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스스로 성장, 단편 근육으론 장편 쓸 수 없어”
미국에 억대 판권으로 출간, 해외에서 주목받고 있는 스릴러 소설 <설계자들> 을 쓴 소설가 김언수를 지난 19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김언수는 “단편을 쓰는 근육으로는 장편 소설을 쓸 수 없다”며 “소설쓰기는 농부가 감자를 키우는 일과 같다. 이야기는 자기 생명력을 갖고 있다. 소설가는 이야기가 자라는 걸 잘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근 선임기자 |
“솔직하게 말하면 기쁘고 다행이죠. 하지만 그 다음에 이런 일은 아주 안 좋을 수 있죠. 소설 쓰는 것 자체가 재미있어야지 보상을 기뻐하면 놀랍게도 소설을 쓰는 게 지옥이 됩니다. 소설 쓰는 게 지옥이 되면 소설의 질이 떨어지고 그럼 진짜 통장에서 지옥이 탄생하죠.”
작품이 미국·영국·독일 등 해외 24개국에 판권이 팔리고 뉴욕타임스·가디언 등 유명 외신이 서평을 게재하며 세계적 주목을 받는 순간, 작가의 입에서는 ‘지옥’이란 단어가 나왔다.
김언수(47)는 지금 해외에서 뜨거운 작가다. 2010년 펴낸 장편소설 <설계자들>(문학동네)이 최근 미국·영국 등에서 출간되며 화제를 모았다. 미국엔 펭귄랜덤하우스의 자회사 더블데이에 억대 판권료로 판매됐다. 뉴욕타임스는 “지성과 유머가 돋보인다”며 ‘겨울 최고 스릴러’ 6권 가운데 하나로 <설계자들> 선정했고, 영국 가디언은 “유머와 폭력을 적절히 버무리고, 현명함마저 보인다”고 평했다. <설계자들>은 최근 노르웨이, 네덜란드에 추가로 판권이 팔리며 총 24개국으로 수출됐다. 프랑스에선 2016년 추리문학대상 후보에 올랐고, 그의 책이 다른 작가와 협업한 선집까지 포함해 총 6권이나 출간됐다. 이쯤되면 작가의 입꼬리가 높이 올라갈 만하다. 그런데 난데없이 ‘지옥’이라니.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제가 바다에 있었어요. 6개월 동안 원양어선을 타고 있었죠. 별로 의미를 두지 않으려 해요. 삶의 ‘쿠세’(나쁜 습관을 의미하는 당구용어)는 작은 성공에서 발생합니다. 이제서야 소설을 써볼만한 자세가 된 것 같아요.”
지난 19일 서울 마포구 합정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언수가 답했다. 김언수는 2002년 등단, 2006년 장편소설 <캐비닛>이 문학동네소설상을 타면서 주목받았다. 하지만 <설계자들>이 성공을 거두기까지 작가로서 길고도 외로운 시간을 보냈다. 실제 ‘소설의 지옥’과 ‘통장의 지옥’을 모두 경험했다. 서른 살 때부터 갚기 시작한 빚을 2016년 장편소설 <뜨거운 피>의 영화 판권이 팔리고서야 다 갚았다.
김언수는 장르성이 강한 장편소설을 선보인다. <설계자들>이 암살자 배후에 권력과 부에 편승한 설계자들의 세계를 그린다면, 2016년 펴낸 <뜨거운 피>는 조직폭력배의 이야기를 다룬다. 범죄영화가 연상되는 소설은 모두 영화 판권이 팔렸다. <설계자들>은 <8월의 크리스마스>를 만든 허진호 감독이 영화로 제작할 예정이다.
소설가 김언수. 김정근 선임기자 |
“소설은 이야기를 가질 때 힘을 가질 가질 수 있는 장르에요. 해리 포터 수출액이 한국 반도체 수출액보다 더 많아요. 이야기산업은 점점 비대해지고 이야기에 굶주려 있는데, 정작 소설가들은 가난하죠. 넷플릭스는 21세기의 셰익스피어에요. <하우스 오브 카드> 등 미드를 보면 온갖 인간 군상이 등장하고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있죠. 소설은 1인 노동자가 언어라는 질료로 저렴하게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어요.”
‘이야기꾼’으로서의 소설가의 역할을 강조한 김언수의 이야기는 단편 중심의 한국 문단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한국에선 한창 소설을 쓸 나이에 단편을 쓴다. 단편은 시에 가깝다. 단편은 70매고, 장편은 3000매다. 단편 근육으론 이야기를 못 만든다. 나도 32살 신춘문예로 등단한 뒤 10년 동안 장편소설을 쓰고 버려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어떤 작가는 영화화는 염두에 두지 않고 순수하게 소설을 쓴다고 하는데, 나는 영화만 염두에 두지 않는다. 뮤지컬, 게임,애니메이션 다 염두에 둔다. 이야기꾼이 해야할 일은 이야기의 완전체를 만드는 것이다. <어린왕자>란 판타지 소설은 영화·드라마·뮤지컬로 만들어도 재미있다. 생택쥐페리가 이야기의 코어(핵심)을 줬기 때문이다. 소설가는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지 문장을 아릅답게 쓰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최근 이정명, 정유정 작가 등의 작품이 해외에서 주목받으며 ‘K스릴러’라 불리며 주목받고 있다. 그는 “척박한 환경에서 작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나간 것”이라며 “한국 문학의 내면적 복잡함이 있어서 새롭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해외 장르문학은 플롯의 정교함이나 컨셉의 독특함으로 승부한다면, 정유정 소설의 인물은 내면이 복잡하고 바닥으로 내려간다”고 말했다.
왼쪽부터 <설계자들> 한국판, 미국판, 독일판. |
‘이야기꾼’으로 그의 성공을 불러온 <설계자들>은 총 세 번 쓰여졌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원고는 버려졌다. 포기하려고 했을 때, 문학동네의 제안으로 인터넷 카페에 일일 연재를 시작했다. 매일매일 쓰여진 이야기는 스스로 줄기를 뻗어나갔다. 그는 소설쓰기가 ‘농부가 감자 키우는 일’과 같다고 말한다.
“처음 배웠던 문학이 시에 가까웠다면 서른 살 넘어서 배운 이야기 공학은 건축학에 가까웠어요. 정교한 집을 짓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나중엔 생물에 가까워지더라고요. 농부가 감자를 키우면 감자 스스로 DNA에 따라 성장하고, 농부가 할 일은 3%에 불과하죠. 이야기는 자기생명력을 갖고 있어요. 천명관의 <고래>도 그렇게 나왔어요. 어떻게 썼냐고 물어보면 ‘몰라, 그냥 썼어’라고 말하죠. 그런데 작가가 개입하려고 하면 소설이 망해요. 제일 나쁜 건 독자를 가르치려 드는 거죠.”
다시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자. 그는 왜 6개월간 원양어선을 타고 적도 근처를 떠다녔을까. 그는 초기 원양어선 어부들의 이야기를 다룬 장편소설 <빅아이>를 집필하기 위해 2017년 12월부터 지난해 6월까지 원양어선을 탔다.
“김재철 동원참치 회장이 최초로 원양어선을 타고 선원으로 참치잡이를 시작했어요. 처음 참치를 잡으러 가는데 아무도 참치가 어떻게 생긴지를 몰라서 일본 시모노세키에 들러 어류도감을 사서 봤다고 하더라고요. 1960년대 정부가 외화 확보를 위해 원양어업을 장려하면서 원양어선 어부들이 1000명 넘게 죽었죠. 김 회장이 태평양에서 죽은 초기 원양어선 어부들의 이야기를 써줄 작가를 찾다가 저와 연이 닿았어요. 그래서 원양어선을 타게 됐습니다.”
김언수는 6개월간 일곱 걸음이면 끝나는 작은 배에서 24명의 선원과 함께 부대꼈다. 대구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인 130㎞짜리 낚시줄을 던지고 건져올리면 오후 3시에 시작된 노동이 다음날 아침 9시에야 끝났다. 극한의 육체적 고통 뒤에 어부들은 천진난만하게 기뻐하고 웃었다. 김언수는 “고된 노동을 끝에 강력한 쾌감 찾아오는 것”이라며 “노동과의 화해랄까,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태평양 원양어선에서 태어난 이야기가 이제 싹을 틔웠다. 어떤 줄기를 내 고 뻗어나갈지 지켜볼 차례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