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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만든 예술, 세월이 다진 걸작…강원 고성 지질명소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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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285m 야트막한 운봉산, 잿빛 현무암 뒤덮인 모습에 감탄이 절로…1시간 남짓 산행으로 봉포항·속초까지 동해안 전망 한눈에


‘영험하다’ 소문난 송지호해변 남쪽 서낭바위, 근처엔 버섯·오리 혹은 문어 같은 부채바위…지척인 문암해변엔 암석에 큰 구멍 뻥뻥 뚫린 능파대


동해안 최북단에 자리 잡은 고성은 산과 호수, 바다를 모두 즐길 수 있는 천혜의 관광지다. 취향대로 목적지를 고르면 되는데 한 가지 선택지가 더 있다. 국가지질공원이다. 강원도에서 비무장지대(DMZ)와 인접한 철원·화천·양구·인제·고성 5개 군에는 2014년 ‘강원평화지역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된 21개 지질명소가 있다. 그중 고성엔 화진포와 운봉산 현무암 지대, 송지호해변 서낭바위, 능파대 등 네 곳이 포함된다. 북쪽에 치우친 화진포를 제외하면 모두 차로 10~20분 거리에 몰려 있어 하루에도 여유있게 둘러볼 수 있다. 수십만에서 수천만년에 걸쳐 자연이 조탁한 풍광은 사철 언제 찾아도 조용한 감동을 안긴다.


■ 수백만년 전 만들어진 풍경


고성군 토성면 운봉산은 해발 285m의 야트막한 산이다. 멀리서 보면 제주 오름처럼 아담하다. 꼭대기가 펑퍼짐한 오름과 달리 정상부가 뾰족하게 솟은 모양이 다르다. 오름이 화산활동의 결과물인 것처럼 운봉산에도 용암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운봉산을 오르는 길은 셋으로 나뉜다. 차를 몰고 용천사까지 올라가 등산을 시작해도 되고 운봉리 마을 쪽 미륵암에서 출발할 수도 있다. 산 중턱에 너덜(돌이 많이 흩어져 있는 비탈)지대를 형성한 현무암을 관찰하려면 22사단 부대 정문에서 올라가는 길이 가파르지만 가장 빠르다. 정돈된 등산로를 10여분 오르면 오른쪽으로 샛길이 나오고 곧 거대한 너덜과 만나게 된다.


중턱부터 정상부까지 잿빛 바윗덩어리들이 온통 산을 뒤덮은 모습에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바위는 모두 용암 분출로 생성된 알칼리성 현무암이다. 이렇게 수많은 암석 덩어리들이 사면의 경사 방향 또는 골짜기를 따라 흘러내리는 듯한 모양으로 쌓인 지형을 암괴류(岩塊流)라고 한다. 산간지역에서 암괴류는 흔히 볼 수 있지만 현무암으로만 이뤄진 것은 극히 드물다. 운봉산엔 현무암 암괴류가 세 곳에 분포해 있다.


운봉산 암괴류는 약 720만~750만년 전(신생대 제3기)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현무암 주상절리가 빙하기를 거치며 얼고 녹기를 반복하다 부서진 흔적이다. 길쭉한 연필심이나 크레파스를 동강낸 것처럼 뭉텅뭉텅 잘려나간 돌덩이들은 제주에서 본 현무암과 달리 표면에 구멍이 적고 돌 무게도 훨씬 무겁다. 생경한 풍경에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다 뒤를 돌아보면 첩첩산중 너머 설악산 울산바위가 아스라이 펼쳐진다. 운봉산은 인근 주민들이 신성시하는 공간이다. 예부터 영험한 산이라 여겨 용천사와 미륵암 등 사찰이 들어섰고, 남근석에는 자식을 바라고 치성 드리러 오는 이들의 발길이 지금도 이어진다.


너덜지대를 지나 위로 올라갈수록 경사가 가팔라진다. 등산로에 설치된 밧줄을 부여잡고 산행을 하는데 바닥이 흙길에서 바윗덩이로 바뀐다. 자칫 발을 헛디디거나 물건을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빠져나오기가 쉽잖아 보인다. 정상 부근에 다다르니 거북이 등처럼 육각형 돌덩이가 밀집한 주상절리 머리 부분이 땅 위로 노출된 모습이 눈에 띈다. 밑으로 얼마나 깊게 뻗었을지 가늠할 수도 없다. 현무암 성분이 지하 160㎞에서 형성된 마그마와 동일하다는 분석 결과로 상상해볼 뿐이다.


평평한 둔덕을 이룬 운봉산 꼭대기엔 작은 헬기장과 정상 표지석이 있다. 앞으로는 너른 들판이 바다를 만날 때까지 거침없이 쭉 뻗어나간 모습이다. 북쪽 가진항에서부터 시작해 송지호와 죽도, 오호항, 삼포해변, 문암해변이 이어지다 남쪽 끝으로 봉포항과 속초 시내의 고층 건물들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동해안 전망은 1시간 남짓한 산행으로 즐기기에 미안할 정도다.


■ 파도를 능가하는 돌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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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핑족들에게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송지호해변 남쪽에는 서낭바위가 있다. 이곳 역시 인근 오호리 주민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장소다. 마을의 수호신을 모셔놓은 서낭당 근처에 예사롭지 않게 생긴 바위가 있어 서낭바위라 이름 붙이고 서낭당에서 하듯 제물을 바치고 기도를 드려온 곳이다.


서낭바위 주변은 그동안 군사시설에 포함돼 접근이 어려웠다. 영험하다는 소문에 무속인들이 몰래 들어가 치성을 올리고 도망치듯 빠져나오곤 했는데,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된 뒤 2017년 나무데크로 산책로를 깔끔하게 정돈했다. 산책로 끝에서 해변으로 내려가면 조약돌 여남은 개를 이고 선 바위가 먼저 보인다. 운수바위다. 비스듬히 선 화강암 바위 표면에 자갈을 올려 떨어지지 않고 딱 붙으면 운수대통이라 여긴다고 한다.


서낭바위는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 속으로 마그마가 뚫고 들어와 형성된 암맥이 겉으로 드러나보이는 독특한 형태다. 회백색의 화강암 사이로 관입해 식어버린 돌은 옅은 갈색의 규장암이다. 규장암의 생성 연대는 8300만년 전으로 추정된다. 규장암층은 뱀 꼬리처럼 바닷가 백사장까지 길게 이어져 있다. 멀리서 보면 커다란 햄버거나 샌드위치처럼 보이는 바위 틈바구니엔 누군가 기도를 올린 듯 막대사탕 여러 개가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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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낭바위 근처엔 보는 방향에 따라 버섯, 오리, 문어 등 다양한 모양으로 보이는 부채바위가 있다. 차별침식으로 머리 부분이 넓적하고 허리 부분이 잘록하게 깎인 바위인데, 쓰러질 듯 아슬아슬한 허리 부분을 시멘트로 보강한 흔적이 눈에 거슬렸다. “바위가 쓰러지면 마을에 액운이 닥칠까 봐 주민들이 그런 거예요. 억척스러운 환경에서 작은 미신에라도 의존하고 싶은 어촌 사람들 마음이라고 이해해주세요.” 인근 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임한 고성 토박이이자 지질공원 해설사인 김춘만씨(66)의 설명에 더는 말을 보태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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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호에서 지척인 문암해변엔 타포니(tafoni) 지형을 관찰할 수 있는 능파대가 있다. 타포니는 염풍화작용으로 암석에 동굴처럼 구멍이 뻥뻥 뚫린 지형을 말한다. 멀리서 보면 벌집처럼 보이기도 하고 골다공증 바위라고 불리기도 한다. 오랜 세월 동안 바닷물의 염분이 화강암의 틈에 스며들어가 바윗덩어리를 부스러뜨려 만든 풍화혈이 바로 타포니고, 그루브(groove·암석 측면에 긴 고랑처럼 발달한 지형)다. 능파대에선 잘 발달된 타포니와 그루브를 모두 발견할 수 있다.


능파대는 원래 섬이었다가 문암천에서 흘러내린 모래가 쌓이면서 육지와 이어진 육계도(陸繫島)가 됐다. ‘파도를 능가하는 돌섬’이라는 이름처럼, 시원하게 포말이 부서지는 바윗가 풍경이 박력 있으면서도 쓸쓸하다. 문암 바닷속은 색색의 산호초가 빚어낸 절경 덕에 전국의 스쿠버다이버가 몰리는 곳이기도 하다.


고성 | 글·사진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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