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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봉 베테랑 아버지의 꿀을 디자인하는 아들

아버지의 양봉 가업을 잇게 된 꿀건달 원강효 대표는 아버지와 함께 일 하는 매일이 설렌다고 말했다. 양봉에 청춘을 바친 아버지 역시 아들이 있어 행복하다며 든든한 마음을 내비쳤다.

패밀리 브랜드 열전

여기 부모의 1라운드를 이어받아 가족의 2라운드로 만든 자식들이 있다. 이들의 브랜딩 스토리를 소개한다.


1편 엄마의 사과에 이야기를 더하다, 선암리 농부들

2편 아버지의 꿀에 디자인을 입히다, 꿀건달

3편 아버지의 쌀을 브랜딩하다, 솔직한 농부

경력 40년이 넘는 양봉 베테랑이자 도시 양봉의 선구자인 아버지와 디자이너를 꿈꾸던 아들이 만나 꿀건달이 탄생했다. 두 사람은 4월부터 8월까지 서울, 경기도 일대, 여수 등 전국 곳곳에서 꿀을 수확한다. 아카시아, 밤, 산벚나무, 팥배나무 등 다양한 종류의 꿀은 다시 디자인을 입고 소비자에게 향한다.

시작은 1년, 지금은 평생

원강효 씨는 ‘꿀을 통해 꿈을 꾸는 청년’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사실 그는 불과 5년 전만 해도 양봉이 아닌 디자이너를 꿈꾸던 학생이었다.


“저는 가업을 잇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어요. 어린 시절, 작업복 입은 아버지의 모습보다 정장 입고 출근하는 친구 부모님들이 더 멋있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누구보다 화이트칼라의 삶을 꿈꿨어요. 대학교 졸업반 때까지도 취업 준비를 하고 있었죠.”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졸업 전 회사에서 인턴을 하며 디자이너의 길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인턴이 끝날 무렵 아버지의 어깨가 안 좋아져 양봉 사업을 줄인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아버지가 한평생 일궈온 양봉의 가치를 알았기에 내심 아쉬웠다. 그래서 지금이 아니면 언제 아버지를 도와드릴 수 있을까 싶어 양봉장으로 향했다. 계획은 딱 1년만이었다. 

“1년만 도와드리자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잡다한 업무를 도맡아 하며 반년을 보냈죠. 그러다 문득 대학 내내 디자인을 공부했지만 아버지를 위한 디자인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남은 반년은 디자이너로서 아버지에게 작은 도움이나마 되려고 펜을 들었죠.”


아버지는 처음엔 아들이 가업을 잇는 것을 반대했다. 아들이 좀 더 안정적인 삶을 살기를 바랐던 까닭이다.


“양봉은 육체적으로 힘들고 수입도 들쭉날쭉하니 반대했죠. 저는 아들이 전공을 살려 안정적인 회사에 취직하기를 바랐어요.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듯 열정적인 아들의 모습에 제가 졌습니다. 지금은 가장 믿음직한 사업 파트너죠.”

큰 꿀단지에서 포켓 사이즈로

원강효 씨는 가장 먼저 고객층을 바꿨다. 꿀을 한 번도 직접 사본 적 없을 젊은 층으로 과감하게 방향을 틀었다.


“양봉 사업은 세련되지 못할 것 같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어요. 인식 전환을 위해 브랜드 이름부터 신경 썼죠. ‘꿀이 건강하고 달콤하군’의 줄임말인 꿀건달이 탄생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재치 있지만 직관적으로 바꾸려고 고심을 많이 했어요.”


재치 있는 이름에 걸맞게 상품도 감각적으로 변신할 필요가 있었다. 맨 먼저 꿀단지의 크기를 줄였다. 아버지의 2.4kg 꿀단지에서 270g으로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한 것이다. 1인 가구 맞춤형 소분 포장과 촌스럽지 않은 패키지 디자인이 변화의 중점이었다. 그는 인턴 생활을 하며 모았던 자금을 탈탈 털어 다양한 꿀 용기 샘플을 만들었다.


패키지 디자인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인기 있는 편집숍을 찾아보고 대학로, 동대문 일대를 매일 돌아다녔다. 이렇게 완성된 결과물로 2015년 108개국이 참여한 세계양봉대회에서 패키지 부문 동메달을 수상했다.

“세계양봉대회에서의 성과 덕분에 브랜드 시작과 동시에 많은 사람에게 꿀건단을 알릴 수 있었죠. 각종 답례품, 선물 등으로 인기를 끌면서 이전보다 매출이 3배나 뛰었죠.”


그 뒤 농림부 장관상을 받으며 입지를 굳혀갔고,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크기로 스틱형 꿀을 만들어 휴대가 간편하게 했으며, 꿀이 어떤 음식과 어울릴지도 끊임없이 연구한다.


“꿀은 어떤 음식과 만나면 든든한 조연 역할을 해요. 저는 꿀이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달콤한 조연이 되길 바라요.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간편하게 꿀을 만날 수 있도록 새로운 디자인을 시도해보고 있어요.”

설렘이 만나 시너지 효과

아버지 원익진 씨는 열여덟 살부터 양봉을 시작했다. 잠시 다른 일을 해볼까도 했지만 결국 양봉으로 되돌아왔다. 가장 잘하고 좋아하는 일로 돌아온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꿀건달에서 벌의 복지와 꿀맛을 책임지고 있다. 매년 양봉농협이 주관하는 벌꿀 시험에서 꿀건달이 1등급을 한 번도 놓치지 않은 데는 그의 부단한 노력이 숨어 있다.


“친형의 친구를 따라 양봉 일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제가 원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힘들어도 매년 여수로 내려가 벌의 건강을 관리하죠. 어떻게 하면 건강한 꿀을 생산할 수 있을지, 벌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할 수 있을지 항상 연구해요. 벌은 제게 단순히 돈벌이 수단이 아니에요. 저의 청춘이자 인생의 설렘이죠. 그 청춘을 아들과 함께하니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하고 좋습니다.”

원강효 대표 역시 꿀건달을 시작한 지 5년이 넘은 지금도 처음처럼 설렌다고 말한다.


“꿀건달의 미래가 밝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미래를 상상하면 설레요. 이런저런 디자인으로 바꿔보고 색다른 마케팅도 시도해볼 생각에 일이 즐거워요. 회사에 다닐 때와는 전혀 다른 성취감이죠. 또한 좋아하는 일을 아버지와 함께할 수 있는 건 큰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기획 이채영 사진 이준형(스튜디오 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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