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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상한 사람" 봉준호... 그가 존경한 김기영은 더 이상했다

김기영 (영화감독, 1919~1998)

기묘한 죽음

매일경제

1998년 2월 5일 새벽이었다. 서울 종로구 명륜동의 한옥 주택이 활활 타올랐다. 몇 시간 후 조간신문에 부고 기사가 실렸다. "원로 영화감독 김기영 씨(78)와 부인 김유봉 씨(69·치과의사)가 5일 오전 3시께 서울 종로구 명륜동1가 31의21 자택에서 난 불로 연기에 질식해 숨졌다. 불은 한옥 내부 20여 평을 태워 2000여만 원의 재산피해를 내고 30여 분 만에 꺼졌다."


훗날 김기영 감독의 둘째 아들 김동원 씨는 아버지 죽음과 관련해 묘한 이야기를 남겼다. 그는 부모님 집에 불이 났다는 비보를 듣고 명륜동으로 달려갔다. 이미 집은 다 타고 잿더미만 쌓여 있었다. 그 사이에서 비닐에 쌓인 종이를 발견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그것은 불에 타지 않았다. 비닐 안에는 김기영 감독이 쓴 유서가 있었다. 유서는 '동원아 보거라'로 시작했다. '내가 이 한옥을 사지 말자고 했는데 네 엄마가 우겨서 샀다. 내가 공중에 떠서 우리 집 마당을 내려다보는데 아마도 내가 죽은 모양이다. 네가 마당에 삼발이를 치고 땅을 파고 있는 것이 보인다'라고 적혀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유서를 읽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기이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김기영 부부가 살던 집은 그들이 이사 오기 전에 몇 차례나 노부부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어 나간 흉가라는 소문이 있었다.


김기영 감독 죽음에 얽힌 기묘한 분위기는 그의 영화와 닮았다. 김기영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괴짜, 기인이다. 김기영 영화는 저 안에 뭐가 있을지 몰라 들어가기 꺼려지는 시커먼 동굴 같다. 귀기 가득한 그의 작품은 오늘날 눈으로 봐도 낯설고, 불온하고, 섬뜩하다. 검은 욕망이 비린내처럼 스멀스멀 풍긴다. 괴물 같은 영화를 만든 그는 한국 영화사 계보에서 외딴 섬처럼 홀로 떨어져 있다. 기이한 에너지가 출렁이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김기영은 미국의 앨프리드 히치콕, 일본의 이마무라 쇼헤이와 비교된다. 김기영, 히치콕, 이마무라 쇼헤이 영화를 보며 상상력을 키운 인물이 봉준호다.

봉준호와 마틴 스코세이지가 반한 김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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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의 모티브가 된 `하녀`의 한 장면. /사진 제공=한국영상자료원

봉준호는 존경하는 감독과 사랑하는 영화에 관해 말하기 좋아하는 영화광이다. 그것들에서 어떤 영감을 얻어 자신의 영화에 반영했는지도 거리낌 없이 말한다. 그동안 봉준호 감독이 언급한 영화인 중 가장 많이 등장한 인물이 김기영 감독이다. 그는 '기생충'을 제작할 때 참고한 영화로 김기영의 '하녀'(1960)를 꼽았다. '기생충'을 '하녀'와 비교해서 감상하기를 바라기도 했다. 두 영화를 본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두 작품 모두 계급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계단이라는 소재도 겹친다. 김기영은 2층집 계단을 통해 하층민의 상승 욕망과 중산층의 추락 공포를 교차해 보여줬다. 봉준호는 폭우 속 달동네 계단으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기생충들의 지옥'을 보여준다.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4관왕을 차지한 봉준호 감독은 재치 있고, 사려 깊은 수상 소감으로 주목받았다. 감독상을 받은 직후에는 객석에 앉아 있던 마틴 스코세이지에게 경의를 표했다. 스코세이지는 엄지를 치켜세우며 화답했다. 훈훈한 장면을 연출한 두 거장은 기립박수를 받았다. 김기영은 봉준호와 스코세이지를 연결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스코세이지는 '하녀'를 보고 김기영에 매료됐다. 그는 선뜻 '하녀'를 디지털 버전으로 복원하는 비용을 댔다. 2008년 칸 영화제에서 '하녀'가 특별 상영하도록 힘을 쓰기도 했다. 스코세이지는 "하녀가 봉준호, 박찬욱 같은 한국의 감독에게 영향을 줬다는 걸 알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충무로로 간 서울대 의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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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아 제작된 김기영 데뷔작. /사진 제공=한국영상자료원

1919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기영은 평양으로 건너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서울로 돌아와 의대 입학시험을 쳤고 낙방했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의학을 전공했다. 이 시기에 예술과 사랑에 빠졌다. 시간 날 때마다 연극을 보러 다녔고, 영화 이론을 깊게 팠다. 광복 이후 고국에 돌아와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다. 교내 연극반을 만들어 헨리크 입센, 셰익스피어 작품을 무대에 올려 인정받았다. 모스크바 유학을 권유받을 정도로 이름을 떨쳤다. 6·25전쟁이 터졌고 김기영도 부산으로 피란을 왔다.


부산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던 김기영은 부업으로 '대한뉴스' 제작 일거리를 얻었다. 16㎜ 카메라 하나를 들고 촬영했다. 편집, 해설까지 도맡았다. 이를 계기로 주한미국 공보원으로부터 일감을 얻었다. 김기영은 의사 일을 관두고 영상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그는 미국에서 건너온 최첨단 장비를 활용하는 기회를 얻었다. 미국이 원하는 선전 영화를 찍고, 남은 필름으로는 습작을 만들었다. 당시에도 영화감독으로 데뷔하는 건 힘든 일이었다. 충무로에서 잡일을 도맡으며 10년 넘게 도제식 교육을 받아도 감독 칭호를 달까 말까였다. 김기영은 비교적 운이 좋았다. 그에겐 이렇다 할 스승이 없었다. 대신 미국의 지원으로 첫 번째 장편 극영화 '주검의 상자'(1995)를 완성했다. 그렇게 충무로의 변종이 탄생했다.

한국 컬트영화 아이콘 '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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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컬트영화의 표본으로 평가받는 `하녀`의 한 장면. /사진 제공=한국영상자료원

김기영은 자신을 예술가로 여기지 않았다. "나는 의학을 전공한 과학자란 말이지. 그게 나를 기술자로 만들었어." 김기영은 의사에서 영화감독으로 전향했지만, 그가 영화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의사의 태도와 닮았다. 사회 전체를 거대한 병동으로 보고, 그 안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인간의 욕망을 해부하려 했다. '하녀'는 김기영 영화 정수가 한데 녹아든 작품이다. 이 영화가 나온 시기 한국은 욕망이 솟구치기 시작한 때였다. 전쟁의 잔해는 치워졌고,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었다. 가까스로 중산층에 오른 사람들은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까 공포에 떨었고, 하층민은 악다구니 쓰며 저 위로 올라가려 했다. '하녀'는 중산층이 사는 2층 양옥집에 욕망 가득한 식모를 툭 던져놓는다. 유리병 안에 든 곤충을 관찰하듯 저택 안에서 일어나는 기괴한 일들을 차갑게 응시한다. 욕망과 욕망, 공포와 공포가 충돌하고 결과는 파국이다. 영화 전체에 감도는 불길한 기운은 같은 해 미국에서 개봉한 히치콕의 '사이코'에도 밀리지 않는다.


김기영이 기인으로 불린 이유는 영화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외골수였다. 머리엔 영화뿐이었다. 술도 일절 하지 않았다. 동료 영화인과 교류는 거의 없었다. 김기영이 활발히 활동했던 1960~1970년대 충무로는 다산의 시대였다. 그렇지만 김기영 영화는 총 32편에 불과하다. 인기 감독이 1년에 10편 이상 영화를 찍던 시기였음을 고려하면 적은 숫자다. 김기영은 봉준호 못지않게 디테일에 집착했다. 완벽한 콘티 없이는 영화 촬영을 하지 않았다. 영화판에서 촬영 현장 변수에 따라 유연하게 연출을 수정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완벽주의자에겐 그런 건 용납되지 않았다. 김기영은 쉼표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는 뉴스 대본처럼 치밀하게 영화를 만들었다. 조명, 카메라, 세트, 소도구 등 거의 모든 영역을 직접 컨트롤했다. 배우와 스태프들은 자신이 지금 어떤 장면을 찍고 있는지도 제대로 모를 정도였다.


'하녀'로 주목받은 김기영은 충무로 스타로 떠올랐다. 유현목, 신상옥 감독과 함께 인기 감독으로 이름을 떨쳤다. '충녀'(1971)와 '화녀'(1972)는 각각 그해 최고 흥행작이기도 했다. 그는 사람들이 직면하기 싫은 주제들을 에둘러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과장하고, 뒤틀고, 기이하게 표현했다. 이상한 방식으로, 이상한 영화를 찍으면서도 그 안에 당시 사회 병폐를 집어넣었다. 기이한 영화로 흥행까지 거머쥔 김기영의 존재는 라이벌들과 비교해 독보적이었다.

"인간을 해부하면 검은 피가 난다. 그것이 욕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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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어도`. /사진 제공=한국영상자료원

1972년 유신 시대가 열렸다. 독재 정권은 영화사를 통폐합하고,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불이익을 줬다. 또한 소설을 원작으로 한 문예영화를 강요했다. 얌전한 영화나 만들라는 압박이었다. 정권에 순응한 반공·계몽 영화가 쏟아졌다. 김기영도 문예영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결과물은 김기영다웠다. 이청준 소설을 영화화한 '이어도'(1977)는 원작과 거의 관계가 없다. 제주도 인근 외딴 섬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한국 영화를 통틀어서도 거대한 충격이다. 기괴한 욕망과 샤머니즘 정서가 가득한 '이어도'를 보고 나면 마치 코앞에서 굿판을 본 듯한 감응이 든다. 정액을 얻기 위해서 살아있는 여자가 죽은 남성과 섹스를 하는 신은 오늘날 충무로에서도 버거운 장면이다.


엄혹한 시절에도 김기영은 자신의 방식을 고집했다. 검열에서 필름이 잘려 나가는 건 기본이었다. 정권에 순응하지 않았고, 투자자는 떨어져 나갔다. 1984년 작 '바보사냥' 이후로 10년 넘게 김기영은 자취를 감췄다. 세상은 김기영이란 이름을 잊었다. 그가 다시 밖으로 나온 건 1990년대 후반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컬트영화 바람이 불었다. 충무로는 수십 년 전 이 세상의 것이 아닌듯한 영화를 만들던 김기영을 기억해냈고, 복권시켰다. 영화계는 김기영을 한국 컬트의 교주로 모셨다. 1997년 부산영화제에서 김기영 회고전이 열렸다. 김기영을 처음 접한 젊은 관객들은 "우리나라에 이런 영화가 있었나"라며 놀라워했다. 김기영은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받기도 했다. 자신에게 두 번째 기회가 왔다고 여기며 "곧 새로운 영화를 만들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는 10년 이상의 공백 기간에 집에 틀어박혀 끊임없이 시나리오 작업을 이어오고 있었다. 영화 30편을 제작할 만큼의 시나리오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마지막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부산영화제가 열리고 몇 달 후 그의 집엔 큰불이 났다. 김기영은 영화로 옮기지 못한 시나리오와 함께 영영 충무로를 떠났다.


봉준호는 아카데미 4관왕 비결을 묻는 언론에 "제가 좀 이상한 사람이에요. 평소 하던 대로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존경한 김기영도 비슷한 말을 하곤 했다. 물론 김기영답게 극단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영화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두고 "나는 변태"라고 말했다. 김기영은 "인간의 본능을 해부하면 검은 피가 난다. 그것은 욕망이다"라는 말도 남겼다. 그는 변태처럼 인간의 본능을 파고, 파고, 후벼 파며 검은 피를 뽑아냈다. 검은 피는 김기영이 떠난 뒤에도 마르지 않았다. 그 안에서 박찬욱의 '박쥐'가 튀어나왔고, 봉준호의 '기생충'이 부화했다.


조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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