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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깃 여밀 때쯤 만물에 깃드는 단맛…그 시작을 알리는 추석

지극히 味적인 시장(17)

홍성 5일장


식재료 맛없는 여름을 보내고 찰기로 밥맛 되살리는 ‘삼광벼’

장터 칼국수·짜장면·보리밥 “사딸라”도 많은 3천원의 식사

갈산면 장터서 만난 복매운탕, 복어는 거들 뿐…주연은 아욱

경향신문

울긋불긋 색이 달라진 과일 노점을 둘러보며 계절의 변화를 읽는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고 하지만 초가을부터 맛이 드는 과일은 드물다. 농작물에 단맛을 채우는 가을 찬바람이 그래서 반갑다.

24년 동안 산지 출장 다니면서 항상 여름에 힘들었다. 더워서도 아니고, 휴가철 막히는 길 때문도 아니었다. 여름에 나는 식재료가 대부분 맛이 없고 가을이나 겨울만큼 종류도 많지 않아서 그렇다. 여름 대표 음식으로 제철 음식보다는 보양식을 중심으로 소개하는 까닭도 맛있는 게 없으니 보양이라도 하라는 의미다.


올여름에도 어디로 갈지 고민을 했다. 가장 시원한 강원도? 그나마 시원한 경상북도? 고민 끝에 충청남도 홍성을 택했다. 홍성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어디를 가더라도 맛없기가 비슷하다면 익숙한 곳이 낫지 않을까 싶어서다. 유기농 쌀, 친환경 소·돼지 등과 관련한 일 때문에 충남의 홍성 중에서도 홍동에 출장을 많이 다녔다. 많을 때는 한 달에 두세 번씩 갔으니 대충 헤아려봐도 20년 동안 100번은 넘게 오갔을 듯싶다. 오가다 차 문 열고 인사하는 사람도 있으니 출장지라기보다는 홍동은 내게 동네 같은 곳이다.

100년 후가 궁금한 베트남호박

홍성은 유기농특구다. 유기농특구의 중심은 홍동면이다. 전국 최대 규모의 유기농 쌀 재배단지가 홍동에 있다. 홍동농협에서 문당리로 뻗은 길은 두 갈래다. 장곡으로 향하는 길과 둑길 따라 금평리 쪽으로 가는 길이다. 20년 가까이 다니는 길의 모습은 변함이 없지만 재배하는 쌀은 변화가 많았다. 초창기에 많던 추청과 호품 중심의 쌀 품종이 요즘은 삼광과 밀키퀸 등으로 바뀌었다. 수확량보다는 밥맛 중심으로 바뀌었다. 충남의 기후와 잘 맞는 품종인 삼광벼를 유기재배한 까닭에 밥을 지으면 차진 밥맛이 좋다.


여름의 끝과 가을의 시작이 교차하는 8월 말에 가장 맛없는 것이 바로 쌀이다. 해를 넘기고 추위와 더위 그리고 장마까지 견뎌낸 쌀은 벼로 보관을 해도 시나브로 맛이 떨어진다. 좋은 밥맛은 좋은 밥솥에서 나오지 않는다. 좋은 밥맛은 계절에 따라 선택하는 좋은 쌀에서 나온다. 좋은 쌀 고르는 요령은 간단하다. 첫째, 품종을 보고 고른다. 어떤 품종도 상관없다. 혼합미만 아니면 된다. 둘째, 포장 단위를 가급적 작은 단위로 고른다. 쌀은 도정하고 보름이면 밥맛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장마철이면 용량을 더 줄여야 한다. 셋째, 도정 날짜가 빠른 것일수록 좋다. 이 세 가지만 살펴도 같은 돈으로 더 맛있는 쌀을 살 수 있다. 세 가지를 한꺼번에 해결하기 좋은 곳은 지역별 농협이다. 주문하면 당일 도정해주는 곳이 많다. 홍동농협(041-634-8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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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 아니고 늙은 오이도 아닌 ‘베트남호박’

홍성 오일장은 1·6이 낀 날에 상설시장 따라 길게 장이 선다. 시장을 두어 바퀴 돌았을 때 박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늙은 오이도 아닌 것이 눈에 띄었다. 희한해서 다가가 물으니 베트남호박이란다. 문득 호배추가 생각났다. 우리가 김치를 담가 먹는 배추는 청국인들이 인천에 많이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국내에 퍼진 것이다. 속이 꽉 차는 호배추가 들어오기 전 조선 배추는 속이 차지 않고 우거지가 많은 품종이었다. 100여년 사이 조선 배추는 사라지고 호배추가 자리를 잡았다. 청인들이 호배추를 가지고 온 것처럼 호박도 일하러 온 베트남인들이 가지고 온 모양이다. 시장에 있는 베트남호박(동아)은 국내에서 오랫동안 재배한 동아호박과 달리 길쭉하다. 동아호박 색이 베트남호박보다 연하지만 둥근 베개 모양으로 50㎏ 넘는 것이 있을 정도로 큰 호박종이다. 토종이라 일컫는 동아호박의 원산지도 동남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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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콩 닮았다는데 조롱박처럼 보이는 ‘땅콩호박’

베트남호박도 눈에 띄었지만, 오일장 등에서 최근 눈에 자주 띄는 호박이 있다. 땅콩을 닮아서 땅콩호박이라 부른다고 하는데 조롱박처럼 보이지 땅콩처럼 보이지 않는다. 모양이나 이름이 어떻든 굽거나 찌거나 하는 요리에 적합하다. 제주도를 비롯해 전국에서 재배가 늘어나고 있다. 작은 것은 1000원대, 큰 것은 3000원대다. 감자나 고구마처럼 잘게 잘라 에어프라이어에 구워 먹어도 맛있다.

가을바람은 단바람, 겨울바람은 꿀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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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와 애호박의 중간 빛깔…토종 ‘사과참외’

참외의 색은? 질문을 던지면 대부분 노란색이라고 답한다. 푸른 하늘만 하늘색이 아닌 것처럼 참외도 노란색만 있는 것이 아니다. 노란 참외의 시작은 일본이다. 일본에서 육종한 ‘은천’이라는 품종이 국내에 들어오면서 참외 판이 노래졌다. 은천참외가 들어오기 전의 참외는 푸른빛이 도는 오이와 애호박의 중간 정도 색이었다. 대표적인 개구리참외를 비롯해 청참외, 열골참외, 강서참외 등이 있다. 근래에 ‘애플’이란 이름을 붙여 토종이 아닌 척하는 참외도 있는데 토종이 맞다. 멜론참외라고도 하지만 부르는 이름은 사과참외다. 살짝 차갑게 해서 먹으면 맛있다. 경기나 충청권의 시장이나 로컬푸드 판매장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생각해보니 참외도 박과 작물이다. 삼박(珀) 이야기가 길었다.


과일 노점을 보니 계절의 변화가 한눈에 들어왔다. 여름을 보낸 복숭아는 끝물이고, 사과나 배는 첫물이다. 첫물은 과일 좌판뿐 아니라 수산물 노점에도 있었다. 올봄 암게 1㎏이 5만~6만원이었는데 가을 첫물 수게는 1만원 언저리다. 아직은 덜 여문 수게다. 뜨거운 바람이 찬 바람으로 바뀌면 만물에 단맛이 깃든다. 간혹 그런 생각을 한다. 가을바람은 단바람, 그 바람에 가을것들이 달다고 말이다. 겨울바람은? 꿀바람이다. 가을 하면 떠오르는 것들은 옷깃을 여밀 때 제철 시작이다.


장 구경을 하면서 “4달러” 외치는 햄버거 프랜차이즈 광고가 생각났다. 홍성장에서는 4달러도 많다. 3달러면 된다. 3000원이면 선택할 수 있는 메뉴가 칼국수, 짜장면, 보리밥이다. 홍성 오일장의 매력이다. 다른 오일장과 달리 상설시장 곳곳에 식당들이 있다. “혼자요” 하고 자리에 앉으니 이내 밥이 나온다. 메뉴가 보리밥 한 가지다. 보리밥 위에 몇 가지 나물을 가득 올렸다. 찬이라고 해봐야 열무김치와 우거지된장국이 전부다. 식탁 위에 놓인 참기름과 고추장을 넣고 비비면 된다. 무채 볶은 것, 무채 무친 것, 고춧잎 무친 나물에 고추장과 참기름 넣고 쓱쓱 비비면 맛있는 비빔밥이 된다. 잘 익은 열무김치를 올리는 순간 전국 최고의 보리비빔밥이 내 입속으로 들어온다. 3000원 보리밥보다 조금 더 비싼 것을 선택한다면 5000원 한우 소머리국밥을 추천한다. 돼지 족이 실하게 들어 있는 족탕도 비싸야 7000원이다. 홍성은 예전부터 축산업도 같이 발달한 곳으로 전국에서 소를 가장 많이 사육한다. 소 부산물을 비롯해 한우를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곳 또한 홍성이다. 면 단위마다 축산물판매장과 한우타운이 있을 정도다.


안개천지. 식당 이름이다. 무엇을 파는 곳인지 이름만 봐서는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전혀 상상이 안된다. 한우 파는 고깃집이다. 15년 전 처음 고기 먹으러 갔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골목 안쪽의 허름한 식당에서 고기를 먹을 때는 왜 이름이 안개천지일까가 궁금하지 않았다. 실비집 분위기라 식당 이름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고추장, 마늘, 참기름 조합의 육장이 아닌 고추장아찌 비슷한 양념에 찍어 먹는 육회도 특별했거니와 가격 또한 저렴했다. 육회를 다 먹고 나면 그제야 돌판에 고기를 구웠다. 누구나 다 그렇게 먹었었다. 오랜만에 찾았다. 새로운 건물이라 예전의 운치는 사라졌지만, 간판의 이름은 그대로다. 궁금해졌다. 왜 안개천지라고 식당 이름을 붙였는지 말이다. 돈을 빌려 식당 공사를 하던 날 옆집이 안 보일 정도로 아침에 안개가 끼었단다. 끝이다. 간장소스에 찍어 먹는 차진 육회 맛도 이름만큼 여전했다. 안개천지(041-634-0626).

복어를 조연으로 끌어내린 아욱

홍성 나들목을 나와 우회전하면 홍성읍 방향이다. 직진이나 좌회전을 하면 갈산면을 지나 안면도 가는 길이다. 홍성 갈산면에는 이른 아침부터 줄을 서는 집이 있다. 갈산 오일장이 서는 장터에 식당 문이 열리기도 전에 몇 팀씩 대기하고 있을 정도다. 줄 서는 집들은 여러 가지를 하는 경우가 드물다. 이 식당도 딱 한 가지만 한다. 복매운탕. 분명 복이 주인공이지만 먹다 보면 복은 그저 국물 맛있게 하는 국물 멸치와 동급이 된다. 이 집의 매력은 아욱에 있다. 초창기에는 아욱이 무한 리필이었다. 매운탕 국물에 아욱을 데치고 초장에 찍어 먹는 맛에 다니던 곳이다. 지금은 아욱 추가에 비용이 들지만 돈이 전혀 아깝지 않다. 아욱이 이렇게 맛있는 채소였나를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곳이다. 생복어와 마른 복어 중 선택해야 한다. 선수들은 마른 복어를 선택한다. 국물이 더 시원하고 진하다. 삼삼복집(041-633-2145).


홍성하고도 홍동을 좋아한다. ‘풀무’라는 단어에 꽂혔기 때문이다. 쇠를 만져서 도구를 만드는 것이 풀무지만 여기에서 풀무는 정신적인 측면이 더 강하다. 동네에 들어서면 떡공장도 풀무고, 빵집도 풀무고, 학교도 풀무다. 시작은 1958년부터 시작한 풀무학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 홍동에서 유기농이 꽃피운 것도 풀무가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작은 마을 홍동이지만 오랫동안 우리밀로 빵을 굽고 있는 곳이 있다. 지역에서 나는 밀로 빵을 굽다가 최근에는 구례 우리밀로 만들고 있다. 도시의 빵처럼 화려함이나 부드러움은 없어도 차나 커피 한 잔 마시면서 먹다 보면 금세 사라진다. 단팥빵도 맛있지만 구운 감자 고로케도 괜찮다. 맛있는 우리밀 빵을 찾는다면 바로 여기다. 가게에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목장에서 생산한 우유나 요구르트를 같이 먹으면 더 맛있다. 풀무학교 생협 자연의 선물가게(041-633-8948).


추석이 코앞이다. 들판을 바라보면 추석용과 아닌 것이 색으로 갈린다. 고운이나 운광 등 조생종 벼를 심은 논은 벌써 노랗게 물들고 이삭은 고개를 숙였다. 추석이 끝나고 한 달은 있어야 제대로 된 햅쌀이 나온다. 이른 추석으로 인해 올해는 벼뿐만 아니라 차례상에 올라가는 것들은 수확이 빠른 종만 심었다. 추석을 준비하기 위해 출장 다니는 동안 의구심이 쌓였다. 추석이 빠르든 늦든 들판에서 나는 것은 맛이 채 여물지도 않거니와 수확할 수 있는 것이 적었다. 추석마다 듣는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을 누가 처음 했는지 궁금했다. 아무리 봐도 추석에 나오는 농수산물은 추석 이후의 것보다 맛이 없다. 가을에 나는 것들이 죄 한가위 같은 품질이면 욕먹기 십상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추석은 수확의 시작을 알리고, 감사히 여겼던 절기가 아니었나 싶다. 추석상은 간단할수록 좋다. 특히 사과나 배는 냉장고에 보관해도 쉬이 상한다. 아끼면 진짜 똥처럼 물러진다. 여름 취재는 맛없다. 단바람 부는 가을이 온다. “잘 가 여름, 반가워 가을!”


필자 김진영 식품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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