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만 있는 특별대우? 휴지 좀 풀어봤습니다!
한국인들은 이중적인 잣대로 휴지를 대한다. 대체 한국인들에게 휴지는 어떤 존재일까. |
“한국인에게 휴지 1장을 달라고 하면 최소 2장을 준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외국인이 바라본 한국인의 특징’ 중 하나다. 아낌없이 내어주는 정(情) 많은 국민성을 향한 칭찬이지만 만약 이 상황을 한국인의 시점에서 뒤집어본다면 어떤 해석이 나올까. 분명한 것은 휴지라는 단어 앞에 ‘흔한’이라는 수식어를 대입해도 어색함이 없다는 사실이다. 팬데믹으로 전 세계인들의 ‘휴지 사재기’가 한창일 때에도 한국은 예외였다.
통상적으로 흔함은 귀하지 않음과 동의어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이중적인 잣대로 휴지를 대한다. 어떤 일이 실패하거나 무산된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 ‘휴지 조각’이라는 관용구를 쓰지만 동시에 휴지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성을 유지해주는 제품”으로 꼽힌다. ‘밑을 닦거나 코를 푸는 데 허드레로 쓰는 얇은 종이’라는 사전적 의미와 상반되게 “없어서는 안 될, 가장 과소평가된 일상용품”으로 중요성을 역설한 이도 있다. 대체 한국인들에게 휴지는 어떤 존재일까.
식탁 위 두루마리 휴지가 어때서?
식당에서 수저를 놓을 때 휴지 한 장을 깔아두는 것이 센스의 척도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불특정 다수가 사용하고 언제 빨았을까 싶은 행주가 지나간 식탁보다 순백의 휴지 위가 더욱 위생적일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이를 두고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저서 <한국인은 왜 이렇게 먹을까?>에서 “부대 물품을 간소화한 업주들의 수익성 추구와 손님들의 ‘기분 위생학’이 어우러진 결과”라고 언급했다.
일부 휴지에 포함된 형광증백제 등 성분이 오히려 인체에 유해하다는 연구 결과에 따라 최근에는 ‘수저 밑 휴지’를 두지 않는 분위기다. 하지만 여전히 가정집 식탁 위에서는 두루마리 휴지를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주부 박미현씨는 “음식을 먹은 후 오염된 식탁을 닦을 때 유용하고, 갑작스럽게 휴지가 필요한 순간 손이 닿기 편한 위치 또한 식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갑 티슈나 물티슈로 대체하는 가정이 늘어나는 추세지만 ‘가성비’를 고려한 대다수는 여전히 두루마리 휴지를 선호한다.
외국인들에게 두루마리 휴지는 볼일을 보고 뒤처리를 위해 제작된 ‘화장실 전용 제품’이다. |
그러나 이 편리함을 외국인에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 명백한 결례다. 두루마리 휴지를 영어로 번역하면 ‘화장실 휴지(toilet paper)’다. 즉 이들에게 두루마리 휴지는 볼일을 보고 뒤처리를 위해 제작된 ‘화장실 전용 제품’이다. 두루마리 휴지와 화장실이 ‘연관 검색어’처럼 떠오르는 상황이 유쾌할 리 없다. 당연히 ‘집들이 선물’로도 불합격이다. ‘술술 풀리는’ 모양처럼 선물받는 사람의 성공과 새집에서 부정한 것을 닦아내 건강하기를 기원한다는 상징적 의미는 한국에서만 유효하다.
두루마리 휴지를 집안 곳곳에서 ‘만능 휴지’로 통용하는 것 또한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다. 통상적으로 외국에서는 휴지를 주방 냅킨, 미용 티슈 등 용도별로 나눠 사용한다. 한국에서도 목적에 따라 휴지를 구분하자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71년 유한킴벌리는 “선진국의 문화처럼 미용 티슈와 두루마리 휴지를 각각 안방·거실과 화장실로 용도를 분류하자”는 인식 개선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다수의 사람은 그 차이를 두지 않았으며 이런 풍토가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기억해야 할 것은 2022년 기준 국내에서 판매 중인 대다수의 두루마리 휴지는 ‘공식적으로’ 화장실 전용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정식 명칭도 ‘화장실용 화장지’다. 일부 제품의 경우 큼지막하게 “화장실에서만 사용할 것. 식당이나 가정에서 냅킨으로 사용하지 말 것”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기도 하다.
2018년부터 공중화장실법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7조 3항에 따라 대변기 칸막이 안에는 휴지통을 두지 않는다. |
휴지는 죄가 없다
지난 여름 한국으로 출장을 온 미국인 스테판은 공중화장실에 들어섰다 기괴한 경험을 했다. ‘사용한 휴지는 변기에 버려주세요(please put used toilet paper in the toilet)’라는 안내문과 변기 옆에 쓰레기로 가득 채워진 휴지통이 공존하는 모습을 목도한 것이다. 각종 쓰레기에 뒤엉켜 있는 오물 묻은 휴지에 그는 경악했다. 비단 스테판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한 캐나다인 유튜버는 “한국 사람들은 화장지를 변기가 아니라 휴지통에 버린다”는 사실에 놀라며 생생한 현장을 전했고, 다국적 기업 한국지사에 근무 중인 독일인 사라는 “한국인들은 왜 휴지통에 미련을 두느냐. 적응할 수 없는 독특한 문화”라고 말했다.
원칙적으로 휴지는 변기에 버리는 것이 맞다. 2018년부터 공중화장실법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7조 3항에 따라 대변기 칸막이 안에는 휴지통을 두지 않는다. 여성용품 등을 넣을 수 있는 작은 통을 두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불편함을 호소하는 현장의 민원이 늘어나며 일부 공중화장실에는 편법 휴지통이 시나브로 등장하는 모양새다. 용역업체 관리자 박병중씨는 “휴지 외 각종 쓰레기를 변기에 버리는 사례가 빈번해지고 심지어 여성용품 버리는 통을 휴지통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다”면서 “휴지통을 사용하던 굳어진 생활습관이 법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다”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생리 현상을 해결하는 공간이라는 점은 다르지 않은데 유독 한국인만 휴지통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외국인들이 상대적으로 얇은 화장지를 사용하기 때문일까.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이는 서구와는 다른 화장실 문화 탓이다. 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분뇨를 농작물의 거름으로 사용해왔다. 달리 말하면 재래식 화장실에 비해 수세식 변기나 휴지 사용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는 뜻이다. 특히 양변기는 화변기에 비해 전파 속도가 더뎠다. 1978년 경향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수세식 화장실을 지으며) 양변기를 단 집은 하나도 없다. ‘며느리와 어떻게 한 요강에 앉느냐’는 노인들의 완강한 반대 때문에 양변기를 달지 못하게 됐다는 것이 마을 사람들의 뒷얘기다.
더욱이 재래식 화장실에서는 휴지가 아닌 볏짚, 신문지 등 대체품이 사용됐고 이를 변기에 버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양변기가 대중화되고 전용 화장지 사용이 권장되는 분위기가 조성되며 휴지 외 대체품의 사용은 줄어들었지만 휴지를 변기에 버리는 습관은 한동안 계속됐다. 문제는 지금과 다르게 당시의 휴지는 물에 쉽게 녹지 않았고 그 양을 소화하기에 수압 역시 낮았다는 점이다. 오물 처리 기술 또한 뒤떨어져 변기 고장도 잦았다. ‘화장지를 변기에 넣으면 변기도 울고 주인도 운다’는 명언 속에서 불편함을 느낀 이들은 휴지를 휴지통에 버리기 시작했고 그 결과 한국 화장실에는 휴지통이 터줏대감처럼 자리하게 됐다.
그렇다면 휴지는 어떻게 버려야 할까. ‘휴지는 변기 속에 버리는 것’이 범세계적인 흐름이다. 미용 티슈(갑 티슈), 키친타월, 물티슈 등 두께감이 있는 휴지가 아니라면 문제가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변기를 막는 주범은 쓰레기와 비양심적인 행동이지 휴지가 아니다.
한국인들은 흰색의 휴지를 선호하는 편이나 최근에는 팬데믹과 가치소비 분위기가 반영되며 친환경 제품들이 인기다. 사진은 일명 ‘김건희 휴지’로 입소문난 레노바의 제품. |
지난 5월, 윤석열 대통령의 배우자인 김건희 여사의 일상 사진이 공개됐다. 덩달아 주목받은 것은 사진 하단에 살짝 모습을 드러낸 휴지였다. “1롤에 7만원이나 하는” 고가 제품으로 오해를 샀지만 이는 직구 사이트에 올라온 가격에서 비롯된 해프닝으로 밝혀졌다. 해당 휴지는 유럽 포르투갈에 본사를 두고 있는 레노버 제품으로, 국내 수입원 홈페이지에서는 개당 2000원꼴에 판매되고 있다.
이 휴지가 ‘뜨거운 감자’가 된 데에는 ‘원색의 컬러’도 한몫했다. 통상적으로 화장지 제조업체들은 목재 펄프를 과산화수소와 염소로 표백해 휴지를 희게 만든다. 표백 과정은 미적인 이유 외에도 펄프의 목질소 성분을 제거해 지질을 부드럽게 하는 효과가 있다. 다만 처음부터 흰색만을 지향한 것은 아니다. 자료에 따르면 초창기 유럽의 휴지는 화장실 인테리어에 따라 형형색색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염료에 대한 규제가 엄격해지면서 색상을 첨가한 휴지들이 자취를 감췄다.
한국의 경우에는 ‘소비자의 선호도’가 지금의 휴지 색상을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화장지 제조업체 관계자는 “한국에서 유난히 강조되는 휴지의 덕목 중 하나가 깨끗함”이라며 “국내 소비자들에게는 ‘깨끗함=흰색’이라는 인식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통계상으로도 타 색상보다 흰색의 휴지가 압도적으로 많이 판매됐다. 제조업체 입장에선 생산비용이 절감되니 굳이 화려한 색의 휴지를 만들 필요가 없었던 셈”이라고 귀띔했다.
제로웨이스트 활동가 박정문씨의 의견도 비슷하다. 박씨는 “청소용 화학약품에 의존해 공간을 깨끗하게 하는 서구의 문화와 달리 한국인들은 신체 또는 신체와 맞닿는 물건의 위생에 더욱 신경을 쓰는 것 같다”며 “크라프트지와 비슷하게 황토색을 띠고 있는 재생휴지를 두고 몇몇 사람들은 주요 부위에 닿는 만큼 재활용 제품이 꺼림직하다며 거부감을 보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1994년 3월 24일 경향신문에 실린 비데 광고 |
다 같은 휴지가 아니다
한국인들에게 추앙받는 휴지엔 공통점이 있다. 고급스러움이다. ‘잘풀리는집’ 브랜드를 운영하는 ‘미래생활’이 두루마리 화장지 구매고객 1000명을 대상으로 ‘화장지 구매 트렌드’를 조사한 결과 ‘30롤·3겹’ 제품을 선호하는 이들이 58.7%로 압도적으로 높았다. 유현석 마케팅 전문가는 “보통 휴지를 소비자가 별다른 고민 없이 구매하는 저관여 제품으로 분류하지만 이 역시 선입견”이라며 “한국인들은 가격 외에도 휴지의 겹수(도톰함), 향, 롤폭(크기), 닦임 정도 등 다양한 방법으로 프리미엄 휴지를 평가한다”고 설명했다.
비데, 비데용 물티슈 시장이 강세를 보이는 것도 고급 휴지를 찾는 이들의 행보와 같은 맥락이다. ‘화장지로만 닦다 보면 주름진 항문의 잔여물을 깨끗하게 씻을 수 없다’는 연구 결과들이 대두되며 국내 비데 시장 규모는 5000억원 이상으로 성장했다. 보급률 40%의 ‘비데 강국’답게 좌욕부터 어린이 전용, 자동 버블까지 각종 기능을 부각한 제품이 쏟아지고 있다.
흥미로운 지점은 또 있다. “비데 시장이 커지며 휴지 사용이 줄어들 것”이라는 업계의 예측과 달리 국내 휴지 시장은 비데 시장과 동반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권해형 항문외과 전문의는 “한국인들은 손 세정 후 수건에 물기를 닦아내는 것처럼 비데 세정 후 휴지로 한 번 더 닦아내야 안심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유한킴벌리가 조사한 ‘2021 두루마리 화장지 U&A 결과 보고서’에서도 “대부분의 소비자가 2~3단계 내에서 용변 처리를 하며 소변 처리 시에는 두루마리 화장지만으로 처리하는 비율이 41%로 비교적 높은 반면 대변 또는 생리 처리 시에는 1차 화장지 사용 후 물티슈·물로 닦거나 비데를 추가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외출 중에도 깨끗하게 뒤처리를 할 수 있는 ‘비데 대용 물티슈’도 판매중이다. 유한킴벌리 제공 |
타인과 공유되는 공공화장실에 설치된 비데는 깨끗하지 않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은 외출 중에도 깨끗하게 뒤처리를 할 수 있는 ‘비데 대용 물티슈’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하수 처리 공정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이유로 사용 자제를 촉구하지만 제조업체는 “비데 물티슈는 변기물을 내릴 때 발생하는 수압과 물의 마찰력으로 인해 원단이 잘게 쪼개져 하수 처리 과정에서 미생물로 생분해가 되도록 했다”고 반박한다. 비데용 물티슈의 권장 사용량은 1~2장이다.
‘친환경’은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감이 조성된 팬데믹과 가치소비 분위기가 반영되며 급부상한 휴지의 덕목이다. 업계에 따르면 향과 색상이 모두 없는 제품에 대한 선호 비율이 지속 상승하고 있다. 신세계인터내셔날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자주’가 출시한 대나무 화장지와 키친타월은 출시 한 달 만에 입소문을 타면서 5만개 이상 판매됐다. 유한킴벌리와 모나리자, 깨끗한나라 등 주요 기업들 역시 이런 흐름에 맞춰 제품 품질과 친환경성을 높인 프리미엄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업계는 개당 평균 500~700원 정도 일반 제품보다 비싸지만 주요 소비층으로 떠오른 MZ세대가 친환경 제품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는 만큼 지속적으로 ‘착한 소비’를 독려하겠다는 방침이다.
김지윤 기자 jun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