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좋아하던 IT 엔지니어, 마침내 마에스트로가 되다
IT 전문가로 왕성하게 커리어를 쌓던 40대 중반, 직장인으로서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 MBA 유학을 계획하던 이성열 씨는 목적지였던 미국이 아닌 이탈리아로 궤도를 수정했고, 5년 뒤 마에스트로라 불리는 현악기 제작자로 세계 무대에 이름을 날린다. 전혀 다른 분야에서 전문가를 넘어 장인으로 이름을 떨치기까지 그 열정의 스토리를 들어보았다.
40대 초반까지 IT업계에서 일했다고요.
어릴 적부터 손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했고 제법 재주도 있어서 라디오, 오디오 등 각종 전자 제품을 놀잇감으로 삼아 자연스럽게 대학에서도 전자공학을 전공했어요. 졸업 이후에는 세계적인 슈퍼컴퓨터 제조사 ‘크레이(Cray)’ 한국지사에서 시스템 엔지니어로 근무하면서 국내 국책기관과 대기업의 슈퍼컴퓨터 구축 프로젝트를 담당했지요. 40대 초반에는 한 IT 벤처기업에서 임원 직함을 달았고요.
20년 가까이 일하면서 특별히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았을 만큼 IT 업무는 적성에 잘 맞았고 일하는 재미와 보람도 제법 컸습니다.
한창 일할 때 유학을 결정한 계기가 있을까요?
늦둥이가 태어났거든요. 그동안 직업적으로는 탄탄하게 커리어를 쌓았지만 가정에서는 그러지 못 했지요. 늘 바쁘기만 한 남편이자, 아빠였습니다. 그래서 갓 태어난 늦둥이를 보면서 가족을 위해 잠시 멈추기로 결심했지요.
회사를 그만두고 재충전 시간을 가지면서 미국 MBA 유학을 계획했죠. 자기 계발을 위한 당연하고도 꽤 현명한 수순이었어요. 그렇게 몇 달간 유학 준비를 하는데 문득 내가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이 깊어졌어요. 생계를 위한 직(職)인지, 나를 위한 업(業)인지에 대한 생각이었죠.
결국 무엇이 되기 위한 공부보다 무엇을 하기 위한 공부가 필요하다는 쪽으로 삶의 추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일해 온 IT 분야와는 너무 동떨어진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는 것은 너무 큰 모험 아닌가요?
시작은 다소 철학적이었지만, 단순히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또 하지 않으면 후회될 일은 무엇인지 등을 차분히 종이에 적어봤어요. 쭉 써놓고 보니 소리, 음악, 악기, 만들기 같은 단어가 많았습니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생에 꼭 한 번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죠.
평소에 음악을 무척 좋아한 모양입니다.
나름 음악 애호가였습니다.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는 누나의 영향이 컸죠.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클래식 음반을 사 모았고, 첼로 같은 고가의 악기도 배웠습니다.
바쁜 직장 생활 틈틈이 직장인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테헤란밸리 오케스트라(지금의 서울시민교향악단)’ 첼로 연주자로 활동했고요. 그때 저는 음악의 날개 위에 앉아서 쉬는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그 날개를 제대로 달고 날아보자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악기를 직접 연주하는 건 취미 수준이지만, 악기 제작 기술은 IT 엔지니어로서 쌓은 커리어가 훌륭한 밑거름이 되어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애정을 갖고 열심히 잘 다져온 취미가 저에게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을 열어준 셈이죠.
가족을 위해 선택한 재충전 시기에 돌연 악기 제작자가 되겠다고 유학길에 오르기까지 가족의 지지가 절대적이었겠습니다.
맞벌이 부부였는데, 아내가 흔쾌히 유학을 허락해 줬습니다. 막내가 어릴 때 빨리 유학을 다녀오라고 하더군요. 다만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던 큰아이가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돌아오라는 조건을 달았습니다(웃음). 아내의 응원과 지지가 없었다면 아마 도전하지 못했을 거예요.
덕분에 제 나이 44세에 이탈리아 크레모나로 떠났습니다. 바이올린 성지로 유명한 도시인데, 바이올린을 처음 만들었고 악기의 명장이라 불리는 스트라디바리, 과르니에리 등이 활동했던 곳이죠. 저는 크레모나 국제 현악기 제작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유학 생활은 어땠나요?
치열했죠. 전체 5년 과정 중 2학년으로 편입했는데, 3학년으로 월반했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4학년이던 2007년에는 이탈리아 피소녜(Pisogne) 현악기 제작 콩쿠르에서 직접 제작한 첼로로 금메달을 수상했고요. 이런 성과들이 있으니 힘들어도 신나게 공부했고, 덕분에 입학 3년 만에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졸업하고 나서는 1년 반 동안 ‘칼슨& 노이만(Carlson& Neumann)’이라는 이탈리아 최고 공방에서 도제 교육을 받았습니다. 도제 생활을 하는 동안 악기 세팅, 수리, 제작 기술 등을 집중적으로 연마했죠. 이곳은 세계적 연주가들이 자주 찾는 곳이라 기술은 물론 악기 제작자로서 악기와 연주자를 대하는 자세도 배웠습니다. 악기를 만들고 다루는 일은 머리와 손끝의 기술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몸소 깨달은 값진 시간이었죠.
한마디로 이탈리아 유학 생활 내내 깨어 있는 모든 순간이 악기 제작을 배우는 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공방 밖을 나가도 크레모나라는 도시 자체가 수많은 장인과 재료 상점, 그리고 각종 전시와 행사까지 예술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곳이어서 일상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을 통해 악기 제작자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귀국 이후에도 악기 제작자로서의 삶을 순조롭게 이어갔나요?
이탈리아로 떠난 지 5년 만에 귀국했어요. 아내와의 약속대로 첫째가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제 이름을 내걸고 ‘이성열 스트링랩’이라는 현악기 공방을 열었어요.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를 직접 제작하고 악기 수리도 병행했죠. 야심차게 공방을 열었지만, 운영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에요. 제가 음악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음악계 종사자도 아닌 데다 수입 악기를 선호하는 시장 환경 또한 보이지 않는 장벽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만든 악기를 믿고 의뢰하는 연주자들이 매년 조금씩 늘어났고, 공방 운영이 만 10년을 넘어서는 시점에 매우 값진 성과가 있었습니다. 세계 3대 현악기 제작 콩쿠르 중 하나인 독일 미텐발트 국제 바이올린 제작 콩쿠르에서 제가 첼로 부문 2위를 수상한 것이죠.
마흔 넘어 그저 좋아서 시작한 일로 세계 무대에 이름을 날리다니 드라마틱합니다.
제 개인의 스토리를 넘어 유럽 본토가 아닌 국내에서 만든 악기가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이 제겐 더 의미 있고, 이 일을 제가 계속해도 된다는 용기를 얻게 해준 상이었어요. 돌이켜보면 아마추어이긴 하지만 저 역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라 이 일을 더 좋아하고, 또 잘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악기를 만들 때 악기 제작자뿐만 아니라 연주자로서도 늘 생각하게 되거든요. 현악기는 줄을 진동시켜 그 떨림을 이용해 소리를 내잖아요. 현 한 줄, 울림통의 각도 등 미세한 차이가 음색을 바꾸기 때문에 현악기 제작은 매우 섬세하고 지난한 작업입니다.
이 정교한 아름다움을 완성하기까지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은 끝이 없고, 또 1000개의 도구를 가지고 수개월 동안 수없이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하지요. 부담도 크고 과정은 늘 어렵지만, 돌아보면 힘들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어요. 그 이유는 제가 원한 ‘업(業)’이었고, 그래서 많이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제가 악기를 만들 때 행복하듯 제가 만든 악기로 연주할 때 연주자들이 행복하기를 바라요.
이렇게 연주자들과 진솔하게 소통하면서 연주하기 편하고 더 좋은 음색을 가진 악기가 되도록 진심과 정성을 다해 만들 겁니다. 꾸준히 좋은 악기를 만들면서 연주자들, 그리고 주위 사람들과 즐겁게 음악으로 교류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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