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에세이] 사프란 향기 가득한 `사프란볼루`…거리 풍경 들여다보면 시간 훌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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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프란볼루에는 수많은 오스만제국 시대의 건축물이 보존돼 있다. |
대도시를 여행하는 것이 책의 한 챕터를 읽는 일이라면, 소도시를 여행하는 것은 오래전 책 사이에 꽂아둔 쪽지를 발견하는 일이라 해두고 싶다. 자그마한 종잇장에 적힌 글자는 몇 안 되지만, 마음 한구석에 콕 박혀 문득 떠올릴 때마다 따뜻해지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나에겐 사프란볼루(Safranbolou)에서 보낸 날들이 그렇다.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서 약 200㎞ 떨어진 곳, 흑해 연안에 자리한 작고 귀여운 마을. 생각만 해도 향기로운 기억이 피어오르는 이 마법 같은 도시는 그 이름마저 꽃에서 기원했다.
사프란볼루는 백합목 붓꽃과의 식물인 사프란(Saffron)과 도시라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폴리스(Polis)'의 터키식 발음에서 유래했다. 문자 그대로 사프란의 도시란 뜻인데, 예로부터 이 지역에는 사프란이 많이 나기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사프란은 4만개 중 단 한 개의 씨앗만 살아남아 늦가을에 개화한다. 사실 사프란의 꽃잎은 보랏빛을 띠는데 우리가 아는 향신료로서 사프란은 꽃잎 속에 숨어 있는 붉은빛의 암술을 말린 것이다. 수백 개 암술을 말려야 겨우 1g의 사프란을 얻을 수 있어 사프란은 예로부터 금보다 진귀하게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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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마을이 유명해진 것은 사프란 덕분이기도 하지만 과거 동서 무역로를 오가던 대상들의 경유지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쪽에서 떠나온 교역상들은 이스탄불로 가기 전 사프란볼루에 잠시 짐을 풀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엔 자연스레 도시가 형성되게 마련이라, 이 작은 마을에는 바자르(시장)를 비롯해 상인들 숙소인 사라이 카라반, 터키식 목욕탕 하맘 등과 같은 시설들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수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당시 지어진 건축물과 유산들의 보존 상태가 아주 훌륭해서 사프란볼루는 17세기 오스만제국의 목조 건축 양식이 가장 잘 보존돼 있는 곳 중 하나로 꼽힌다. 그 역사적 가치 덕분에 1994년에는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고, 마을을 이루는 2000여 개 건물 중 절반 이상이 문화유산으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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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역사적 건물들은 사프란볼루의 구시가지인 차르시 마을에 모여 있다. 수백 년 전 대상들을 맞이하던 건물들은 부티크호텔, 레스토랑 등으로 개조돼 현재는 전 세계 여행객을 맞이한다. 대표적 건물로는 대상들 숙소인 진지한, 목욕탕 진지 하맘, 모스크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중 진지한은 17세기에 지어진 카라반 사라이로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이던 사프란볼루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주요 유산으로 꼽힌다. 진지한은 지금도 호텔로 사용되고 있는데, 코트 야드와 루프톱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어 투숙객이 아니더라도 관람이 가능하다. 특히 옥상에서 바라보는 도시 전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사프란볼루는 천천히 오래 살펴보고 싶은 마을이다. 스노볼 안에 있는 세상처럼 작고 오밀조밀한 것이 가까이 볼수록 놀랍고 자세히 뜯어볼수록 아름답다. 사프란볼루에서는 누군가 시계의 시침이라도 잡아끄는 듯 시간이 느릿느릿 흐르는 듯하다. 세월에 반들반들 닦인 자갈길을 조심스레 걷는 것, 낮잠 자는 고양이를 쓰다듬는 것, 담장 위로 새어나온 꽃향기를 맡아보는 것. 이 작은 동네에선 서두르지 않아도 세상 모든 사소한 것들을 돌볼 시간이 주어진다. 워낙 규모가 작다 보니 이곳에선 같은 길을 몇 번이고 다시 걷게 된다. 또다시 마주한 골목의 전경들은 시대를 달리하는 듯 매번 새로워 질리는 법이 없다. 바자르 구역에 들어서면 마치 화려했던 오스만제국의 어느 날로 시간여행을 떠나온 듯한 기분마저 든다. 구리와 청동을 파는 골목에선 여전히 대장장이가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여인들은 마당에 앉아 빵을 구워낸다. 하늘에는 굴뚝의 연기와 아잔 소리가 함께 떠다니고, 구릿빛 잔 위로는 진득한 터키식 커피가 채워진다. 상점에는 새하얗고 정갈한 레이스 천과 전통의상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고, 상인들은 달콤한 로쿰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내민다. 신나게 걷다가도 저 모퉁이를 돌면 행여나 시간여행이 끝나버리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자꾸만 늘어진다. 사프란볼루가 잡아끄는 것은 비단 시계의 바늘뿐 만은 아닌 듯하다.
사프란볼루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해질녘 흐드를륵 언덕(Hidirlik Hill)을 오르는 일일 것이다. 마을 뒤편의 구불구불한 비탈길을 따라 정상에 오르면 자그마한 공원이 나온다. 고즈넉한 티 가든과 아기자기한 조경이 돋보이는 이 공간은 사프란볼루 최고 뷰포인트다. 담벼락에 다가서니 낮에 모아둔 사프란볼루의 조각들이 한 폭의 그림이 되어 펼쳐진다. 사프란처럼 붉은 지붕 위로 석양이 내려앉는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을 고이 접어 마음 한쪽에 담아본다.
[글·사진 = 고아라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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