼 쉽게 끝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괴로움도 설렘도 아닌 확인되지 않은 궁금증 정도일 거로 생각하다가 결국 새벽바람을 맞는다.

 

콘수에그라(Consuegra)로 가는 남부버스터미널(Estasion Sur de Autobuses), 매표소에 붙어있는 차 시간은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달랐다. 내가 타려고 했던 오전 두 대의 버스 중 한 대는 이미 두 시간 전에 떠나버렸고 덕분에 한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늦은 아침의 사람들이 빠르게 개찰구를 통과하는 사이에 갑자기 휴지통처럼 꿈쩍도 않고 온통 떠나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모두가 급하고 바쁜데 나만 할 일 없는 사람이 되어 여유롭다.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살지만 각자의 서로 다른 이유로 결국 하루하루를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누구에게나 심한 바람이 불면 쓰러지듯 밀려다니다가도 이내 잔잔한 바람으로 위로하던 날들이 있을 것이다. 내게 주워진 시간을 오로지 내 것으로 즐기는 일에 아직도 익숙하지 않을 것일까? 바람이 분다. 아침 햇살이 대합실의 창을 뚫고 들어오는데 그것이 바람 같다. 아침부터 본의 아니게 느슨해지는 내가 나는 보기 좋아서 그 밝은 햇살에 세수를 하듯 눈을 감는다. “너는 늘 급해, 그래서 답답해 보여” 빠르게 움직이는 대합실에서 나만 고여 앉아 오래전 그 말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 말을 꺼내놓고도 이제는 덤덤하다. 오래도록 생각한 말이었으므로. 쉽게 지워지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푸른 하늘 아래 유유히 돌아가던 풍차를 떠올린 것은 그날 이후부터였을까? 바람이 언제 어디서 불어올지 모르는 것처럼, 나의 여유롭지 못한 마음 역시 수시로 찾아와 나를 괴롭히던 때, 모든 것이 엉망인 채로 거센 바람에 휩쓸려 안착하지 못하던 시절. 잠시도 쉬어갈 수 없었던 그때의 마음들이 대합실을 급하게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밟히고 있다. 바람이 분다. “분다”라는 것은 어떤 힘이다. 보이지 않지만. 이를테면 “답답해”라고 말을 맺으며 더 이상 움직이지도 않던 너의 입술에서도 거센 힘을 느꼈던 것처럼. 언제나 결심이라는 것은 거부하지 못할 만큼의 거센 힘을 가진다. 제시간에 정확하게 열리는 개찰구에서 햇볕에 뒤엉킨 바람이 훅하고 불었다. 지나간 바람은 돌아오지 않는데, 그때 우리 중 서로에게 누가 바람이었을까?  

바람이 불지 않는 날

“바람의 어원(語源)”

버스는 마드리드 외곽을 따라 라만차(La Mancha) 지역을 순회하듯 천천히 움직였다. 소설 돈키호테의 중요한 배경을 담당했던 이곳의 풍경들이 부드럽게 넘어가는 페이지들처럼 여유롭게 다가왔다. 낮은 집들과 소박한 골목길들 그리고 드넓은 평원. 화창한 여름의 끝에 걸린 모든 풍경들이 살아있는 이야기처럼 따라다녔다. 그렇게 화려한 도시는 잠깐 사이에 조용하게 엎드린다. 상상 속에 갇혀 살던 주인공 돈키호테. 그가 풍차를 거인이라 생각하며 돌진하던 그때, 바람은 심하게 불었을까? 하늘은 극적인 먹구름으로 휩싸여있었을까? 고요하고 낮은 풍경들 곁에서는 가늠할 수 없는, 이제는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가 타고 다니던 로시난테처럼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나도 그 길을 간다. 머지않아 내 앞에 나타날 여러 개의 풍차 중에 하나라도 내게 거인으로 다가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미친 상상을 하며 달리는 시간. 어쩌면 그 상상은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가 알던 모든 것들이 어느 날 달라져 있던 때가 종종 있었으니. 우리는 자주 현실을 살면서도 비현실적인 느낌에 휘어질 때가 잦았으니, 소설 속의 풍차가 잠시 그에게 거인이었던 것은 웃을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다. 

 

우리가 마지막이던 밤에 나는 바람처럼 많은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그것은 너에게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변하지 않았고 너만 변했다고 생각하던 밤. 아무리 거세게 부정해보아도 너는 내게 하얀 풍차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거인을 향해 힘껏 돌진하던 돈키호테의 기다란 창도 결국 심장을 관통시키지 못한 것처럼. 나는 네 앞에서 늘 급했다. 너는 쉽게 움직이지 않는 거인 같아서 나는 늘 네 앞에 실낱같은 바람이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너는 하얀 풍차처럼 아름답지만 더 이상 돌지 않는 날개를 가졌고, 나는 여전히 급하다. “너는 늘 급해, 그래서 답답해 보여” 그렇게 말하는 네게서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진공상태의 시간을 느꼈다. 내가 세상에게 배운 모든 것들이 잘못되어 가고 있던 시간이었다. 내가 아는 모든 말로 너를 돌리려 했으나 너는 거인 같다고 생각했다. 자기 환상에 갇혀 허망하게 싸우던 그 날의 돈키호테처럼 나 역시 그랬을 것이다. 너를 풍차로 보지 못하고 거인으로 여겨 바람의 말로 나를 설명하려던 그때는 어리석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커다랗게 허공에 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풍차 아래에서 미풍도 못 되는 그날의 변명들을 폭풍처럼 후회하고 싶었다.

“바람의 어원(語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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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작은 다리를 건넜고 멀리 줄지어 선 풍차들이 하늘 아래 가지런히 박힌 박하사탕 같다. 화하게 번지는 바람이 느껴진다. 역시 기억은 눈앞의 풍경을 이길 수가 없는 것이었다. 잘 도착했다고 생각했다. 하얗게 줄지어 선 풍차는 이제 더 이상 돌아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멀리서도 내 마음을 움직였다. 하늘 아래 가장 빛나는 언덕처럼 그 순간엔 여러 개의 풍차가 세상의 유일한 구조물처럼 귀하게 다가온다. 느슨한 오르막으로 이어지는 마을은 태어나서 한 번도 격렬하게 싸워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순한 사람들처럼 모여 있다. 담이 없었고 집과 집이 사이좋게 바짝 당겨 앉아 언덕으로 이어졌다. 성당 근처의 깊은 골목으로 할아버지 한 분이 느리게 지나갔고 뒤이어 여름꽃이 힘없이 툭 하고 떨어졌다. 꽃의 추락마저 들릴 것 같은 고요한 이 마을엔 바람도 잠을 자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골목 끝에 걸린 풍차는 돌지 않고 있었다. 내 생각이 맞았다. 풍차는 바람의 힘을 이용해서 동력을 만드는 기계라고 배웠지만 나는 풍차가 바람을 만든다고 생각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허공을 커다랗게 휘저으며 돌 때마다 바람이 태어난다고 믿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절대로 믿지 않던 것이 나의 습성이었을까? 바람을 보지 않고 풍차를 바라보며 그것을 바람이라 믿는 것처럼. 나는 너의 겉모습만 믿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보이는 것만 믿고 보이는 것에만 열광하던 내가 섭섭했다. 왜? 나의 마음을 못 보냐고, 왜? 나의 마음을 못 믿느냐고. 풍차가 없으니 바람도 없다. 네가 없으니 나도 없는 것처럼.

바람의 방향, 마음의 방향 

“바람의 어원(語源)”

까마득한 지평선 근처에는 바람이 부는지 그 경계가 뿌옇다. 여름의 끝에 타들어간 들판이 누렇게 탈색을 시작하는 오후. 언덕 가까이로 모여 있는 지붕들은 붉게 그을린 피부처럼 반질거리며 여전히 일광욕 중이다. 이 그림 같은 마을에 잘 어울리는 풍차들은 나란히 언덕의 길이만큼 간격을 유지하고 서있다. 등대 같다. 망망대해처럼 넓게 펼쳐진 평온은 잔잔한 바다와 같고 붉은 지붕의 집들이 작은 배처럼 서로를 끌어안고 언덕 가까이에 정박해 있다. 처음 그림을 배우는 사람이라도, 아주 실력 좋은 화가라도 한 번쯤은 그려볼 법한 아름다운 풍경 위에 걸터앉아 있노라니 잠시 나의 마음은 반성을 잊고 눈앞의 풍경처럼 좋은 마음이 되어 바람을 기다린다. 바람을 잉태한 이 언덕에 올라서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바람을 생각한다.

 

바람은 마음이다. 바람 한 점 없는 시간을 견디며 바람을 닮은 것을 찾다가 결국 시시하게 그런 결론을 내고 둥글게 회칠이 된 풍차의 그늘을 깔고 앉는다. 실눈으로 올려다본 풍차는 하늘의 절반을 가렸고, 오래전에 멈춰버린 거대한 날개는 늙은 노인의 뒷모습 같지만 신선한 바람이 이는 듯했다. 허공을 향해 뻗어있는 날개에는 작은 격자무늬 창들이 박혀있고, 그 사이로 조각난 하늘이 휴식하는 시간. 다시 마음에 바람이 분다. 보이지 않는 바람의 힘을 믿어, 만질 수도 없는 바람을 움직이는 풍차는 거인처럼 삐걱거리며 바람을 흡수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믿음의 힘이 바람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볼 수 없는. 그러나 존재하는 많은 것들을 대신해서 열심히 돌아가는 풍차 아래에서 이제 나도 나를 믿기로 한다. 내 마음을 보여주지 못해 바람 같은 말들로 너를 묶으려 했던 날들을 떠올리며 나는 이제야 나는 위로한다. 어차피 사랑도 허공 같은 것이라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것이다. 차라리 말없이 올려다보며 존중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어차피 삶도 바람 같은 것이라, 한 번 불면 돌아오지 않는 길을 떠나 오래도록 여행을 하다가 끝내 어느 허공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다만, 그 길 위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들을 만나는 일일 뿐, 어느 것 하나 끝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일이다. 모든 것이 그렇게 바람이다. 사랑도 삶도 결국엔 죽음도.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소유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가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그렇게 바람처럼 내 안으로 쌓이고 쌓여야 바람처럼 가벼워질 수 있는 것을. 자신을 버려서 가벼워지지 않으면 그 무엇도 움직일 수 없는 것을.

 

오래도록 마음에 넣어두었던 곳으로 나는 제 발로 걸어와 여러 개의 풍차 중 한 곳에 자리를 잡고 겨우 나를 용서한다. 너를 원망했던 마음도 너를 미워했던 시간도 이제는 다 지나간 바람이라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이라고. 그러니 원망함으로 나를 병들게 하지 말고, 미워함으로 나를 괴롭히지 말아야겠다고. 바람 같은 말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나의 마음뿐이다. 풍차의 잘못도 아니고 거인의 잘못도 아닌 것처럼. 그러나 바람의 방향처럼 마음의 방향도 그렇게 한쪽이라면 좋겠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 때마다 생각이 날 것이다. 그렇게 바람의 뜻을 새길 것이다. 

“바람의 어원(語源)”

바람의 어원

 

너를 심하게 앓고 나서야 겨우 나를 알았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나를 만든다는 것을 

무게를 가지지 않는 것들이 나를 만든다는 것을 

그 모든 것이 내게로 건너와 내가 되어간다는 것을

너를 잃고 나서야 겨우 나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나로 살면서 나를 알지도 못하고 너에게 건너간 일

네가 나를 스친 순간에 알았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모든 것은 단 한 번이라는 것을

 

바람은 누군가를 잡은 적이 없다

바람은 누군가를 민 적도 없다

멈춘 것도 너이고

맞서지 못해 등을 돌린 것도 너다

그토록 사랑이란 

내 모든 것을 바쳐 겨우 나를 확인하는 일 

Tip 바람의 서식지 콘수에그라의 풍차를 보는 일

“바람의 어원(語源)”

마드리드 근교 라만차 지역에는 소설 돈키호테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지역이 여럿 있다. 그중 캄포 데 크립타나(Compo de Criptana)는 10개의 풍차가 서 있는 가장 유명한 관광지다. 그리고 콘수에그라(Consuegra)와 엘 토보소(El Toboso)를 추가하는데 콘수에그라 역시 거대한 풍차가 있는 언덕이 아름다운 마을이다. 엘 토보소에는 소설 속 돈키호테의 흔적을 박물관 형식으로 꾸며 놓은 저택과 그 시대상을 재현해 놓은 저택이 인기가 있다. 이곳들은 모두 차를 렌트하면 가장 좋은 여행이 될 것이다. 세 지역 모두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지만 대중교통은 아주 많이 불편하다. 마드리드의 각 터미널에서 버스나 기차를 이용해도 좋지만 시간이 많이 없는 여행자에겐 렌트카를 추천한다. 렌트카로 일찍 나선다면 세 지역을 다 돌아볼 수 있다. 그리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이곳 중에 한 곳만 여유롭게 둘러보는 것을 추천하며 반드시 돌아가는 차 시간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무엇보다 이 지역을 방문할 계획이라면 세르반데스의 명작 돈키호테를 한 번쯤 읽고 가게 된다면 더없이 좋을 일.

글, 사진 변종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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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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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디렉터였다가 오래 여행자로 살고 있다. 지금도 여행자이며 미래도 여행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