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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돈 떼먹은 전남친…성추행 누명 벗는걸 도와야할까요

*주의 : 이 기사에는 드라마의 전개 방향을 추측할 수 있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씨네프레소-44]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구약성서엔 선지자 엘리사가 아이들을 저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대머리여 올라가라"고 자신을 조롱한 아이들을 신의 이름으로 저주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암곰 두 마리가 곧 숲에서 나와 아이 42명을 찢어 죽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성경에는 엘리사의 저주가 이 흉살과 인과관계가 있다고 명시돼 있지 않으니 독자가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은 두 가지 정도다. 엘리사는 본인을 놀린 아이들이 곰에게 찢겨 죽은 사건을 목격하거나 들어서 알게 됐고, 그들이 비극을 맞이한 이유를 자신의 저주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즉, 엘리사는 아이들이 불경스러운 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에 끔찍한 죽음을 맞이해도 할 말이 없다고 여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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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해방일지` 염미정은 자신을 배신한 전 남자친구가 성추행 누명을 쓰는 장면을 목격한다.

엘리사의 사례는 극단적이긴 하지만, 인간 본성에 대해 얘기해주는 부분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상처를 주거나 무례를 범한 타인이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이것을 종종 그의 과거 악행과 연관지어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신이 됐든 정의가 됐든 우주를 움직이는 어떤 원리가 그 사람이 받아 마땅한 처벌을 내렸으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나의 해방일지' 주인공 염미정(김지원) 역시 본인을 배신한 전 남자친구가 곤경에 처하길 여러 번 바랐다. 자신에게 돈을 빌린 전 남자친구가 채무를 상환하지 않은 채 해외로 떠나는 바람에 염미정은 신용불량자가 되기 직전까지 가고, 1순위 청약통장을 깨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어느 날 염미정은 자기 돈도 다 갚지 않고 스드메(스튜디오·드레스·메이크업)를 다 갖춰 결혼한 남자친구가 성추행 누명을 쓰고 곤란에 빠진 상황을 목격한다. 그녀는 마음 속으로 그토록 저주하던 남자가 뒤집어쓰게 될 누명을 '인과응보' 정도로 해석하고 모른 척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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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해방일지`는 각종 구속에서 자유로워지길 원하는 세 남매 이야기를 담았다.

내가 만난 남자는 다 '개새끼'였다

드라마는 삶의 여러 구속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하는 세 남매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첫째 염기정(이엘), 둘째 염창희(이민기), 막내 염미정은 답답한 직장생활, 오해만 쌓이는 연애, 치솟는 수도권의 생활비 등 삶을 옥죄는 요소로 인해 지칠 대로 지쳤다. 이들은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와 사랑하고, 직장에서 자기 능력을 제대로 인정 받으며, 가정을 이끌어가는 아버지의 가부장적 태도를 누그러뜨림으로써 인생에서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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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미정은 전 남자친구 대신 받았던 대출을 상환하기 위해 청약 1순위 통장을 해지한다.

세 남매 중 특히 염미정의 인생이 답답하게 그려진다. 계약직으로 근무 중인 신용카드사에서는 정규직 직원들에게 알게 모르게 차별 받고, 그동안의 남자친구들은 모두 '개새끼'로 표현해도 부족할 만큼 그녀에게 실망감만 남겨줬다. 주변 사람들에게 사는 게 힘들다고 좀체 표현도 하지 않고, 이렇다 할 취미생활도 하지 않는 그녀는 곧 "말라죽을 것 같다"고 느낀다. 언젠가 만나게 될 필생의 인연을 상상하며 하루하루 버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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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미정은 계약직으로 근무 중인 회사에서 정규직 직원들에게 은근히 따돌림 당한다.

나를 추앙해줄 연인을 만나다

염미정은 아버지의 싱크대공장에서 일하는 구씨(손석구)에게 마음을 준다. 공장에서 말 없이 일하다 밤엔 내내 술만 마시는 구씨는 자기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필사적인 면모가 없는 인물이다. 수많은 '개새끼'에게 실망해온 그녀가 구씨는 좀 다를 거라고 기대하는 건 일정 부분 그런 의욕 없음에 기인하는 듯하다. 인생을 바꿀 욕구가 별로 없는 사람이 아무래도 자신을 실망시킬 가능성이 떨어질 것이라 보는 것이다. 사실 회사에서 친한 동료 뒤통수를 치며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는 사람은 보통 자기 삶을 일으키려는 욕망이 충만한 인물이다. 연인을 배신하고 양다리, 삼다리를 걸치는 남자도 자기 삶에서 최고의 사랑을 만나겠다는 의지가 강한 인물이다. 열정 강한 사람들에게 배신당해 온 그녀로서는 차라리 열망 없는 남자가 자신을 쉬게 해줄 수 있는 연인으로 적합하다고 여기게 됐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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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미정은 구씨에게 마음을 준다. 구씨는 자신의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필사적 노력을 하지 않는 인물이다. 열정 있는 사람들에게 줄곧 배신당해온 그녀는 구씨의 의욕 없음을 외려 긍정적 요소로 여긴다.

염미정은 구씨에게 요구한다. "날 추앙해요. 난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 개새끼, 개새끼…. 내가 만났던 놈들은 다 개새끼.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당신은 어떤 일이든 해야 돼요. 난 한 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 돼. 추앙해요." 구씨는 자신을 추앙하라는 다소 비상식적인 염미정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두 사람은 서로를 깊게 알아가게 된다. 두 사람은 서로의 실패한 연애사에 귀 기울여주고, 상대방 성격에서 매력적이지 않은 요소까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염미정은 구씨가 호스트바 출신 조직 폭력배라는 것도 개의치 않고, 그의 옆에서 시간을 보낸다. 서로가 서로를 '추앙'하려 노력하는 가운데, 염미정과 구씨는 갑갑한 세상에서 잠시나마 숨 쉴 공간으로서 상대방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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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추앙하라"는 염미정의 요구엔 "나도 당신을 추앙하겠다"는 말이 숨겨져 있다.

나를 곤경에 빠뜨린 남자친구가 성추행 누명을 쓴 장면을 목격하다

염미정이 구씨에게 건넨 "나를 추앙하라"는 말엔 사실 "나도 당신을 추앙하겠다"는 결심이 숨겨져 있다. 자신을 실망시켜 온 여러 연인에게 지친 그녀는 이번엔 다른 사랑을 해보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녀가 그동안 해온 사랑에는 상대방의 성실함과 따뜻함이 전제돼야 했지만, 이번엔 설사 상대가 불성실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이더라도 변하지 않고 사랑해보겠다고 결단했다. 실제로 이 드라마에서 구씨는 갑자기 연락을 끊고 잠수하고, 이따금 냉정한 말을 쏟아내며 염미정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구씨를 '높이 받들어 우러러보기로' 결심한 그녀는 상대를 저주하지 않는다. "당신은 내 머릿속의 성역이야. 당신은 건드리지 않기로 결심 했으니까. 잘돼서 날아갈 것 같으면 기쁘게 날려 보내 줄 거고 (…) 인간 대 인간으로 응원만 할 거라고. 당신이 미워질 것 같으면 얼른 속으로 빌었어.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기를. 숙취로 고생하는 일이 하루도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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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들의 목표가 사랑의 완성, 세속적 성공 등이 아니라 `해방`이라는 점에서 이 드라마는 상당히 종교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드라마가 끝으로 향해갈수록 염미정은 각종 구속에서 해방된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것은 인생의 여러 요소를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으로 끌어들이려는 의지 덕분으로 해석된다. 구씨를 '추앙'하는 것부터 그렇다. 연인이 자신에 대한 신의를 지켜주길 바랐던 과거의 염미정은 번번이 연애에 실패했다. 사람은 가까이 지내다 보면 언젠가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을 발견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바람직한 연인'에 대한 자기 기준에 맞지 않는다면 실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구씨의 '어떠함'과 상관 없이 사랑해보기로 결심한 염미정은 실패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줄 수 있는 방식으로 상대를 사랑할 뿐이다. 서로 맞지 않으면 거기서 좋은 추억으로 갈라서면 그만이고, 더 이상 이전 연인을 '개새끼'로 기억해야 할 필요도 없어진다.


여러 구속에서 상당히 자유로워진 그녀는 어느 날 전 남친이 누명을 쓴 현장을 목격한다. ATM 앞에서 줄을 서 있다 전 남친을 우연히 보게 된 것이다. 전화 통화에 정신이 팔린 남자가 몸을 움직이는 사이, 그의 가방이 앞에 선 여자의 몸에 닿게 되고, 그 여자는 남자를 강하게 노려본다. 자신을 배신한 남자친구가 성추행범으로 오인 받아 상당한 곤경에 빠질 수 있는 상황에서, 염미정은 진실을 아는 유일한 목격자가 된 것이다. 잠시간 고민하던 염미정은 여자에게 말한다. "아니에요. 가방이 건드린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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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추앙해요"라는 대사는 작가의 도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드라마는 이런 대사를 쏟아내는 작품이니, 취향에 맞지 않으면 여기서 그만두라`는 것이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전 남친들이 망하길 바라지 않는다. 연애를 넘어 삶의 전반적인 영역에서 그녀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부분에만 집중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본인을 배신한 남친의 인생이 망하거나 잘되는 것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해야 할 도리를 다하고 사는 것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다. 염미정이 생각하는 인간 된 도리는 남이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을 목격했을 때, 그를 외면하지 않는 것을 포함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그 현장을 못 본 척 함으로써 전 남친이 망가지는 것을 바라는 대신, 자신은 인간 된 도리를 다하기로 결정했다. 삶에서 본인이 제어할 수 있는 영역에만 힘을 쏟기로 했다. 전 남친이 벌을 받더라도 그것은 정확히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만 받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를 추앙해요"라는 대사를 '오그라든다'고 생각해 이 드라마 보기를 포기한 시청자가 많은 것 같다. 그것은 작가가 대사 완급 조절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드라마는 에세이적인 통찰을 대사로 풀어내는 작품이니, 취향에 맞지 않으면 여기서 멈춰도 좋다'고 도발한 것이다. 작가의 의도를 받아들이고 드라마의 16회를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자유로워지길 갈구하는 남매들의 삶에서 상당한 위로와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해방되기 위해서는 남이 아닌 자기 기준에 맞춰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포함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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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해방일지` 포스터.

장르: 드라마

극본: 박해영

연출: 김석윤

출연: 김지원, 손석구, 이민기, 이엘 등

평점: 왓챠피디아(4.0/5.0)

※2022년 8월 26일 기준.

감상 가능한 곳: 넷플릭스, 티빙,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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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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