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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by 매일경제

현대미술의 아버지 세잔, 그는 56세까지 조롱만 당한 화가였다

[죽은 예술가의 사회-61] 폴 세잔 (화가, 1839~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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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사과

서양의 정신은 사과에서 시작됐다. 신은 아담과 이브를 창조해 에덴동산에 살게 했다. 신은 두 인간에게 경고한다. '동산 한가운데 있는 선악의 나무에 달린 열매만큼은 절대 먹지 말라.' 인간의 호기심은 강하다. 신의 경고도 무시할 만큼.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사과)를 베어 물었다. 인간은 낙원에서 추방됐다. 아담과 이브가 지은 죄를 이어받은 인간은 노동과 죽음이라는 고통을 끌어안고 살게 됐다. 그 대신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능력을 얻었다. 인간의 이성도 사과 덕분에 발전했다. 아이작 뉴턴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면서 중력이라는 개념을 발견했다. 모든 자연 현상을 종교의 눈으로 바라보던 유럽은 뉴턴 덕분에 수학과 과학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여 진보를 이뤘다. 오랜 시간이 지나 또 하나의 사과가 등장했다. 2007년 스티브 잡스가 사과 로고가 박힌 핸드폰을 들고나왔다. 스마트폰이 세상을 어떻게 재편했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예술사에서도 중요한 사과가 있다. 폴 세잔의 사과다. 미술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세잔의 사과 그림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세잔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과 한 알로 파리를 정복할 것이다." 그는 정말로 사과 한 알로 미술의 수도 파리를 정복했다. 예술가들의 교주로 칭송받았고, 미술 패러다임을 바꿨다. 사과 정물화는 어떻게 세상을 흔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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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이 1867년에 그린 `납치`. 세잔의 초기작은 어두운 분위기로 가득하다.

거만했던 피카소조차 "세잔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

르네 마그리트, 살바도르 달리, 몬드리안, 잭슨 폴록, 바스키아. 모두 현대미술 아이콘이다.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한때 피카소로부터 영감을 얻었고, 피카소를 질투했고, 피카소를 뛰어넘기 위해 자신의 영역을 개척했다. 20세기 미술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 예술가 단 한 명만 뽑자면 당연히 피카소다. 그가 주도한 입체주의 화풍은 뉴턴의 사과만큼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권력을 쥔 남자답게 피카소는 자신감이 넘쳤다. 자신이 예술가들의 황제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다른 예술가를 무시했고, 주변 사람에게 괴팍하게 굴었다. 예술가들의 예술가였던 피카소도 유일하게 스승으로 삼은 화가가 세잔이다. 피카소는 "그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다"라고 말하며 세잔 앞에서는 고개를 숙였다.


세잔은 1839년 프랑스 남쪽 엑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은행가 아버지를 둔 세잔은 부족함 없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학교에서 미술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그림 그리기에 푹 빠졌다. 그런 대로 실력도 인정받았다. 이 시기에 세잔은 동네 친구를 사귄다. 세잔의 친구는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으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병약하고 남루한 옷차림에 말까지 더듬었던 이 소년은 또래에게 괴롭힘당하기 일쑤였다. 세잔은 이 가여운 소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둘은 금세 단짝이 됐다. 세잔의 친구는 프랑스 대문호 에밀 졸라였다. 세잔은 화가라는 꿈을 품지만, 아버지는 강력히 반대했다. 아버지 뜻에 따라 법대에 진학했지만 세잔 머릿속엔 그림뿐이었다. 에밀 졸라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작가가 되기 위해 파리로 향했다. 세잔은 아버지를 설득하고 법대를 자퇴했다. 그 역시 친구를 따라 파리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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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머물던 시절 인상주의 화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린 작품 `목을 매단 사람의 집`(1873).

실패한 파리의 화가

고향에서 그림 실력을 인정받고 파리로 온 세잔은 실의에 빠진다.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 파리는 재능 넘치는 화가들이 무더기로 활동하던 시대였다. 그들과 비교하면 세잔의 그림은 평범했다. 에밀 졸라 역시 번번이 출판사로부터 퇴짜를 맞았다. 둘은 고향에서 그랬던 것처럼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먼저 기회를 잡은 사람은 에밀 졸라였다. 1965년 훗날 인상파 화가들의 대부로 불리게 될 마네가 '올랭피아'라는 그림을 전시했다. 나체의 여인이 침대에 누워 당당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작품이다. 마네가 그린 이 인물은 몸을 파는 여성이었다. 미술계 전체가 마네를 공격했다. 부르주아 관객들은 "어떻게 매춘부를 소재로 천박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단 말인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파리 상류층 남자 상당수는 사창가에 들락거리며 일탈을 즐겼다. 그들에게 마네의 '올랭피아'는 치부를 떠올리게 하는 불편한 그림이었다. 에밀 졸라는 용기를 내서 마네를 지지했다. 그는 다른 화가들이 비너스라는 이상적인 여신의 몸에 집착할 때 오직 마네만이 진실을 그렸다며 옹호했다. 에밀 졸라는 날카로운 미술 비평으로 파리 예술계에 이름을 알렸다.


친구는 서서히 두각을 드러냈지만, 세잔은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에밀 졸라는 자신이 사귄 파리의 예술가들을 세잔에게 소개해줬다. 하지만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세잔은 타인과 제대로 교류하지 못했다. 파리로 온 후 10년간 세잔은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친구의 모습을 바라봐야만 했다. 그는 매년 나라에서 개최하는 파리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했지만 거절당했다. 1874년 세잔에게 기회가 왔다. 파리 살롱으로부터 낙선한 젊은 예술가들이 의기투합했다. 그들은 젊은 화가들의 실험적인 그림을 거부하는 보수적인 파리 살롱전에 반기를 들며 독자적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이 전시회를 주도한 화가 모네는 "새로운 회화를 보여줄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했다. 전시회에 참여한 화가 중에는 드가, 르누아르, 부댕도 있었다. 세잔도 이 전시회에 그림을 출품했다. 서양미술사에서 이 전시회가 갖는 의미는 크다. 전시회를 찾은 비평가 중 한 사람이 모네의 그림을 보며 '인상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림에 본질은 없고 오직 인상만 있다"며 비하의 의미로 인상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19세기 후반 서양 미술계를 점령한 인상주의 명칭은 이렇게 탄생했다.


세상은 젊은 예술가들의 도전적인 작품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다. 주류 미술계는 전시회에 참여한 화가들을 비판했다. 특히 세잔을 겨냥해 저주에 가까운 말을 퍼부었다. 어둡고 우울한 색조로 그림을 그리던 세잔은 정신병자 취급까지 받았다. 시간이 흘러 세잔과 함께 전시회를 열었던 화가들은 하나둘 인정을 받고 주류 미술계로 입성한다. 세잔만 그대로였다. 꿈을 안고 파리에 온 이후로 20년 동안 세잔이 얻은 건 상처와 조롱뿐이었다. 1880년대 초 세잔은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엑상프로방스로 돌아갔다. 위대한 은둔의 시간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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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대표작 `아비뇽의 처녀`들에 영감을 준 세잔의 `목욕하는 사람들`(1900~1905).

위대한 은둔

가족의 반대에도 파리로 향했지만, 오랜 시간 동안 이룬 것 하나 없이 돌아온 세잔은 조용한 곳에 틀어박혀 지냈다. 그래도 붓을 놓지는 않았다. 사람들과의 교류를 끊고 계속 무언가를 그렸다. 그 사이에 에밀 졸라는 프랑스의 지식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세잔은 고향 친구 에밀 졸라와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이 관계도 종말을 맞았다. 1886년이었다. 에밀 졸라는 새로 쓴 소설을 세잔에게 보내줬다. 소설 속에는 클로드라는 화가가 등장한다. 클로드는 능력은 있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망상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세잔은 클로드의 모델이 자신이라 확신했다. '친구가 바라보는 내 모습이 이렇게 비참했다니.' 세잔은 그 이후 단 한 번도 에밀 졸라를 만나지 않았다. 30년 넘게 이어진 우정은 그렇게 끝났다. 같은 해 세잔은 무능력한 아들의 버팀목이 돼준 아버지도 잃었다. 쉰 살이 다 될 때까지 인정은커녕 비웃음을 견뎌야 했던 화가. 친구에게조차 실패한 화가로 무시당하고, 아버지에게 한 번도 인정받지 못한 아들. 세잔은 누가 봐도 낙오자였다. 하지만 그는 고행에 들어간 수도승처럼 묵묵히 그림을 그릴 뿐이었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세잔에게 영향을 끼친 화풍은 인상주의다. 인상주의 화풍이 등장하기 전까지 서양미술은 종교화나 귀족 초상화에 머물러 있었다. 황금 비례를 따져가며 비너스의 이상적인 몸을 묘사하거나, 원근법을 활용해 균형 잡힌 구도를 만드는 데 치중했다. 인상주의는 이 관습을 거부했다. 인상파 화가들은 한낮에 연못 위로 떨어지는 빛과 같은 찰나의 이미지를 포착하려 했다. 캔버스를 들고 야외로 나가 눈앞에 펼쳐진 한순간을 재빨리 스케치했다. 원근법, 명암법, 대조법을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정밀한 묘사도 중요하지 않았다. 파리에서 멀리 떨어져 고립된 채 그림을 그리던 세잔은 자연스레 인상주의로부터 받은 영향을 떨쳐냈다. 더 나아가 인상주의를 비판적으로 해석했다. 세잔은 눈꺼풀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빛처럼 찰나의 순간에만 집착하는 인상주의를 버렸다. 세잔은 사물의 본질을 그리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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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의 대표작 `사과 오렌지`(1895~1900).

56세에 처음으로 인정받은 세잔

세잔은 일상 속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사과는 그중 하나였다. 세잔의 사과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사과와 오렌지'다. 그림 가장 왼쪽에는 낮은 접시에 사과가 담겨 있다. 가운데는 솟아오른 그릇이 있다. 그 안에도 사과가 담겨 있다. 가장 오른쪽엔 물병이 있다. 평범한 소재를 사용한 정물화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묘한 포인트가 많은 그림이다. 왼쪽의 낮은 접시는 마치 위에서 내려다본 시점으로 묘사돼 있다. 바로 옆에 있는 솟아오른 그릇과 물병은 옆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묘사했다. 세잔은 좌, 우, 위, 아래에서 사물을 관찰하고 다양한 시점에서 바라본 피사체를 한 캔버스에 담은 것이다. 또한 사과의 형태나 색도 제각각이다. 어떤 사과는 먹음직스러운 붉은색이지만, 또 다른 사과는 이제 막 시들기 시작했는지 푸르스름하다. 세잔은 왜 이런 방식으로 사과를 그렸을까.


세잔은 사과를 바라보고 또 바라봤다. 때론 온종일 사과만 관찰하기도 했다. 세잔이 '사과와 오렌지'를 완성하는 데 걸린 시간은 무려 6년이다. 그는 고개를 살짝 돌리거나, 눈을 가늘게만 떠도 사과가 다르게 보인다는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원근법처럼 소실점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 치 흔들림 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인간은 없다. 사과를 그리던 세잔은 어제까지만 해도 싱그럽던 사과가 다음 날 푸석해지는 현상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자연은 끊임없이 변한다. 이 모든 발견을 캔버스에 담으려 했다. 그렇게 세잔은 오른쪽, 왼쪽, 위, 아래, 어제, 오늘, 내일, 작년, 내년의 사과를 한 캔버스 안에 그렸다. 세잔은 인상주의가 배척했던 고전미술에 담긴 질서와 균형의 아름다움도 살려내려 했다. 그래서 자연을 원기둥, 구, 원뿔과 같은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로 치환해 그렸다. 찰나의 순간을 몽롱한 화풍으로 그린 인상파 화가들과 달리 세잔 그림은 단단하고 견고하며 기하학적인 미감이 살아 있다.


세잔은 1895년부터 빛을 봤다. 그의 나이는 56세였다. 당시 파리에서 가장 영향력 큰 미술상 볼라르는 시골에 틀어박혀 묘한 그림을 그리는 무명 화가가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볼라르는 세잔 그림을 직접 보자마자 전시회를 기획했다. 세잔은 생애 첫 개인전을 열었다. 젊은 화가들 사이에서 세잔의 이름은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그리고 피카소가 말한 대로 '현대미술 화가들의 아버지'가 됐다. 후배 화가들은 세잔의 그림을 보며 해방감을 느꼈다. 그들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 수백 년 동안 서양화를 지배한 규칙들이 완벽히 허물어졌음을 확신했다. 여러 방향에서 대상을 관찰하고 묘사하던 세잔의 실험은 피카소에게 영향을 끼쳤다. 인간의 형태를 조각조각 낸 후 캔버스 위에서 재창조한 피카소의 입체주의는 그렇게 탄생했다. 풍부한 색채를 활용한 세잔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마티스는 색채 그 자체를 주인공으로 삼는 야수파를 창시했다. 기본적인 도형 형태로 세상을 재편한 세잔의 실험은 몬드리안, 칸딘스키와 같은 추상화 화가의 밑거름이 됐다. 세잔은 뒤늦게 얻은 명성의 과실을 누리기는커녕 계속 은둔자로 살았다. 1906년 폐렴으로 눈을 감기 직전까지 조용히 그림만 그렸다.


예술계는 피카소처럼 천재들이 우글거리는 동네다. 고흐나 로댕처럼 넘쳐흐르는 예술혼 때문에 격정적인 인생 스토리를 남긴 예술가도 많다. 그들과 비교하면 세잔은 번쩍이는 천재는 아니었다. 오랜 시간을 은둔자로 살았던 세잔의 삶 역시 밋밋하다. 하지만 세잔은 누구라도 포기했을 법한 시련 속에서도 꿈을 꺾지 않았다. 실패한 인생이라는 낙인에 잡아먹히지 않고 조금씩 발전했다. 세잔은 그가 그린 사과처럼 자신의 삶을 좌, 우, 위, 아래에서 바라보며 혁신을 추구했다. 수십 년을 실패한 인간으로 살았던 그는 결국 역전에 성공했다. 수많은 천재 화가에게 영감을 주며 예술 역사를 바꿨다. 세잔의 사과는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버티며 결실을 본 한 인간의 인내 그 자체다. 그래서 위대하다.


[조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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