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때 와이파이 끄는 스위스인들 “5G 도입은 인권침해 범죄”
슬기로운 전자파 생활
스위스·독일의 인식
5G 기지국, 정부 기준 넘어 이슈
수도 베른 등 곳곳서 반대 시위
일부 주, 시민 요구로 설치 연기
‘기지국 반경 400m 거주민 동의’
전자파 노출 규제 강화 청원도
“과학·재정적 허용 범위 안에서
국민들 전자파 최소 노출이 목표”
학교·병원 등 정기적 측정해 알려
전문가단체 연구결과 지속 공개
알권리 보장·과학적 자료 축적
의사들, 업계 눈치보는 정부 비판
기준치 강화·5G 도입 중단 요구
전자파 노출 ‘번아웃 증세’도 연구
국제 심포지엄 등 학술 연구 활발
주민들과 5G 위해성 토론회도
“5G 안테나 설치 반대” 지난 9월21일(현지시간) 스위스 베른에 있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5세대(5G) 안테나 설치 반대 집회에서 한 참석자가 5G 도입에 반대하는 푯말을 들고 있다. 베른 | AFP연합뉴스 |
전자파, 유해화학물질·방사선처럼 여겨
스위스 투어가우주에 사는 테오 마이어의 하루 일과는 휴대전화를 비행기 모드로 바꾸고, 와이파이가 꺼졌는지 확인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시중에서 파는 전자파 차폐막이 쓸모없다는 것을 몰랐던 몇 년 전까지 그는 와이파이 공유기를 차폐막으로 덮어놓은 뒤 잠을 자곤 했다. 지난 9월5일 스위스 수도 베른에서 만난 마이어는 “의사들로부터 인체가 회복되는 수면 시간만이라도 와이파이를 꺼놓는 게 바람직하다는 얘기를 들은 뒤 보통 자정부터 오전 6시까지는 타이머를 설정해 와이파이를 끄곤 한다”며 “휴대전화도 잠잘 때뿐 아니라 필요가 없을 때는 대체로 비행기 모드로 해놓는 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스위스 사람들은 특히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기 때문에 전자파에도 주의를 기울이는 이가 많다”며 “주변에서도 절반가량은 잘 때 와이파이를 끄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 9월 초 찾은 스위스에서 만난 시민들은 대체로 전자파에 대한 경계심이 높았다. 생활편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용하긴 하지만 유해화학물질이나 방사선과 마찬가지로 전자파 역시 될 수 있는 한 노출을 줄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태도였다. 마이어는 “스위스 시민들은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건강에 신경을 더 쓰는 편이고, 건강에 해로운 오염물질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향이다보니 전자파에도 신경을 더 많이 쓰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5월과 9월 스위스 곳곳에서 열린 5G 반대 시위는 스위스 시민들의 전자파에 대한 생각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9월21일 베른의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3000명이 넘는 스위스 시민이 모여 5G 기지국 설치 반대 집회를 열었다. 이날 집회는 5G 설치에 반대하는 주제로 이뤄지고 있는 시민들의 단체행동 중 세계적으로 가장 큰 규모였다. 이탈리아나 독일 등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도 같은 주제로 집회가 열린 적이 있지만 참가 인원은 수십명에서 수백명 수준에 불과했다. 그만큼 많은 스위스 시민들이 5G 기지국 설치 반대 주장에 공감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날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은 5G 기지국의 전자파가 기존의 이동통신 기지국보다 인체와 환경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5G 도입은 인권 침해 범죄”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과학적으로 안전성이 규명되기 전까지 5G 도입을 전면 중단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집회를 주도한 시민단체와 의사단체 등은 5G 기지국 설치 중단을 위해 국민투표도 추진하고 있다. 스위스에서는 10만명 이상의 서명을 받으면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 스위스에는 지난 9월 현재 334개의 5G 기지국이 설치돼 있으며 일부 주에선 시민들의 요구로 기지국 설치가 연기된 상태다.
스위스 시민들의 5G 기술 도입에 대한 부정적 여론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스위스의 한 온라인 시장조사 사이트가 지난해 5월과 지난 5월 조사한 5G 도입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해는 긍정적 입장 78%, 부정적 입장 22%였다. 그러나 올해에는 긍정적 입장 56%, 부정적 입장 44%로 부정적 입장이 배로 늘었다.
5G 도입에 반대하는 이들은 이동통신과 전자파 노출에 대해 현재보다 강화된 규제를 만들어야 한다며 서명운동에 돌입한 상태다. 내년 4월15일 서명운동이 마감되는 국민청원에는 대중교통에 5G 무선장비가 설치되지 않은 좌석을 마련하고, 공공건물에 전자파에 노출되지 않는 공간을 만드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또 전자파 과민증을 겪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무료 상담센터를 만들고 이동통신 기지국 등을 설치할 때 반경 400m 이내에 거주하는 시민들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 등도 담겨있다.
시장·시의원·시민 참석한 5G 토론회 지난달 18일(현지시간)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시장, 시의원, 시민 등이 참석해 5G 기술의 인체 위해성 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독일 환경소비자보호단체 디아그노즈풍크 제공 |
스위스, 매우 엄격한 수준의 기준 정해
스위스 시민들의 전자파에 대한 높은 경계심은 스위스 정부가 매우 엄격한 수준의 전자파 노출 관련 기준치를 설정하고, 전자파 관련 정보들을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만들었다. 스위스 정부가 생활방해 규제기준에서 정해놓은 전자파 노출 제한치는 국제비전리방사선방호위원회(ICNIRP)가 정한 노출 제한치인 41~61V/m(전기의 힘이 미치는 공간을 뜻하는 ‘전계’ 세기의 단위)의 10분의 1가량인 4~6V/m이다. 스위스보다 높은 제한치를 적용하고 있는 나라는 룩셈부르크(3V/m)와 벨기에(3~6V/m) 정도다. 이 수치는 주로 이동통신 기지국 등의 전자파 발생 기준치로 사용되며 한국과 독일 등은 ICNIRP가 정한 제한치와 같은 기준치를 적용하고 있다.
이처럼 강한 기준치를 적용하는 것에 대해 스위스 정부는 과학적으로 전자파의 유해성이 완전히 규명되지 않은 상태지만 사전예방적 차원에서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한다. 미래에 과학적으로 전자파의 유해성이 규명될지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굳이 유해 가능성이 있는 대상에 노출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지난 9월6일 베른 교외 스위스연방환경청 청사에서 만난 알렉산더 라이헨바흐 과학담당자(왼쪽 사진)는 “스위스 환경보호법은 최첨단 기술과 운영조건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재정적 지원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시민들이 가장 적게 전자파에 노출되도록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기준은 사람들이 단기간이라도 머무는 모든 건물과 시설에 적용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스위스 정부는 전자파를 물이나 대기, 토양을 오염시키는 물질들처럼 환경 측면에서 관리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고, 시민들이 최소한으로 노출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강조했다.
스위스 각 지자체들은 학교와 유치원, 병원 등의 공공시설, 고압 송전탑 주변 등의 전자파 노출 현황을 정기적으로 측정해 홈페이지에서 공개하고 있다. 수질오염, 대기오염물질 농도를 측정해 공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국 지자체들이 전자파와 관련해 아무런 제한 조치 기능을 갖고 있지 않은 것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다만 스위스 정부는 5G에 대해서는 아직 신중한 입장이다. 시민들은 물론 전문가들도 의견이 엇갈리는 만큼 과학적 연구결과들을 더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다.
스위스 정부는 시민들의 알권리를 보장하는 동시에 전자파에 대한 과학적 자료들을 축적하기 위해 전자파 관련 전문가들로 이뤄진 ‘베레니스’(BERENIS)를 구성하고, 이들을 통해 전 세계의 전자파 관련 연구결과들을 시민들에게 정기적으로 알리고 있다. 베레니스는 ‘스위스 전자파 및 비전리방사선 전문가 위원회’의 독일어 철자에서 앞글자를 따온 이름이다. 베레니스는 2~3개월마다 전 세계에서 발표된 전자파 관련 연구들을 분석해 시민들이 알 필요가 있는 연구결과들을 동물실험 및 세포실험, 임상실험, 역학연구 등 항목으로 분류해 공개하고 있다. 예컨대 지난 9월 베레니스가 발표한 보고서에는 2018년 11월부터 2019년 2월 사이 전 세계에서 발표된 전자파 관련 연구결과 83개 가운데 심층 토론을 거친 9개의 연구결과가 소개돼 있다.
베레니스에서 활동 중인 스위스 열대 및 공공보건연구소(TPH) 마틴 뢰슬리 박사(오른쪽)는 베른에 있는 연구실에서 기자와 만나 “베레니스 같은 위원회가 존재하고 관련 정보를 계속 공개하는 것은 스위스 정부가 그만큼 전자파에 대해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5G 기지국은 스위스의 전자파 기준을 넘어서는 전자파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베레니스의 활동을 포함한 스위스 정부의 투명한 정보 공개는 시민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정보를 쉽게 얻는 것에 도움이 되고 있다. 예를 들어 스위스 시민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 와이파이를 끄는 것은 스위스 정부의 전자파 관련 전문가위원회가 시민들에게 권고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스위스뿐 아니라 네덜란드, 독일, 스웨덴 등 유럽의 여러 나라 정부들은 베레니스와 비슷한 조직을 구성해 시민들에게 전자파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스위스 정부는 일찌감치 2005년 펴낸 <환경 속의 전자스모그(Electrosmg)>라는 책자에서 시민들에게 전자스모그의 정의, 전자스모그의 건강영향, 각종 전자파 발생원 및 노출을 줄이는 방법 등을 알리기도 했다.
독일, 전자파 노출 제한치 한국과 비슷
유럽이라고 해서 모든 나라가 스위스와 비슷한 수준의 기준치를 설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유럽 내에서도 환경 측면에서 앞서가는 나라로 평가받는 독일의 경우 한국과 마찬가지로 ICNIRP가 정한 41~61V/m라는 전자파 노출 제한치를 설정해 놓고 있다. 독일은 5G에 대해서는 유럽 내에서도 적극적으로 도입을 추진 중인 편에 속한다. 이로 인해 독일 내에서는 정부의 전자파 기준치에 반대하는 이들, 특히 의사들이 독일 정부가 관련업계의 눈치를 보면서 지나치게 높은 기준치를 설정해 놓고 있다며 정부에 기준치를 강화할 것과 5G 도입을 중단할 것 등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특히 ‘환경의사’라고 불리는 그룹에 포함된 의사들은 전자파로 인한 ‘번아웃’ 증상을 보이는 시민들의 사례 등 과학적 근거들을 연구해 발표하고 있다. 번아웃 증세란 다른 원인 없이 전자파 노출로 인해 불면증, 무기력증, 두통, 만성 피로, 불안 증세, 우울증 등의 증세를 보이는 것을 말한다. 이들은 와이파이와 휴대전화 라디오파 등에 상시적으로 노출되는 환경에서 심각한 번아웃 증상을 겪던 사람이 전자파에 전혀 노출되지 않도록 환경을 바꾸자 번아웃 증세가 완전히 사라진 사례 등을 수집해 전자파와 번아웃 간 연관성을 연구하고 있다. 하지만 독일 정부는 아직까지 이런 연구결과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지난 9월 초 독일 프랑크푸르트와 프라이부르크 등에서 만난 독일 의사들은 번아웃 증세를 치료하면서 자신들도 전자파에 최대한 노출되지 않으려 노력하게 됐다고 소개했다. 프라이부르크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볼프 베르크만 박사는 진료실에 들어오기 전 환자에게 휴대전화를 끄도록 한다. 사무실에서는 랜선을 이용해 인터넷을 사용하고, 마우스 역시 유선 방식으로 쓴다. 그는 “유선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기들을 굳이 무선으로 쓰면서 불필요하게 전자파에 노출될 필요가 없다”며 “번아웃 증상을 겪는 환자들에게도 무선 기기를 줄일 것을 권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프랑크푸르트 교외에서 번아웃 환자들을 돌보고 있는 발트만 젤잠 박사는 아예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인근 프랑크푸르트 등 주변 대도시에 왕진을 갈 경우에도 와이파이가 없는 환경에서 환자와 상담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레브레트 폰 클리칭 박사는 와이파이는 물론 아예 휴대전화조차 먹통인 비젠탈 지역에 진료소를 차리고, 번아웃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비젠탈은 철도가 발달한 독일 내에서도 드물게 어떤 기차역으로부터도 1시간 이상 차로 가야 하는 거리에 있다.
독일에서는 학술적인 연구 역시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지난 10월 초 독일 마인츠에서 열린 국제전자파학술심포지엄에서는 전자파의 인체 위해성은 물론 전자파가 곤충이나 식물 등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한 연구결과들도 발표됐다. 최근 유럽의 환경 수도로 불리는 프라이부르크에서는 시장과 시의회, 주민 900여명이 참석해 5G 도입 여부에 대한 토론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달에는 독일 정부가 주최하는 전자파 관련 국제학술대회도 열린다. 젤잠 박사는 “많은 의사들이 연구를 통해 전자파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를 내놓고 있다”며 “독일 정부를 포함한 각국 정부들은 경고를 받아들여 전자파 기준치를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취재 지원: 언론진흥재단
베른·프랑크푸르트 | 김기범 기자 holjja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