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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엔 화제성 1위 '미친 초서’ 이광사, 후대의 '넘사벽’ 추사에게 욕먹은 까닭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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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사 필 서결>=보물 제1969호, <김정희 필 서원교필결후>=보물 제1982호…. 간송문화재단이 소장한 두 작품은 2018년 나란히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다. 비록 지금은 ‘코로나 19 재유행’으로 관람할 수 없지만 국립중앙박물관이 준비한 ‘새 보물 납시었네’ 특별전의 같은 공간에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매우 어색한 조우다. 왜냐. <서결(書訣)>은 18세기 대표 서예가인 원교 이광사(1705~1777)가 친필로 쓴 서예이론서이다. 하지만 역시 보물로 지정된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서원교필결후(書員嶠筆訣後)>는 제목이 말해주듯 원교(이광사)의 필결(서결의 다른 표현)을 읽은 후 쓴 비판글이다. 그러니까 원교의 서예이론서와, 그 이론서를 ‘기본이 안됐다’고 비판한 추사의 글도 같은 해 나란히 보물이 되어 한자리에 출품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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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지 못한 탓이다”


추사의 비평은 사납기 그지없다. 비평이 아니라 완전히 깔아뭉개고 있다. 원교 이광사는 <서결>에서 ‘언필(偃筆·붓을 뉘어서 쓰는 필법)의 병폐’를 지적했다. 그러나 추사는 이 대목을 문제 삼아 “서예가가 붓 탓을 하면 되겠냐”면서 “가만보니 원교는 붓 잡는 법(용필·用筆)과 먹 쓰는 법(용묵·用墨)도 모른다”고 ‘디스’했다. 하지만 추사의 비판이 도에 지나치다는 소리를 듣는다. 원교의 주장이 나름 타당성이 있기 때문이다.


즉 살아있는 글씨를 쓰려면 붓의 8면을 다 이용하여 수시로 세워가며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언필’, 즉 붓을 뉘어서 쓰게 되면 붓의 한 면만 이용하게 된다. 그렇게 하면 붓이 누운채 진행하게 되는데, 이것은 곧 대빗자루를 뉜 채 마당 쓸 듯이 글씨를 쓰게 된다. 원교는 바로 이러한 ‘언필의 병폐’를 지적했다.


그러나 추사는 원교의 본뜻을 헤아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디스’했다. 그 뿐이 아니다. 그러면서 추사는 “원교가 타고난 재능은 있지만 배움(學)이 없어서 그런 거니 그의 허물은 아니다”라고 꼬집는다. 참으로 심한 표현이다. 18세기를 풍미한 서예가를 두고 ‘배우지 못했다’고 폄훼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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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안 혹리수’ 감상법


하기야 당대 국제적인 석학(추사)의 비평철학은 유명했다. 평소 “서화를 감상하는데는 금강안(金剛眼) 혹리수(酷吏手) 같아야 진가를 가려낼 수 있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사찰을 수호하는 금강역사의 매서운 눈처럼, 그리고 세금을 거두는 세무관리의 혹독한 손끝처럼 치밀해야 서화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추사는 “칠십 평생에 벼루 10개의 밑창이 뚫리도록 먹을 갈았고, 붓 1000자루가 몽땅붓이 되도록 글씨를 썼다”고 자부했다. 추사는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의 난초 그림을 두고 “아무리 9999분까지 이르러도 나머지 1분 만은 원만하게 성취하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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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를 거쳐 왕희지로 가라”


사실 서예에 관한 한 원교와 추사가 가는 길은 다르지 않았다. 둘 다 불세출의 서성으로 추앙받는 왕희지(307~365)·헌지(344~386) 부자의 서법으로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가는 방법이 달랐다.


추사는 그때까지 전래되고 있던 왕희지 부자의 진적(진필)이 거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추사는 “서예가라면 당연히 이왕(二王, 왕희지·헌지 부자)을 준칙으로 삼아야 하지만 확인된 두 사람의 진적은 모두 합해야 100자 정도밖에 안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전래되는 왕희지 부자의 글씨는 무엇인가. 후세 서가들의 위작이거나, 원본으로 삼은 책을 뜯어 목판으로 새긴 번각본일 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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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에는 원교 이광사가 쓴 사찰편액에 많이 남아있다. 해남 대흥사(대둔사)의 침계루(위 사진)와 지리산 천은사 일주문(아래 사진)과 극락보전, 명부전, 고창 선운사의 천왕문 . 강진 백련사의 대웅보전과 만경루 등의 편액이다.

■당나라 거칠 필요없다


그런 입장에서 추사는 원교 이광사를 비롯한 서가들이 헛공부 했다고 여겼다. 즉 추사는 “원교가 평생 익힌 것은 왕희지 부자의 진적이 아니라 북송과 당나라 시대의 위작이거나 필사본일 뿐”이라면서 “마치 썩은 쥐로 봉황새를 위협하는 격(腐鼠하鳳)이니 내가 붓을 놓고 한바탕 웃는다(放筆一笑)”고 비아냥댔다. 만약 추사의 언급이 사실이라면 가짜를 공부한 원교 이광사는 욕먹어도 싸다.


하지만 ‘팩트체크’에 들어간다. 사실 그때까지 전래된 왕희지·헌지 부자의 글씨는 추사 말마따나 태반이 후대의 번각본이거나 위작이었다. 그걸 원교가 몰랐을까. 아니다. 원교 역시 ‘서결’에서 “옛 것을 모방하려면 왕희지의 자취를 따라 공부해야 한다”고 전제했지만 “그러나 좋은 책(선본·善本)이 있어도 여러 번 번각되어 본 모습이 사라졌다”고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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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교 이광사의 대자 행서. 빠른 붓놀림과 글씨의 획에 깃든힘으로 글씨가 살아움직이는 듯한 동감과 흥취가 뛰어난 작품이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또 원교도 추사처럼 왕희지 부자의 (동)진나라로 돌아가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방법이 달랐다. 원교는 당대 서화수장가인 김광수(1699~1770)가 갖고 있던 한(후한)·위나라 시대에 전서와 예서로 새겨진 비석의 탁본을 공부했다. 그러면서 왕희지 부자 시대로 돌아가자면 그때까지 공부해온 왕희지체는 물론이고, 한·위나라 및 그 이전 시대의 전서와 예서로 쓰여진 비석까지 들여다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왕희지체’와 ‘옛 비석’ 학습을 겸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추사와 다른 길을 간다. 원교는 당나라와 그 이후의 글씨에 대해서는 비판일변도를 견지했다. 그러니 당나라를 건너뛸 수밖에 없었다. 추사는 그런 원교를 두고 “문(당나라)을 거치지 않고 곧장 방 아랫목(동진과 한·위)을 밟겠다는 격”(<완당전집>)이라고 앙앙불락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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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계(神界) 넘사벽의 혹평에


하지만 그것은 추사가 원교를 잘못 본 것이 아닐까. 오히려 원교 이광사가 왕희지체를 추구한 기존의 서예가와, 비석과 같은 금석문의 학습을 주장한 추사 등 후대 서예가를 잇는 교량 역할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또 원교의 <서결>이 청나라에서 비학(碑學·비석에 새긴 글씨를 연구하는 학문)을 제기하며 등장한 청나라 완원(1764~1849)보다 40여 년 앞선 서예이론이라는 견해도 있다(이완우의 ‘원교 이광사의 서예’ 논문에서).


설사 추사의 비판이 옳다해도 19세기의 시각으로 18세기를 살았던 선학을 난도질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심한 처사가 아닐까.


그런데 추사가 누구인가. 세상을 떠난지 150여년이 지난 추사지만 지금도 문화·학술계에서 ‘인간계’를 거느리는 ‘신계(神界)’에서 오롯이 자리잡고 있다. 그런 ‘넘사벽’ 인물에게 ‘용필, 용묵도 모르면서 허명만 떨친 인물’로 찍혔으니 어찌 됐겠는가. 추사가 태어나기 9년 전(1777년)에 타계한 원교로서는 무덤 속에서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한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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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교 이광사의 ‘오언시 행서 팔폭 병풍’. 원교의 개성넘치는 행서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파격을 감행했다.|한빛 문화재단 소장

■야인·유배생활 50년 발분의 저작


원교는 결코 그렇게 폄훼될 인물은 아니다. 소론 가문 출신인 원교는 노론의 지지를 업은 영조 등극(1724년) 이후 줄곧 야인으로 지냈다가 1755년(영조 29년) 돌이킬 수 없는 다리를 건넌다. 소론 세력이 주도한 나주 괘서사건(영조 제거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유배형의 처분을 받은 것이다.


이규상(1727~1799)의 <병세재언록>은 “의금부로 끌려온 원교가 하늘을 향해 ‘내게 뛰어난 글씨 솜씨가 있으니 내 목숨을 버리지 말아달라’고 통곡했고, 이를 불쌍하게 여긴 영조가 살려주었다”고 기록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원교의 유배생활은 1777년(정조 1년) 73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23년간 계속됐다.


북쪽 끝 두만강 근처(부령)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한 원교는 곧 남쪽 끝인 전라도 신지도로 옮겨가야 했다. 부령의 지식인들이 몰려와 원교의 가르침을 받자 “죄인의 몸으로 가르치니 역모를 꾀할 수 있다”는 혐의로 ‘절도 이배(絶島移配·유배지를 외딴 섬으로 옮김)’ 처분을 받았기 때문이다.


2018년 보물로 지정된 <서결>은 바로 신지도 유배 시절인 1764~68년 저술했다. 원교는 1777년(정조 1년)까지 귀양지에 머물다가 73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야인으로 30여년, 귀양생활 23년 등 무려 50년여간 비분을 삼키고 토하며 살았던 것이다. 서유구(1764~1845)의 <금화경독기>는 “원교가 유배지에서 행서·초서·해서의 소첩을 만들어 호로병에 담아 물에 띄우며 ‘바다밖 다른 곳에서 내 작품을 볼 수 있게 하라’고 기원했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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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이 노래하고 묵이 춤추는 미친 글씨


그래서일까. 원교는 그 울분을 모두 글씨로 풀었다. 글씨에 원교의 희로애락이 다 표출된다. 예컨대 날고 기는 행초(행서와 초서)는 원교체의 진수이다. 작가의 성정과 기질이 숨김없이 나타난다. 행서(획을 약간 흘려쓰는 서체·해서와 초서의 중간)는 물론이고 해서(정자체)라도 울분을 토해내듯 삐뚤삐뚤하다.


원교의 파격적인 글씨는 당대에도 호불호가 심했던 모양이다. 문신·서예가인 황운조(1730~1800)는 “세상사람들이 원교의 글씨가 경악스럽다고 많이 헐뜯지만 그것은 액운이 많이 쌓인 불편한 심기가 원교의 기이하고 뛰어난 붓 끝에서 울려나온 것”이라고 보았다.(<병세재언록>)


이규상은 “황운조의 분석이 옳다”고 동조하면서 “원교의 글씨는 은갈고리나 쇠줄 같아 용이 날고 호랑이가 뛰는 듯한 기상이 바탕에 있다”고 극찬했다. 이규상은 또 원교의 글씨를 음악에 비유하기도 했다.


“원교는 글씨를 쓸 때 가수를 세워두고 노랫가락이 우조(羽調·웅장한 느낌의 악조)일 때는 글씨도 우조의 분위기로 썼고, 노랫가락이 평조일 때는 글씨도 평조(平調·화평한 느낌의 악조)의 느낌으로 썼다.”


한마디로 원교는 획 하나하나의 음악적 리듬에 자신의 미묘한 감정을 그대로 담아냈던 것이다. 그래서 원교의 서예를 두고 붓이 노래하고 묵이 춤추는 ‘필가묵무(筆歌墨舞)’라 표현하기도 한다.(이동국의 ‘서결, 원교예술의 나침반’ 글에서) 경산 정원용(1783~1873)은 원교를 글씨를 “겨울눈이 쏟아지는데 말탄 사냥꾼이 치달리는 듯 하다”(<수향편>)고 했다.


흔히들 원교의 대자, 즉 큰 글씨의 초서에서 책받침을 위로 끌어올리거나 곧은 삐침(ㅣ)을 길게 내려긋는 독특한 획법을 ‘미친 초서’라는 의미로 ‘광초(狂草)’라 한다.


원교는 <서결>에서 “서법은 살아 움직이는 것을 귀하게 여기며, 살아 움직이면 정해진 모양이 없다”면서 “비유컨대 장터의 인물과 소와 말의 용모가 각각 다르고 행동거지가 모두 다른 것과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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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봉 조희룡의 ‘홍매도 대련’. 우봉은 용을 그리듯 매화를 그렸다. 거칠고 힘찬 역동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우봉은 추사로부터 책의 기운과 문자의 향기가 없다는 이유로 폄훼당했다. |개인소장

■글씨 받으러 인산인해를 이룬 서장


여하간 원교의 글씨는 당대 독보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규상은 “병풍이나 비문, 서첩에 쓰일 글씨의 수요가 온통 원교에게 집중됐다”면서 “원교가 날을 잡아 서장을 열 때면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소개했다.


“소매에 비단과 종이를 넣고 원교의 글씨를 받으러 오는 자가 담장처럼 둘러서서 집안을 가득 채웠다. 원교는 하루종일 붓을 휘둘렀는데 마치 소나기 쏟아지듯 장관을 이뤘다.”(<병세재언록>)


간혹 가짜도 생겼다. “원교가 한사람 한사람 응수하다가 싫증나면 자기와 흡사하게 쓰는 자에게 대필을 시키고 자기 도장을 찍었다”는 것이다. 서유구의 <금화경독기>도 “둘째 아들 영익(1740~1780)의 글씨가 원교를 빼닮았고, 남인들 중에도 원교의 글씨를 배운 자들이 많았기에 가짜가 생겨났다”면서 “그 중 일부는 안목을 갖춘 이가 아니면 가릴 수 없는 위작도 나돌았다”고 기록했다.


원교는 이렇듯 18세기를 통틀어 화제성 1위를 독점한 가장 뛰어난 서예가 및 서예이론가였다. 그런 인물을 추사가 ‘붓 잡을 줄도, 먹 쓸 줄도 모르는 형편없는 서예가’로 폄훼한 것이다. 19세기의 잣대로…. 연구자들 중에는 당대 너무도 엄청났던 원교의 영향력을 극복하기 위해 가차없이 혹평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시쳇말로 아무리 ‘신계(神界)’에 ‘넘사벽’에, ‘까방권’을 가진 추사라도 해도해도 너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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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예서대련 호고연경. 추사 김정희(1786~1856)가 평소 금석(金石)과 경서(經書) 연구에 몰두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다산 정약용의 균형 평가


이 대목에서 다산 정약용(1762~1836)의 비평을 인용해본다. 다산은 원교의 글씨를 모은 <야취첩>을 평가한 것이다. 다산은 우선 “근세의 서가로 이씨(광사)가 단연 독보적”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다산은 특히 “이광사의 가는 해서와 행서·초서는 법도가 있고 정교·세밀·기묘하여 좋은 작품은 이왕(二王, 왕희지·헌지)의 수준을 넘나들고. 비루한 작품이라도 이장(二張, 장지·장창)의 법도를 잃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왕희지·헌지 부자는 언급할 필요도 없다, 장지(?~192)와 장창(?~206)은 후한말의 서예가들이다.


이런 극찬이 없다. 그러나 다산은 원교의 반흘림체를 두고는 가차없는 비판을 가한다.


“전광(顚狂·미친 상태) 의측(옆으로 기울기)가 심하니 그 자형이 가증스러울 뿐 아니라 획법도 무디고 막혀서 신묘함이 없다. 이런 것을 본받는다면 지나치게 현혹된 것이다.”(<여유당전서> ‘시문집·발야취첩’)


그러면서도 다산은 “<야취첩>도 가늘고 단정한 해서와 작게 쓴 초서는 좋다”고 칭찬했다. 추사와 다른, 그래도 균형있는 평가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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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 신윤복의 아버지로 알려진 신한평이 그린 ‘이광사 초상’. 보물 제 1486호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50여년만의 명예회복


다시 전설처럼 떠도는 추사와 원교의 에피소드로 돌아가보자. 추사는 1840년(헌종 6년) 제주 유배형을 받고 초의선사(1786~1866)를 만나러 해남 대둔사(대흥사)에 도착했다. 그때 추사의 눈에 원교가 쓴 ‘대웅보전’ 네 글자가 보였다. 추사가 초의선사에게 “글씨를 안다는 사람이 어째 저런 것을 걸고 있단 말이냐”면서 떼어내라고 했다. 그런 다음 추사는 지필묵을 가져오게 해서 예서체로 ‘대웅보전’ 네 글자를 쓴 뒤 “이걸로 걸라”고 했다. 추사는 이외에도 차를 마시는 선방에 ‘무량수각’의 네 글자를 덤으로 써주었다.


하지만 제주도 귀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러 “원교의 글씨를 원래대로 걸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하지만 그 일화는 유배의 고초에서 아량을 키운 추사의 달라진 면모를 그리는데 주로 인용된다. 원교의 명예회복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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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가 그렇게 모욕에 가까운 혹평을 내림으로서 원교는 무려 150여년간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었다. 그러다 이제 와서 겨우 원교의 유작이 보물의 지위를 얻었으니 다소나마 명예회복은 되었을까. 다만 원교의 역작을 “형편없다”고 무참하게 깎아내린 비평글까지 똑같이 보물이 됐으니 지긋지긋한 악연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원교의 처지는 낫다.


추사로부터 ‘문자향 서권기’가 없다는 악평을 들은 우봉 조희룡의 작품은 여전히 평가절하되고 있다. 감히 한마디 하고 싶다. 모두들 추사의 ‘세한도’(국보 제180호)를 국보 중 국보로 꼽는다. 그러나 필자는 ‘문자향 서권기’가 충만한 ‘세한도’보다는 우봉 조희룡의 화려한 ‘매화서옥도’에 더 눈길이 간다. 필시 필자에게 ‘문자향 서권기’가 없기 때문이리라. “감히 ‘세한도’를 디스하냐”는 악플에 시달릴 수 있겠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것이 개인의 취향인데 어떠랴.

(이 기사는 이동국·이완우·손환일 선생의 논문과 글, 조언에 전적으로 의존했습니다.)


<참고자료>


이완우, ‘원교 이광사의 서예’, <미술사학연구> 190~191호, 한국미술사학회, 1991


이동국, ‘서결, 원교 예술의 나침반’, <보보담> 통권 37호, LG네트웍스, 2020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제7차 동산문화재분과위 회의자료, 2017


오명남, ‘원교와 추사의 서예 비교 연구’, 성균관대 박사논문, 2004


유홍준, <김정희>, 학고재, 2006


한영규, <조희룡과 추사파 중인의 시대>, 2012, 학자원


경향신문 선임 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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