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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채왕? 종이왕? 빌딩왕? 그의 진짜 모습은

(상) [중기야사-31]

얼마 전 제지회사인 한국제지가 모회사 격인 해성산업과 합병한다는 공시를 했습니다. 두 회사는 해성그룹이라고 하는 매출 합계 약 1조5000억원 규모의 중견그룹에 속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해성그룹의 창업자는 우리나라 기업사에서 아주 유명한 사람입니다. 바로 '사채왕'이라고 불리는 단사천 전 해성그룹 회장입니다.그는 1960년대 우리나라 사채(私債)시장을 주름잡던 큰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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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에서 박시후와 신혜선이 다닌 회사도 `해성그룹`이었습니다. /사진=KBS

단 회장에 대한 일화는 지금도 전설처럼 남아 있는데요. 단 회장의 전화가 오면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받았다는 내용입니다. 워낙 굴리는 돈의 규모가 커서 재벌그룹 회장들도 무시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해성그룹은 전설적인 창업주 외에도 여러 가지 이목을 끄는 부분이 많은 회사입니다. 먼저 오피스빌딩 관리회사인 해성산업이 서울 요지에 많은 빌딩을 보유하고 있고, 단재완 회장을 비롯한 창업주 일가도 많은 부동산을 보유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기사에서는 해성산업이 보유한 빌딩과 단재완 회장 일가가 보유한 빌딩의 가치만 1조원이 넘는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코스닥 상장사인 해성산업은 역대 최장기간인 2년10개월에 걸친 주가조작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주가조작에 회사가 개입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유동주식이 많지 않은 해성산업을 이용해 주가조작에 참여한 일당끼리 주식을 사고파는 방식으로 2만4750원이었던 주가를 6만6100원까지 올렸던 것입니다. 이 주가조작 과정에는 한 여성 연예인의 남편이 연루돼 연예뉴스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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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 사거리에 있는 쌍둥이 빌딩인 해성1,2빌딩은 현재 단재완 회장의 두 아들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단사천(段泗川) 회장은 황해도 출신으로 대표적인 이북 출신 기업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1937년 일만상회라는 가게를 시작으로 광복 후 서울에서 재봉틀 회사(해성직물상회)를 만들어서 큰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재봉틀로 큰돈을 번 그는 주변의 기업인들과 힘을 합쳐 여러 회사를 만듭니다. 양모로 실을 만드는 모방회사(1957년 한국모방), 종이를 만드는 제지회사(1958년 한국제지), 화학섬유로 실을 만드는 화섬회사(1964년 한국나일론) 등입니다. 그는 일찌감치 오피스 임대업의 가치를 알아보고 1954년 설립한 해성산업을 통해 1960년대 초 북창동 일대에 빌딩을 건설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제지업이나 섬유산업이 모두 사양산업처럼 평가를 받고 있지만 1950~196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망한 사업이었다고 합니다.


단사천 회장은 그런데 1960년대 들어 본업인 기업 경영보다 사금융으로 더 유명해집니다. 1966년 10월 6일자 경향신문을 보면 '이른바 사금융왕 단사천 씨의 현금 실력이 60억원'이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당시도 우리나라 재벌 1위였던 삼성그룹의 자산이 200억원 정도였는데 60억원에 달하는 현금을 동원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단사천 회장은 어떻게 60억원이나 되는 현금을 굴릴 수 있었을까요? 먼저 당시의 사채(私債)시장이 지금의 사채시장과 좀 다르다는 걸 설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사채시장은 신용도가 낮은 개인들이 급전을 빌리는 시장입니다. 표면적으로는 개인적인 거래이지만 조직폭력배들과 연루된 '사채업자'들이 아주 고금리로 돈을 빌려주고 이를 갚지 않으면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이 우리가 상상하는 사채시장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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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 악명높은 사채시장으로 유명합니다. /사진=알라딘

1960년대에도 사채는 개인 간 거래라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단사천 회장이 활동하던 시대의 사채시장은 기업이 급한 자금을 조달하는 시장이라는 측면이 강했습니다. 은행과 같은 금융기관이 끼지 않고 '브로커'를 통해서 채권자와 채무자가 직접 거래한다는 점에서 지금의 자본시장과도 유사합니다. 하지만 이런 거래가 정부의 감시 밖에 있고 탈세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사채시장은 '암시장'과 같았습니다. 특히 사채시장은 빌려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이었습니다.


1972년 데이터에 따르면 사채시장 규모는 3500억원에 달했는데, 여기에 돈을 빌려준 사채권자는 20만1856건, 채무기업은 4만144개 업체에 달했다고 합니다. 당시 은행 여신 규모가 1조2000억원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사채시장 규모가 엄청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체 은행 예금 규모의 30% 정도가 사채시장이었고, 기업 자금의 30% 정도가 사채시장을 통해서 조달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사채시장 규모가 컸던 것일까요? 먼저 당시 우리나라는 아직 민간 부문의 저축이 많지 않아 기업의 자금조달이 어려웠습니다. 외국으로부터의 차관에 많이 의존했고,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큰 특혜였습니다. 기업들은 항상 자금 부족에 시달렸는데 시중의 여유자금은 은행이 아닌 사채시장으로 향했습니다. 사채에 개인 자금이 몰리는 이유는 높은 금리 때문이었는데요. 기업들이 급전을 위해 사용하다보니 금리가 높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1971년 기사를 보면 은행차입금은 이자가 연 18.8%인데 사채의 경우 연 46.8%에 달했다고 합니다.


돈이 많은 기업인들이나 공무원 등 부유한 월급생활자들, 혹은 계(契)에서 모인 자금을 굴리는 곳이 사채시장이었습니다. 이 중에는 기업 오너의 친인척 돈도 있었다고 합니다. 일종의 가짜 사채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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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사천 회장은 개성상인이라는 정체성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의 호를 `송남`이라고 짓기도 했습니다. /사진=해성산업

당시 사채시장의 70%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서울의 경우 크게 4개 그룹이 활약했는데 개성 출신 기업들이 모인 '개성방', 함경도 출신 기업인들이 모인 '함경도파', 서울평안도파, 사립대학재단 그룹 네 곳이었다고 합니다. 단사천 회장은 이 중 김종호 세창물산 회장, 남상옥 타워호텔 회장(국제약품 창업주)과 함께 개성방을 구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60억원이라는 현금은 단사천 회장뿐 아니라 개성방 그룹 전체의 현금동원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사채시장은 정부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로 곤란했던 것 같습니다. 기업들에 지나친 이자 부담이 되면서도 탈세의 온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부가 사채시장을 양성화시키기 위해 회사가 직접 채권을 발행하는 사채(社債)시장도 육성했지만 거대한 사금융시장 규모를 줄일 수는 없었습니다. 1971년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나서서 대통령에게 사채문제 해결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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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긴급조치는 25일 별세한 김정렴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라고 합니다. /사진=1972년8월3일 매일경제신문 1면

그래서 1972년 8월 3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특단의 조치를 취하게 되는데요. 바로 8·3 조치입니다. 대통령 긴급명령을 통해 모든 기업사채를 동결시키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8월 2일 기준 기업의 모든 사채를 정부에 신고하게 하고, 이를 월 이자 1.35%, 8년 만기로 상환하거나 기업에 대한 출자로 전환하도록 강제한 것입니다. 신고한 사채에 대해서는 처벌을 하지 않지만 신고하지 않은 사채에 대해서는 채무 부담을 없애줬습니다. 다만 개인 거래가 많은 300만원 이하 소액사채의 경우에는 동결 조치를 풀어주었습니다.


사채시장 동결 조치는 여러가지 긍정적인 효과를 만들었습니다. 먼저 기업들이 높은 이자 부담을 덜 수 있었습니다. 사채시장의 자금은 자연스럽게 은행이나 주식시장으로 향해서 금융회사들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정부도 음성화된 자금을 양성화시켜 세수를 늘릴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 8·3 조치가 개인의 금융거래에 정부가 개입하고 결과적으로 재벌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설명도 나옵니다.


8·3 조치로 밝혀진 단사천 회장의 사채 규모는 어느정도였을까요.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단 회장이 빌려준 사채는 하나도 없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오히려 사채시장의 큰손으로 최창학이라는 사람이 10억원에 달하는 돈을 사채시장을 통해서 빌려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60억원이나 현금을 동원할 수 있었다는 단사천 회장은 왜 사채시장에서 발을 뺀 것일까요?


[이덕주 중소기업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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