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랑 맞짱 한번 뜨려고 합니다”...말단직원, 대기업 부정행위를 보다 [씨네프레소]
[씨네프레소-79]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주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2020)은 한국 산업계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회사 내 학력 및 성차별, 재벌 그룹의 불투명한 지배구조, 주먹구구식 회계처리 관행 등 기업의 고질적 문제를 코믹하고 경쾌한 접근법으로 다뤘다. 특히, 각기 다른 팩트를 하나의 픽션으로 엮어내는 이야기 솜씨로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과 론스타 게이트 등 한국 경제사에서 중요한 사건을 한 호흡에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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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그룹 말단 직원들, 회사의 부정행위를 발견하다 주인공은 대기업 삼진그룹에 다니는 세 말단 직원이다. 여자 상업고등학교 출신인 세 사람은 토익을 열심히 공부한다. 세 달 안에 토익 600점을 넘기면 대리 진급 기회를 주겠다는 회사 측 공고가 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중 한 명인 이자영(고아성)이 어느 날 회사 공장을 방문하고, 공장에 폐수 유출 문제가 있다는 걸 상사에게 보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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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상업영화 전개라면 이 단계에서부터 어려움을 겪겠지만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는 그렇지 않다. 회사는 진상 조사에 착수하고, 주민들에게 사과하며 합의금을 제안한다. 알고 보니 여기엔 더 큰 함정이 있었다. 삼진그룹이 방류한 페놀의 양은 적당히 합의하고 넘어갈 수준이 아니었지만, 회사는 지역 사회에 아주 약간의 피해만 입힌 듯 사건을 축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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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전자의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 영화의 모티프가 된 건 1991년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이다. 당시 두산전자 경북 구미 공장에서 페놀 원액 저장 탱크의 파이프가 파열되며 페놀 원액 30톤이 낙동강 유역 하천에 흘러 들어갔다. 이 페놀이 대구시 상수원인 다사취수장으로 유입되면서 페놀에 오염된 수돗물을 무려 162만명이 마셨다. 이는 당시 대구시 인구의 71%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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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취수장 측이 악수를 뒀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한다. 수돗물에서 악취가 난다는 시민들의 항의가 잇따르자 당장 냄새를 제거하려 염소를 다량 투입한 것이다. 페놀은 염소와 결합하면 독성이 한층 강력한 클로로페놀로 변하기 때문에 외려 피해를 키운 셈이다.
해당 사건으로 인한 피해는 광범위했다. 일단 수돗물을 직접 마신 대구 시민들이 두통, 복통, 구토 및 피부질환을 호소했다. 이에 더해 페놀은 과수원과 농지에 오염을 유발했으며, 여기에서 나온 작물을 먹은 사람들이 고통받았다. 두산그룹 불매운동이 확산하는 등 사회적 지탄이 이어지자 박용곤 두산그룹 회장은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최종적으로 대구 환경처 직원 7명과 두산전자 직원 6명 등 13명이 구속되고 환경처 장관이 경질되는 등 파장이 만만치 않았던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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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의 문제를 고의로 키운 주범이 사장이라고?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여기에 하나의 사건을 덧대며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로 나아간다. 세 말단 직원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던 도중, 전문경영인 사장(CEO) 빌리 박이 페놀 방류 문제를 일부러 더 키웠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페놀 방류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서류를 조작하고 오히려 더 많은 페놀을 방류하는 방법으로 회사가 더 큰 비판을 받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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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사장으로 재직 중인 회사가 더 큰 곤경에 처하도록 유도한 이유는 그의 출신에 있다. 사실 빌리 박은 글로벌캐피탈이라는 헤지펀드 출신으로, 삼진그룹에는 위장 취업했다. 영화 속 가상의 기업인 글로벌캐피탈은 적대적 인수합병(M&A)을 일삼는 펀드 운용사인데, 삼진그룹 주가를 떨어뜨려 헐값에 더 많은 주식을 사들이려 시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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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 단점을 찾는 매수측과 이를 가리려는 매각측의 숨 막히는 눈치 싸움 글로벌캐피탈과 삼진그룹 말단 직원들의 싸움을 더 들여다보기 전에 M&A의 일반적 과정을 살펴보자. 사실 M&A에서 인수 측이 매물의 단점을 찾는 것은 특이한 행태는 아니다. 매물의 단점은 일반적으로 가격 할인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수측은 주식매매계약(SPA)을 체결하기 전 사업실사(CDD), 재무실사(FDD), 법률실사(LDD), ESG실사(EDD) 등을 수행하며 매물이 지닌 강약점을 파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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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발견한 문제점을 근거로 가격 할인을 시도하거나, 인수를 포기하기도 한다. 일반인과 아주 동떨어진 세계의 이야기도 아니다. 집을 사기 전 도배나 화장실 상태 등을 꼼꼼하게 점검하고, 문제를 발견했을 때 가격 협상을 시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매수측이 단점을 부각한다면, 매각측은 그것이 치명적 약점이 아니라고 설득하며 ‘제값’을 받기 위해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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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박은 삼진그룹 저가 매수 기회를 잡기 위해 약점을 발견하려는 것을 넘어 한층 더 부각시키려 든 것이다. 실제 M&A 시장에서도 인수측이 일부러 매물에 흠집을 내서 싼값에 사려는 시도가 종종 포착된다. 최근엔 식음료(F&B), 콘텐츠, 뷰티 업계에서 일부 기업이 이른바 역바이럴(의도적으로 부정 여론을 형성하는 일) 마케팅을 통해 저가 M&A를 시도한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애초에 있지도 않은 문제를 역바이럴을 통해 퍼뜨린 다음, 상대 기업이 버티지 못할 지경이 됐을 때, 낮은 가격에 인수하는 것이다.
론스타게이트, 외환은행의 적정 가치는 얼마였을까 한국 경제 역사에서도 이와 유사한 의혹이 제기된 사건이 있다. 영화가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 외 또 하나의 모티프로 삼은 론스타 게이트다. 론스타 게이트는 미국계 헤지펀드 론스타가 2003년 외환은행 경영권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논란이다. 1997년 외환 위기로 인해 외환은행이 독일 코메르츠방크에 매각되고, 2003년 다시 론스타에 매각됐는데, 바로 2003년 매매 과정에 편법이 있었다는 의혹이다.
당시 은행법은 금융 자본만이 시중은행을 인수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산업자본으로 분류되던 론스타는 단독으로 외환은행을 인수할 자격이 안 됐다. 다만, 이 법엔 예외가 있었다. BIS(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비율이 8% 이하인 부실 금융기관을 인수하는 경우에는 산업자본도 인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BIS 비율은 국제결제은행이 정한 은행의 위험가중 자산 대비 자기자본 비율로, 은행의 건실도를 측정하는 대표적 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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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은행장이 BIS 비율을 6.16%로 전망한다는 내용의 문서를 금감원에 보내고, 금감원은 이를 근거로 론스타의 대주주 자격을 승인해줬다. 그 근방에 만들어진 다수의 보고서에서 외환은행 BIS 비율을 8% 이상으로 예상했던 것과 차이가 있다. BIS 비율을 높게 추정한 보고서가 상당수 존재했음에도 매각 직전에 나온 부정적 전망을 근거로 매각을 승인한 것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헐값에 사들이기 위해 BIS 비율을 최대한 낮게 추정했고, 이를 외환은행에 넘겼으며, 외환은행은 이를 다시 금감원에 보고해 매각이 성사되도록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자격이 안 되는 인수 주체가 매물을 합법적으로, 그리고 헐값에 사들이기 위해 부정 이슈를 조직적으로 부각했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당시 외환은행 BIS 비율이 얼마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하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중요도를 띠는 계약에 이처럼 논란의 여지를 많이 남겨뒀다는 것만으로도 ‘졸속 매각’이란 비판을 받기에 마땅하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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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한창이던 2020년, 입소문 타며 손익분기점 넘겨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시기, 영화는 입소문을 타고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데 성공했다. 영화가 모티프로 삼는 사건들은 무겁지만, 추리, 스릴러, 코미디를 버무려 몰입도를 높였다. 고아성, 이솜, 박혜수 등 주연 배우의 연기 합도 잘 맞는다. 한국 경제사와 M&A 세계를 살짝 들여다보면서 오락영화로서의 재미까지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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