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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6살 가냘픈 소녀까지 죽여 묻은 순장…그 잔인무도의 끝은? [이기환의 Hi-story]

이기환의 Hi-story

[경향신문]



얼마전 경남 창녕 교동 및 송현동 고분군의 교동 2지역에서 도굴 없이 노출된 63호분을 발굴한 결과 금동관을 비롯하여 각종 장신구를 온몸에 치장한 무덤 주인공의 흔적이 확인되었는데요.


발굴단에서는 무덤 주인공의 몸쪽에 놓인 장신구의 출토상황과, 은장도 및 굵은 귀고리 등 주로 여성 무덤에서 보이는 유물 등으로 신장과 성별을 추정한 결과 1500년 전에 죽은 신장 155㎝ 가량의 여성이라고 조심스레 추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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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창녕 송현동 고분에서 확인된 인골(왼쪽 사진)을 과학적으로 복원한 얼굴(오른쪽 사진). 첨단과학으로 복원한 결과 이 인골의 주인공이 16세, 키 152.3㎝, 허리 21.5인치의 여성인 것으로 추정됐다. 이 소녀에게 ‘송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16살 소녀 송현이는 어째서…


그러나 저는 무덤의 주인공보다 그 주인공과 함께 묻힌 순장자 여러분에게 초점을 맞추고 싶어요.


그렇습니다. 이번에 발굴된 63호분에서 5명 정도의 순장자가 묻힌 것으로 추정된답니다. 우선 주인공의 발치 쪽에 바닥을 40㎝ 정도 낮춘 순장 공간에 2명이 안치됐고요. 무덤 공간은 아니지만 흙을 쌓은 봉토 속에서도 순장자가 묻힌 공간인 듯한 석곽 2기와 옹관 1기가 나왔습니다. 양숙자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에 따르면 모두 동시대에 조성된 공간으로 추정된답니다. 순장자들은 무덤 주인공과 함께 따라 죽어야 했던 불쌍한 영혼들이었다는 얘기죠. 아직 성별이나 출신 등은 짐작할 수 없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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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교동 63호분에서 노출된 순장의 흔적. 주인공의 발 끝에 조성된 순장공간에는 2명(오른쪽 사진), 그리고 흙을 쌓아올린 봉토 속에서도 순장자의 공간인 석곽 2기(왼쪽 사진)와 옹관 1기가 나왔다.|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그런데요. 2006년 교동 2지구와 인접한 송현동 고분에서 무덤 주인공을 따라 죽은 순장자의 인골이 완벽한 모습으로 출토됐어요. 고고학·법의학·인류학·생물학·해부학 등 각계 전문가들이 모여 첨단과학을 동원하여 인골을 복원해보니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무덤 주인공과 함께 순장된 사람은 나이 16세, 키 152.3㎝, 허리 21.5인치의 여성이었습니다. 요즘의 16세 여성(160㎝·2017년 기준)에 비해 7㎝ 이상 작았고, 허리도 요즘 그 나이 또래(26인치)보다 5인치 정도 가늘었습니다. 신장을 머리길이(19.3㎝)로 나눠보니 7.94등신이었습니다. 그야말로 8등신 소녀였던 것입니다. 송현동 고분에서 노출된 이 소녀에게 ‘송현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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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이(왼쪽 사진)는 발굴당시 완벽한 상태로 출토됐다(오른쪽 사진).|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뭐 이 여성이 현대 여성들의 ‘로망’일 수 있는 ‘8등신’ 아니냐구요?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법의학 측면에서 소녀를 관찰하니 의미심장한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정강이뼈와 좌우 종아리뼈에서 ‘과도한 뼈의 재형성으로 인한 반응뼈’라는 소견이 보였다는 겁니다. 전문 용어라 잘 이해가 안가시죠. 이 부위가 이른바 장딴지(가자미) 근육이 붙어있는 부위인데 무릎을 굽혔다 폈다를 반복하면서 형성되는 반응뼈가 보였다는겁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 소녀가 반복적으로 무릎을 ‘꿇고 펴고’를 반복하면서 뭔가를 했다는 얘기입니다.


이 소녀는 ‘로망’에서 ‘비극’의 주인공으로 전락합니다. 이 갸날픈 소녀는 주인(무덤주인공)을 뼈가 어긋나도록 무릎을 꿇며 섬기다가 주인이 죽자 함께 죽임을 당해 묻혀야 했던 가여운 신세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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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동 고분에서 노출되고 있는 ‘송현이’. 귀고리가 선명하게 보인다(왼쪽 사진). 정강이뼈와 좌우 종아리뼈에서 는 ‘과도한 뼈의 재형성으로 인한 반응뼈’라는 소견을 나타냈다. 반복적으로 무릎을 꿇었다가 폈다를 반복한 결과일 수 있다.|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백인을 바칠까요?’ 사람제사의 진상


고대사회에서 생으로 사람을 죽여 제사지내는 행위는 크게 두가지로 나뉘었습니다. 사람을 제사 지내는 ‘인생(人牲)’과 죽은 자와 함께 묻는 ‘순장’이었습니다. 노예제도가 시작된 은(상)나라(기원전 1600~1046년) 시기 갑골문을 보면 해괴망측한 내용이 등장합니다. “오늘 저녁 무정왕(재위 기원전 1250~1192년)이 제사를 지낼 때 피부 하얀 강족 3명을 제물로 바칠까요?”하고 묻는 내용입니다.


갑골문은 하늘신과 조상신에게 나라와 개인의 길흉을 점치는 내용을 거북등에 새긴 문자를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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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갑골문에 등장하는 강족(羌族)은 중국 서북쪽에 살던 유목민들이었는데요. 은(상)나라는 주변 이민족과 끊임없는 정복전쟁을 벌여 사로잡은 전쟁포로를 노예로 쓰다가 제사 때 제물로 바쳤는데요. 아마 피부가 하얗거나 아예 백인이 제물로 바쳤나보죠? 강족 100명과 양 100마리를 제사지냈다는 갑골문도 있답니다.


은(상)나라에서는 그렇게 사람제사를 지낸 뒤 머리 만을 거두어 모아두었는데요. 1976년 은(상)말기 도읍인 인쉬(은허·殷墟)에서 발견된 191기의 제사구덩이에서는 무려 1178명의 희생자가 쏟아져 나왔답니다. 이 중 상당수가 목 잘린 청장년이었고, 여성과 어린아이의 유골도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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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족 100명과 양 100마리를 제사 지낼 것을 묻는 갑골문.(출처: <갑골문자전 겸 갑골문 해독> , 양동숙 저, 서예문인당, 2005)

은(상)의 정복군주인 무정왕의 부인인 부호(婦好)의 묘에서는 개와 사람이 함께 순장된 채 발견됐는데요. 사람이 가축과 다름없는 신세였던 거죠. 청년 노예임이 분명한 인골 가운데는 머리와 허리가 잔인하게 잘린 이들도 있었는데요. 순장 직전에 저항하다가 무참하게 살해돼 순장된 거죠.


사람 제사와 순장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반인간적인 행위라는 지탄을 받을 만 하죠. 그러나 당대에는 보편적인 풍습이었을 뿐입니다. 전지전능한 하늘신과 조상신을 위한 제사를 지내기 위해선 무엇이든 바쳐야 했던 시대였죠. 순장의 경우 무덤 주인의 삶이 사후에도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자행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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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나라 시대 여장군 부호묘(오른쪽)와 제사구덩이에서 확인된 사람제사의 흔적들.

■60대 남성과 묻힌 15살 소녀


우리 고대사회에서도 순장은 관습이었답니다. “부여는 사람을 죽여 100명까지 순장시켰다(殺人殉葬 多者百數)”(<삼국지> ‘위서·동이전’)든지, “248년 고구려 동천왕이 죽자 새 왕(중천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왕의 무덤에 와서 따라죽는 이가 많았다(至葬日 至墓自死者甚多至葬日 至墓自死者甚多)”(<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든지 하는 기록이 보입니다. 아무렴 새 임금이 만류했는데도 줄줄이 따라죽었겠습니까. 은연 중 순장을 강요당했겠죠. 신라의 경우 비인간적인 순장제도가 502년(지증왕 3년) 종식됩니다.


“전에는 국왕이 죽으면 남녀 각 5명씩 순장했는데, 이를 폐지했다(前國王薨 則殉以男女各五人 至是禁焉”(<삼국사기>·‘신라본기’)는 기록이 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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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대총 중 남분에서 60대 주인공과 함께 15~20세 사이의 여성이 순장된 흔적이 보였다. |이은석의 논문에서

이한상 대전대 교수에 따르면 의성 탑리와 창녕 계성리의 돌덧널무덤와 양산 부부총, 순흥 읍내리, 경산 임당고분 등의 여러 신라 무덤에서도 순장의 흔적이 보인답니다. 특히 450년 무렵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황남대총 남분의 경우 주인공이 금동관을 쓴 60세 전후의 남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관 밖에 출토된 사람뼈와 이빨 16개를 분석한 결과 신장 148㎝, 나이 15~20살 가량의 여성인 것으로 추정됐다. 분명 ‘순장(殉葬)의 흔적’이었습니다. 주인의 곁을 지키던 어린 여성이 주인을 따라 묻혀 꽃다운 생을 마감했을 겁니다. 가야 소녀 송현이와 같은 운명이었겠죠. 이외에도 무덤 안에서는 상당량의 귀고리가 발견됐는데, 15~20살 앳된 소녀를 포함해서 10명 정도가 순장된 것으로 파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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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대총 남분(왼쪽사진)의 순장자 복원그림. 출토유물 등을 분석한 결과 10명으로 추정된다. 여성 무덤으로 추정되는 황남대총 북분(외른쪽 사진)에서도 10명의 흔적이 보였다. 특히 주인공의 발치에는 순장자의 목 2구 놓은 흔적이 있다.|이은석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서해문화재과장 제공

무덤 주인공이 여성으로 짐작되는 황남대총 북분에서도 역시 10명 정도의 순장자 흔적이 보였는데요. 특히 주인공의 발밑에서는 순장자의 머리만 달랑 2구 놓은 것 같답니다. 무엇보다 ‘남녀 각 5명씩 10명을 순장했다’는 <삼국사기> 기록과도 부합되죠.(이은석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서해문화재과장의 ‘경주 황남대총 구조에 대한 일고찰’, <고고역사학지> 제15집, 동아대박물관, 1999) 황남대총 남북분은 신라 임금이나 왕족의 부부묘로 짐작됩니다. 이 부부가 도합 20명의 생사람을 달고 죽은 거죠.


그러나 신라에서는 지증왕 이후, 즉 6세기 초 이후의 신라 고분에서는 보이지 않는답니다. 아마도 순장이 너무 비인간적이라는 것을 신라 조정이 깨달아 “순장은 이제 그만!”을 외친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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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무덤 1기에 무려 40여명이나


그런데 가야는 어떤가요. 이번 63호 고분의 순장자 5명이나 ‘송현이’가 가야 사람들이 맞다면 말입니다. 대가야 시대 지배층의 고분인 고령 지산동 44호분과 45호분은 더 엄청납니다.


5세기 후반~6세기 전반 대가야 최전성기를 구가할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두 무덤에서는 최대 40여명(44호분)과 12명(45호분)이 각각 순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순장자가 시종과 무사, 창고지기 등으로 구분되어 주인공이 묻힌 으뜸돌방에 딸린 돌방에 몇 명, 그리고 돌방주변에 조성된 돌덧널에 수십명의 순장자가 묻혔답니다. 문제는 가야의 순장 풍습은 멸망 때(562년)까지 이어진다는 겁니다.


이웃나라(신라)는 순장제도가 비인간적이라 해서 폐지하는 판국에 오히려 죽은 지도자의 위상을 세우려고 죄없는 백성을 더 많이 희생시킨 겁니다. 이것이 신라와 가야의 차이가 아니었을까요. 신라가 고대국가의 기틀을 굳히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을 무렵 가야는 연맹체의 한계를 벗지 못한채 멸망의 길을 걸었으니 말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순장제도의 존폐여부가 신라와 가야의 운명을 갈랐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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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지산동 44호분의 순장자들을 복원해본 모습. 시종과 무사, 창고지기 등이 묻힌 것으로 보인다.|대가야박물관

지금으로부터 자그만치 3400여 년 전 진나라 목공(재위 기원전 659~621)이 죽자 내로라는 충신을 포함해서 무려 177명이 순장되었습니다. 그러자 당대의 군자들은 혀를 끌끌 찼답니다.


“목공은 영토를 넓히고 나라를 부강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제후들의 맹주가 될 수 없었다. 죽은 후에 백성들을 버리고 어진 신하를 순장시켰기 때문이다. 고대의 선왕들은 죽은 후에도 좋은 도덕과 법도를 남겼거늘….”(사마천의 <사기>)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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