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때려 부수던 금수저…백남준은 왜 TV로 예술을 했을까
죽은 예술가의 사회-57
[죽은 예술가의 사회-57] 백남준 (미디어 아티스트, 1932~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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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굿모닝, 미스터 오웰
가장 유명한 디스토피아 소설은 조지 오웰의 '1984'다. 오웰은 전체주의의 공포를 묘사하려 가공의 국가 오세아니아를 창조했다. 오세아니아는 거대한 감옥이다. 빅브러더가 24시간 개인의 일상을 감시한다. 정부 지침과 다르게 행동하고 생각하는 사람을 세균처럼 여기며 즉각 박멸한다. 빅브러더가 철저히 세상을 통제할 수 있는 건 기술 덕분이다. 오세아니아 어디에든 크고 작은 텔레스크린이 설치돼 있다. 텔레비전을 닮은 이 텔레스크린이 빅브러더 그 자체다. 텔레스크린은 국민들이 숨죽여 말하는 목소리까지 엿듣는다.
소설 '1984'가 나온 지 35년이 흘렀고, 세상은 정말로 1984년을 맞이했다. 1984년 1월 1일, 뉴욕이 정오가 됐다. 같은 시각 샌프란시스코는 오전 9시, 파리와 베를린은 오후 6시, 서울은 하루가 지난 1월 2일 새벽 1시였다. 바로 이때 미국, 프랑스, 독일, 한국 텔레비전에 같은 영상이 나왔다. 세계 최초 인공위성 생중계 방송이었다. 영상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GOOD MORNING, MR. ORWELL)이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영상엔 전 세계 예술가 100여 명이 등장한다. 제각각 자신의 나라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춤을 추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른다. 메시지는 명료하다. "안녕하세요, 오웰. 당신은 1984년을 암울하게 묘사했지만 우리는 즐겁게 지내고 있어요. 세계엔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하고 우린 텔레비전을 통해 그것을 공유해요. 아무래도 당신이 조금 틀린 거 같아요." 전 세계 약 2500만명이 이 생중계 쇼를 본방송으로 봤다. 낙관적인 에너지로 1984년 포문을 연 이 영상은 백남준 작품이다.
건축사진가 남궁선이 촬영한 백남준 대표작 `다다익선`. /사진 제공=국립현대미술관 |
◆ 조선 최고의 부잣집 도련님
백남준의 대표작은 '다다익선'(1988)이다. 텔레비전 1003대를 지름 7.5m, 높이 18.5m로 쌓은 텔레비전 타워다. 동양 불탑과 서양 바벨탑을 섞은 모양새다. 1003개 브라운관에선 제각각의 영상이 쏟아진다. 거기엔 동서양 곳곳의 풍경과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다다익선'은 백남준이 88서울올림픽을 기념해 제작한 작품이다. 서울올림픽은 냉전 시대를 허문 평화 이벤트로 평가받는다. 서울올림픽 직전에 열린 1984년 LA올림픽 땐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이 불참했다.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 때는 미국과 서유럽 국가가 보이콧했다. 하지만 서울올림픽에는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국가의 스포츠 선수가 한데 모였다. 같이 땀을 흘리고 건전한 대결을 펼쳤다. 동서양 문화를 1003개 텔레비전을 활용해 이어붙인 '다다익선'은 1988년 세상을 감쌌던 화합의 기운을 불어넣은 작품이다.
백남준은 '다다익선'을 가풍으로 삼은 듯한 집안에서 성장했다. "아들아, 돈은 물 쓰듯 쓰는 것이란다." 백남준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수시로 했던 말이다. 백남준은 1932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태창방직 대표 백낙승이다. 태창방직은 우리나라 최초 재벌 기업이다. 일제에 협조했던 백낙승은 특혜를 받으며 태창방직을 키웠다. 백남준은 3남2녀 중 막내였다. 백남준 형 두 명은 아버지 뜻을 따라 사업가의 길로 들어섰다. 백남준은 형들과 달랐다. 사업가 교육은커녕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다. 자본가 집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자본가를 타도하라"는 메시지에 경도됐다. 당연히 일제와 타협하며 자본을 쌓은 아버지를 못마땅해했다. 마르크스만큼 백남준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은 쇤베르크다. 오스트리아 작곡가 쇤베르크는 무조음악을 이끈 인물이다. 무조음악이란 말 그대로 조성이 없는 음악이다. 이것은 고전음악 질서를 송두리째 거부하는 반역이었다. 쇤베르크는 '음악이 왜 아름다워야만 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다. 관중에 따라서 쇤베르크 음악은 소음, 불협화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백씨 가문 내에서 백남준은 일종의 무조음악이었다. 백남준 부친은 불협화음 그 자체였던 막내아들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 그는 사업차 홍콩에 오래 머물러야 했는데, 강제로 백남준을 데려갔다. 백남준은 홍콩에 있는 영국계 학교에 다녔다.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나이였다. 평생 전 세계를 누비며 발자취를 남긴 백남준, 그의 코스모폴리탄 삶은 그렇게 시작됐다.
플럭서스 멤버로서 백남준이 선보인 행위예술 `머리를 위한 선`(Zen for Head). /사진 출처=MOMA |
◆ "정신병자들이 탈출했다"
홍콩에서 유학하던 백남준은 집안 행사 때문에 1950년 잠시 귀국했다가 6·25전쟁을 맞았다. 식구 대부분은 부산으로 피란을 떠났지만, 백남준은 고집스레 서울에 남았다. 마르크스 사상에 심취한 청년답게 북한군에 대한 적대감이 작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군은 백남준 집에 쳐들어와 세간을 뒤집어엎고, 집에서 기르던 개를 모조리 잡아먹었다. 북한군 행패에 실망한 백남준은 그제야 이데올로기라는 열병에서 벗어났다. 1952년 백남준은 일본으로 건너가 고등학교를 다니고 도쿄대에 입학했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미학을 전공했다. 졸업 논문 주제는 쇤베르크였다. 예술에 대한 열망으로 끓어오른 백남준은 1956년 독일로 향했다. 그곳에서 음악, 철학, 건축 등 폭넓은 분야를 공부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바꿀 예술가 존 케이지를 만났다.
존 케이지는 음악계의 마르셀 뒤샹으로 평가받는 전위 예술가다. 뒤샹이 미술관에 변기를 가져다 놓고 "이것도 예술이다"라고 선언하며 전설이 됐다면, 존 케이지는 공연장에 청중을 모아놓고 4분33초 동안 아무 연주도 하지 않은 퍼포먼스로 유명해졌다. 4분33초간 공연장에 울린 소리라곤 청중의 기침 소리, 수군거림, 공연장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음뿐이었다. 존 케이지는 공연장 안에서 생겨날 수 있는 모든 '우연의 소리'를 음악으로 봤다. 그는 짧게나마 쇤베르크 밑에서 음악을 배운 경력도 있었다.
1959년 독일에서 존 케이지 공연을 접한 백남준은 곧장 이 전위 예술가의 실험 정신에 매료됐다. 당시 독일에선 존 케이지를 정신적 스승으로 삼는 예술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플럭서스라는 전위 예술가 그룹을 결성했다. 백남준도 플럭서스 멤버로 활동하며 행위 예술가로 두각을 드러냈다. 이 시기 백남준이 선보인 유명한 퍼포먼스 중에 '머리를 위한 선'(Zen for Head)이 있다. 한 남자가 잉크와 토마토 주스가 들어 있는 통에 머리를 담갔다 뺀 후, 머리카락을 붓처럼 사용하며 긴 종이에 선을 그리는 작품이다. 이 밖에 백남준은 도끼로 피아노를 내려치는 과격한 퍼포먼스도 가감 없이 보여줬다. 서독 언론은 플럭서스 예술가들을 두고 "정신병자들이 탈출했다"며 기겁했다. 주류사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플럭서스 예술가들의 기이한 에너지는 팽창했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1963년 말 백남준은 일본으로 건너가 1년 정도 머물며 공연을 하고, 이후 뉴욕으로 무대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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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없으면 예술이 아니다"
일본에서 백남준 공연을 인상 깊게 본 여성 중 구보타 시게코가 있었다. 구보타는 백남준 덕분에 전위 예술에 눈을 떴다. 그리고 첫눈에 이 괴상한 예술가에게 반했다. 백남준이 뉴욕으로 떠나자 구보타도 그를 따라 미국으로 향했다. 백남준은 결혼은커녕 연애에도 관심 없는 남자였지만, 구보타는 끈질기게 구애했다. 둘은 연인이 됐고 결국 평생을 함께했다. 구보타도 플럭서스 멤버로서 행위 예술에 동참했다.
피아노를 부수는 과격한 퍼포먼스로 이름을 알리던 백남준은 왜 비디오 아티스트로 방향을 틀었을까. 엉뚱한 대답 같지만, 그가 '비디오 아트'라는 영역을 개척한 원동력은 가난이었다. 물론 백남준은 금수저 중에서도 금수저였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때 일본에서 예술을 배우고 독일로 건너가 세계적인 예술가들과 어울릴 수 있었던 건 부유한 집안 출신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 하지만 집안의 후원은 거기까지였다. 1956년 백남준 부친 백낙승이 세상을 떠났다. 장남이 경영을 맡았다. 경제 불황과 경쟁 업체 등장으로 태창방직은 무너졌고 1961년 파산했다. 군사정권은 일제에 협조한 백씨 일가의 재산을 몰수했다. 백남준은 부잣집 도련님에서 가난한 예술가로 전락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장난기 넘치고, 낙관적이었다. '어차피 가난해졌고 뭘 해도 곤궁함을 벗어나긴 힘들 것 같으니 예술만큼은 가장 비싼 재료를 활용해보자'라고 생각했다. 백남준의 눈에 들어온 재료는 텔레비전이었다. '재미없으면 예술이 아니다'라는 신념을 가진 백남준은 많은 사람이 텔레비전 앞에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영감을 얻었다. 그는 돈이 생기는 대로 값비싼 텔레비전을 사들이며 창작 재료로 삼았다.
어느 날 백남준은 가진 돈을 탈탈 털어 골동품 가게에서 볼품없는 부처 조각상을 사왔다. 그렇게 'TV부처'(1974)라는 작품이 탄생했다. 텔레비전 앞에 부처를 앉혀 놓은 작품이다. 텔레비전 뒤에 설치된 CCTV 카메라는 부처를 찍고 있다. 텔레비전 화면엔 카메라가 비추는 부처의 모습이 나온다. 즉 부처가 텔레비전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비평가들의 찬사가 쏟아졌다. "서양 과학기술과 동양의 영적인 세계를 절묘하게 조합했다"는 평가였다. 텔레비전을 통해 명상하는 부처의 모습은 그 자체로 묘했다. 관객들은 다양한 상념에 빠졌다. '차가운 기계가 철학적인 고민까지 품을 수 있을까.' '우린 텔레비전을 통해서도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을까.' '무엇이 실재이고 허상인가.' 마그리트가 그린 파이프 그림처럼 'TV부처'에도 다양한 철학적 해석이 달라붙었다. 이 작품으로 백남준은 크게 주목받았다. 그의 비디오 아트도 새로운 예술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1982년에는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열 만큼 중요한 예술가로 예우받았다.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전 세계 곳곳에 방영되면서 백남준의 예술은 꽃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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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이 떠나고, TV의 시대도 저물어
예술가 중 상당수는 반골이다. 그들은 규칙에 의문을 제기하고, 균열을 낸다. 이들에게 세상이란 혁신해야 하는 과제다. 하지만 어떤 예술가는 동시대의 공기를 힘껏 들이마시면서 낙관적으로 미래를 그리기도 한다. 백남준이 그랬다. 그는 텔레비전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눈여겨봤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보면서 바다 건너에 어떤 도시가 있고, 그곳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지 상상했다. 극장에 가기 힘든 사람은 텔레비전에서 틀어주는 영화를 보며 웃고 울었다. 고된 노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보통 사람들은 저녁에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가족과 함께 휴식을 취했다. 혼자 살면서 외로움에 허덕이는 이들에게도 텔레비전은 괜찮은 친구였다. 텔레비전 안에는 사람이 있고 삶이 있기 때문이다. 백남준은 텔레비전이라는 기술이 일상을 풍요롭게 하고,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만든다고 믿었다. 'TV부처' '굿모닝, 미스터 오웰' '다다익선' 모두 기술에 대한 긍정이 가득한 작품이다.
말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백남준은 10여 년을 불편한 몸으로 살았다.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했지만 활동을 멈추기는커녕 전 세계를 누비며 왕성하게 작품을 만들었다. "나는 행복하다"는 말도 습관처럼 했다. 2006년 1월, 백남준이 세상을 떠날 때 그의 곁엔 구보타가 있었다. 아내는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 장어덮밥을 만들었다. 백남준은 장어덮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우며 연신 "맛있어, 맛있어"라고 했다. 그가 이 세상에서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눈 감기 직전까지 좋은 것을 음미하면서 감사해했다.
공교롭게도 백남준이 떠난 직후 텔레비전 시대가 저물기 시작했다. 2007년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들고나왔기 때문이다. 이제 사람들은 손바닥 안에 있는 스마트폰을 통해 세상을 이해한다. 대중교통을 타면 거의 모든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에 몰두한다. 누군가는 이런 풍경에 대해 '소통의 단절' 등을 운운하며 비판적인 진단을 내린다. 만약 백남준이 스마트폰 시대를 겪었으면 어땠을까. 아마도 백남준이라면 실시간으로 가족, 연인, 친구와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으며 세상 곳곳의 비극과 희극을 나의 일처럼 공감하도록 돕는 이 기술을 긍정했을 테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활용해 근사한 예술품을 구상했을 것 같다.
[조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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