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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선, 그의 걸음이 곧 길이 되다

‘길을 만드는 여자’ 가수 김완선


하얀 드레스에 운동화 신고

무대로 뛰어든 17살의 ‘파격’

최초의 여성 댄스가수

그가 걷는 길이 곧 길이었다


지난 10년 꾸준히 앨범 내

“과거의 인기와 명성을 떠나

‘인간 김완선’이 하고픈 음악

내 인생을 산다…두렵지 않아”


“가장 잘한 일은 비혼”

이젠 중년을 지나고 있는

그의 삶 자체가

‘다양한 삶’을 고민하는

여성들에게 본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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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선은 시대를 풍미한 심볼인 동시에 삶 자체가 동시대 여성들에게 ‘다양한 삶’을 고민하게 하는 본보기다. KWSunflower 제공

‘1980년대가 누린 영광’ 중 하나를 꼽는다면 가수 김완선의 등장이 아닐까. 1986년 하얀 드레스에 운동화를 신고 무대 중앙으로 뛰어들던 데뷔 무대는 당시나 지금이나 파격이었다. 웃지 않는 얼굴로 몸이 부서져라 춤을 추던 17세 김완선은 한국 사회가 이전까지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오늘밤’ ‘나 홀로 뜰 앞에서’ ‘리듬 속의 그 춤을’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등 탄생시킨 명곡 수만큼이나 많은 수식어가 그의 이름에 따라붙었다.


최초 여성 댄스가수. 여자 가수 최초 단일 앨범 100만장 판매. 5회 연속 올해의 가수상 수상. 김완선의 걸음이 곧 길이었다. 누군가는 그를 두고 ‘시대를 잘못 태어난 가수’라 말한다. 틀렸다. 그는 시대로부터 버림받은 적이 없다. 한 시대의 심볼인 동시에 중년을 지나면서는 삶 자체가 동시대 여성들에게 ‘다양한 삶’을 고민하게 하는 본보기가 됐다. “가장 잘한 일은 비혼”이라는 김완선은 그의 무대가 그랬듯 이전까지 보지 못한 여자의 모습이었다.


길을 만드는 여자, 김완선을 지난 21일 서울 용산구 한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새 앨범 <2020 김완선> 발매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그를 만난 뒤 과거에 발 묶인 건 어쩌면 대중이 아닐까 생각했다. 누구보다 ‘지금’에 열중하는 김완선의 음악과 삶을 들여다봤다.

대중가수, 틀을 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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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선은 2011년부터 꾸준히 싱글앨범을 내고 있다. 그는 음악을 두고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는 명분”이라고 했다. KWSunflower 제공

김완선은 매니저였던 이모 한백희의 혹독한 트레이닝으로 탄생한 기획형 가수로 불렸다. 하지만 그의 재능은 ‘상품’, 그 이상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KBS 라디오 <황인용의 영팝스>를 끼고 살았고 킹 크림슨·이글스 등 팝 음악을 탐닉하며 귀를 열었다. 좋은 소리, 좋은 음악에 대한 열망이 컸다.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가 수록된 5집은 미국에서 믹싱을 했다. “당시엔 사운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이모랑 작곡가를 붙들고 악기소리 좀 키워달라고 어르고 달래고. 만족이 안돼서 미국에 갔죠. 30년 전 앨범인데 아직 이만한 소리를 찾지 못했어요.”


음악 얘기를 할 때마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공개되지 않은 신곡을 들려주면서도 몸은 음악에 맞춰 흔들거렸다. 곡을 소개할 땐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 ‘옐로우(YELLOW)’는 봄 같은 노래예요. 밝고 사랑스러운 노래죠. ‘하이힐(High Heels)’은 리듬이 시크하다고 할까요. 둘 다 발랄한 곡이에요.”


2006년 미국 하와이로 유학을 떠났던 김완선은 한국에 돌아와 2011년부터 꾸준히 싱글앨범을 내고 있다. 장르도 매번 달랐다. “한정판 LP를 만들면서 지난 곡들을 쭉 들어봤는데 어쩜 같은 장르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의도하진 않았지만, 제 안에 있던 것들을 그때마다 하나씩 표현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좋은 음악은 장르 가리지 않고 다 좋잖아요.”


쉬지 않고 음악을 만드는 이유를 물었다.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는 명분? 예능을 하든 행사를 하든 제 직업은 가수잖아요.” 요란스럽지 않은 작업인 만큼 대중의 큰 관심은 끌지 못했다. ‘명색이 대중가수인데 대중이 모르는 노래를 계속 만들어내는 게 의미가 있을까?’ 하는 고민도 따랐다고 했다.


고민은 곧 털어냈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끊임없이 자신을 표현하는 게 아티스트라고 하는 말이 와닿았어요. 절 대중가수라는 틀에 넣지 않고, 음악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사람이라 생각하니 행복했죠. 그걸로 됐다 싶었어요.”

마음 가는 대로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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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선의 신조는 ‘마음 가는대로 하라(Follow your heart)’다. 누구보다 ‘지금’에 집중하는 그는 대중적 인기에 둘러싸였던 시절보다 현재가 소중하다 말했다. KWSunflower 제공

레트로 열풍으로 김완선도 다시 떠올랐다. 최근 시작한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채널에 1020팬이 많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는 ‘온라인 탑골공원’ 현상을 어떻게 봤을까.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오래 버텼구나. 감사했어요. 옛날 영상이나 음악을 보다가 요즘 제 노래도 찾아볼 기회가 생긴 거잖아요.”


‘한국의 마돈나’란 수식어에 대해 20대 김완선은 “한국의 김완선으로 불리고 싶다”고 했다. 50대 김완선에게선 다르지만 같은 결의 답이 돌아왔다. “어릴 땐 어떻게 불릴까에 의미를 많이 뒀어요. 지금은 뭐라고 불려도 상관없어요. 어쨌든 나는 김완선이에요. 김완선은 김완선인 걸 어떡해.”


데뷔 직후 ‘눈빛이 야하다’는 이유로 방송정지를 당하기도 했고, 하지도 않은 일로 오해를 사 백치 이미지를 얻기도 했다. 숱한 편견을 이겨온 34년이었다. 비결은 ‘잊어버리기’라고 했다. “기분 나쁜 건 최대한 빨리 잊어요. 물론 화가 나는 일도 있죠. 한데 화내다 보면 내가 뭔 짓을 하고 있지 싶어요. 제게 독이 되는 거잖아요.”


마음 가는 대로 하라(Follow your heart). “과거나 미래에 대해 별로 생각 안 해요. 지금 해야 하는 것,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고 그걸 해내려 노력하죠.” 그는 매 순간에 집중한다. 대중적 인기와 화려함에 둘러싸였던 시절보다 현재가 소중하다 말한다.


“옛날의 저는 생각을 치열하게 하는 사람이었어요. 삶과 일, 나. 이 세 가지를 어떻게 조합할지 몰라 고민이 많았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없어졌어요. 자신에게 너그러워졌죠.” 언제쯤 그런 여유가 생겼냐 묻자 마흔 무렵이란 답이 돌아왔다. “하와이에서 2~3년 생각 없이 살면서 그 이전과 이후가 달라졌어요. 흘러가는 대로 살자고 내려놓으니 지금에 집중할 수 있게 됐어요.”


다시 음악을 시작한 이유도 여기 있었다. “과거의 인기와 명성을 떠나 ‘인간 김완선’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해보고 싶었어요. 예전의 김완선을 좋아하던 팬들은 다 떨어져 나갔어요. 두렵지 않았어요. 오케이. 나는 내 인생 살 거야. 남을 위해 인생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 결심한 게 그 무렵인 것 같아요.”

김완선, ‘다른 삶’을 보여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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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선은 비혼주의자다. 그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이 왔다”며 “결혼에 집착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조언했다. KWSunflower 제공

김완선은 비혼주의자다. 중년 여성 연예인이 공개적으로, 에두르지 않고 비혼을 선언한 건 그가 처음이다. “정말 결혼하지 않은 것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에요. 불규칙하고, 사람들과 부대끼는 직업이잖아요. 집에선 쉬어야 해요. 팬 중엔 애 셋 낳아서 잘 키우고, 결혼이 제일 잘한 일이라 말하는 친구도 있어요. 그런 사람은 결혼하면 행복한 거죠. 저와는 맞지 않다는 거예요.”


그는 한 방송에서 ‘외롭지 않냐’는 질문에 “외롭지 않다”고 단호하게 답했다. 다른 답을 머릿속에 그렸을 패널의 얼굴엔 당혹감이 스쳤다. 그 장면이 ‘인상 깊었다’ 말하자 김완선은 웃으며 말했다. “결혼해도 외로울 걸? 연애해도 외롭던데요. 결혼 왜 안 하냐 물으면 ‘너는 해서 행복하니?’ 하고 물어요. 이젠 안 해서 칭찬받은 경우가 더 많아요. ‘쏘 스마트 걸’이라고 하는데, 뭘.” 그는 덧붙인다.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이 왔어요. 결혼에 집착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김완선은 현재를 살아가게 하는 동력으로 ‘죽음’을 꼽는다. “어떤 결정을 할 때마다 ‘죽을 때 내가 후회할까?’ 하는 생각을 해요. 최대한 제 인생에 집중하고 싶어요. 미안하지만 남의 말은 별로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관심도 없어요. 일 년이 한 달 같은데, 남 인생에 관심 가질 시간이 없죠.”


스물다섯이면 가수를 그만둘 줄 알았다던 그는 “뭘 하든 나이와 체력에 맞는 일을 계속하는 게 꿈”이라 말하는 어른이 됐다. 사라져간 여자 동료들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다. “다 같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저도 물어요. 왜 활동 안 하냐고. (앨범을) 내봤는데 반응 없어서 안 한다는 거예요. 그게 저하고 다른 점이겠죠? 저는 반응이 없으면 ‘왜 없지?’ 하며 하나 더 내는 타입이라. 하하.”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원하냐 물었다. 그의 답은 늘 예상을 뛰어넘는다. “어떻게 기억돼도 상관없어요. 기억 안 해도 돼요.” 또 한 번 눈이 반짝였다.


“김완선보단 김완선의 음악에 관심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 지난 10년 동안 만든 곡들은 다 직접 프로듀싱 한 거예요. 다만 사람들이 좋아할 음악을 못 만들었으니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은 해요. 하다보면 닿을 날이 오겠죠. 숙제 같아요. 제 노래를 들으며 ‘김완선이란 가수가 있었지’ 떠올리는, 그 정도면 됐어요. 음악은 영원하잖요. 제 직업과 결혼했고 ‘베이비’들(음악)이 이렇게 많아요. 최고지 뭐.”


이유진 기자 yjle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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