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꺼낸 적 없던…세상을 바꿀 ‘동양인만의’ 할리우드 로맨스”
흥행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감독, 존 추 이메일 인터뷰
출연진 전원이 아시안계 배우
지적·매력적인 캐릭터 선보여
“전 세계 무대로 활약하는 동양인
이들을 위한 움직임 생각한다면
이 영화의 개봉은 엄청난 계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은 중국계 미국인 레이첼 추가 부자 남친인 닉 영의 싱가포르 집을 방문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제공 |
“누구도 얘기한 적 없었던 이야기가 극장용 영화가 돼 나왔다. 이 작품 이후, 다른 영화들도 많이 등장해 세상을 바꿔나갈 것이다.”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 국내에서 지난 25일 개봉했다. 이 영화는 올여름 미국 영화계에 불어닥친 아시안 열풍을 이끈 작품이다. 할리우드 작품으로 1993년 <조이 럭 클럽> 이후 25년 만에 100% 아시아계 배우가 캐스팅된 영화다. 개봉 이후 3주 연속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지키며 화제를 낳은 작품의 감독 존 추(39)와 e메일로 인터뷰했다.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그는 중국계 미국인이다. 그간 <스텝 업> <지.아이.조> <나우 유 씨 미> 시리즈에 감독으로 이름 올렸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중국계 미국인인 뉴욕대학교 경제학 교수 레이첼 추(콘스탄스 우)가 남자친구 닉 영(헨리 골딩)의 싱가포르 집을 방문해 그의 부자 가족들과 만나며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영화에 등장하는 닉의 가족은 일반인이 상상하기도 어려운 ‘부자’다.
영화의 정체성은 도입부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먼저, 깜깜한 화면에 “잠자는 사자를 깨우지 마라. 사자가 깨어나면 세계가 흔들릴 것이다”라는 자막이 등장한다. 1803년 나폴레옹이 중국을 가리켜 한 말이다. 이어 비에 젖은 중국인 엘레노어 영(량쯔충·양자경)이 영국 런던의 한 호텔에 들어선다. 직원들은 엘레노어의 모습을 보고 무시의 시선을 던진다. 호텔에서 쫓겨난 엘레노어는 전화 한 통으로 호텔을 사버린다. 당당히 걸어가는 엘레노어의 뒤에서 어린 아들 닉이 미소를 지어 보인다.
감독은 “새로운 관점과 캐릭터로 과거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담았다”며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영화임에도) 동양 여성이 주인공이면서 아시아 남성과의 로맨스를 그렸다”고 말했다. 이어 “전 세계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동양인, 동양계 미국인들을 위한 움직임을 생각한다면 이 영화의 개봉은 엄청난 계시”라고 표현했다.
그간 할리우드 영화에서 아시아인은 주로 하층민이나 악역으로 많이 그려졌다. 혹은 수학이나 정보기술(IT) 분야에서 특별한 재능을 발휘하는 기능적인 인물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지적이고 매력적인 동양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로맨스 영화가 나오자 관심이 커졌다. 할리우드 아시아계 배우들도 영화를 응원했다. 한국에서도 활동하는 가수 에릭 남은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 상영되는 미국의 한 상영관 표를 통째로 사 팬들에게 선물했다.
감독은 “영화 속에서 자신(아시안)과 똑같이 생긴 사람들이 ‘내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 대단했을 것”이라며 “영화는 언제나 혁명적인 미디어였다. 문화 전반에 걸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는 변화를 만들어 왔다. (이번 영화를 통해) 다른 매체에선 (넘어서기가) 불가능했던 한계에 계속 도전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중국계 미국인으로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며 '스텝 업' '지.아이.조' 시리즈에도 참여한 감독 존 추. |
스토리 자체는 전형적이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온 여성이 부자 남자와 그의 가족을 만나며 어려움을 겪지만 사랑으로 이겨낸다. 한국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개다. 흥미로운 것은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부자’들의 세계다. 2000억원대 저택에서 열리는 ‘가족파티’와 크루즈 선상에서 열리는 ‘총각파티’의 규모와 화려함은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배우들의 코믹 연기도 볼 만하다.
영화 속 인물들은 종종 미국인을 ‘전자레인지에 대충 데운 음식으로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로 지칭한다. 결혼 후에도 일을 계속하겠다는 레이첼에게 엘레노어는 ‘미국적인 생각’이라며 거부감을 드러낸다. 부유한 생활을 하는 중국인들의 모습은 대단하지만, 천박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동양과 서양, 부자와 서민, 구세대와 신세대의 가치관이 영화 내내 대립한다. 감독은 이에 대해 “모든 문화와 가족은 다 미친 구석이 있고 모두에게 보이길 꺼리는 이상해 보이는 전통이 있는 게 아니냐”고 말했다.
영화는 싱가포르계 미국인 케빈 콴이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감독은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현재 진행 중인 내 삶의 문제다. 나는 진정한 캘리포니아 사람이지만, 이민자의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내 일부는 중국인”이라며 “내 경험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영화가 그리 많지 않았던 때에 원작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들었다. 운명처럼 시나리오가 내 앞에 왔다. 모든 배우가 아시아계라는 것도 정말 신났다”고 말했다. 총제작비 3000만달러의 영화는 전 세계에서 2억3000만달러가 넘는 수익을 거뒀다. 속편 제작도 확정됐다.
고희진 기자 gojin@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