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농부가 된 여상규 전 의원
[정치인의 2라운드]
처음에는 치료 목적이었다. 통증을 잊기 위해 과일나무를 관리했다. 여상규 전 의원은 톡톡히 효과를 봤고, 그때부터 국회의원을 그만두면 도시농부로 살기로 마음먹었다.
금배지 떼고 금쪽같은 인생을 시작한 정치인들의 이야기
1편, 5선 의원에서 웰다잉 전도사가 된 원혜영 전 의원
2편, 법사위원장에서 도시농부가 된 여상규 전 의원
3편, 정치 외도 후 라디오 DJ로 돌아온 이철희 전 의원
여상규 전 의원은 내내 통증에 시달렸다. 교통사고 후유증이었다. 20대 총선을 치르고 난 직후 교통사고가 크게 났다. 2016년 5월의 일이다. “사천 시민의 날 행사가 있어서 내려가던 중에 교통사고가 크게 났어요. 두개골 골절, 전두엽 자상, 뇌출혈… 무엇보다 경추부 척추 1, 2, 3번 분쇄 골절이 가장 큰 부상이었죠.” 의사가 생명을 구하기 어렵다고 말할 정도로 심각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했고, 그는 살아났다.
“여섯 시간 동안 수술을 받고 척추 1, 2, 3번을 한 덩어리로 묶었어요. 지금도 좌우로 고개를 돌릴 수 없어요. 왼쪽을 쳐다보려면 몸까지 돌려야 하죠.”
불편한 걸 넘어 참을 수 없는 문제는 통증이었다. 복합적인 통증이 계속 그를 괴롭혔다.
“머리가 욱신거리고 날카롭게 찌르는 듯한 통증이 있었고, 뒷목 근육이 굳어져서 목과 어깨가 굉장히 불편했어요. 사고 이후 통증을 호소하니 의사가 일상적인 일에 복귀하는 게 좋겠다고 했어요. 또 공기 좋은 데 가서 산책도 하라고 권했죠. 신경을 다른 데 쓰면 통증이 덜 느껴질 거라는 뜻이었어요.”
그렇게 그는 일상으로 돌아왔고, 국회 법사위원장을 맡아 20대 국회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산책도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산책 겸 둘러보다가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올랐다.
“어릴 때 어머니와 농사를 지었어요. 어머니와 보낸 추억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공기 좋은 곳에서 산책하며 주변을 보니 옛날 생각이 났죠. 벼가 자라고 있겠구나, 채소가 크고 있겠구나 하면서 바라봤죠. 특히 과일나무에 꽃핀 걸 보니 나도 심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침 20년 전 취득한 산속 땅이 있었다. 묵정밭이었다. 그는 그곳에 조금씩 묘목을 심기 시작했다. 당시의 일을 떠올리는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자기가 일군, 자기만의 작은 과수원이었으니까.
“양재동에 사는데 집 근처에 화요공판장 등 묘목을 파는 데가 많아요. 그곳에서 배, 복숭아, 살구, 자두 묘목을 여남은 개씩 사 가지고 가서 그곳에 심었어요. 지금은 100여 주 정도가 심어져 있죠. 봄에 가면 과일나무 꽃이 아주 좋습니다. 그냥 꽃만 감상하는 게 아니라 꽃송이가 많으면 따줘야 하죠. 시간이 지나 과일이 맺힐 때가 되어서 많이 맺히면 또 솎아줘야 하고요.”
마치 눈앞에 과일나무가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그의 표정은 조금 신나 보였다. 확실히 좋아하는 것을 얘기할 때면 얼굴에 티가 나는 법이다. 무엇보다 통증이 줄었다. 의사가 권한 통증 완화법은 효과가 있었다.
“정말 그러다 보면 통증을 잊어버려요. 거기에 집중하니까요. 가만히 앉아서 회의를 진행하고 책을 볼 때보다는 확실히 몸을 더 움직이니까 통증이 덜하더라고요. 그래서 국회의원을 그만두면 농장도 가꾸고 과일나무도 더 키워야겠다고 생각했죠. 어릴 때 어머니와 함께 농사짓던 추억도 있으니까요.”
도시농부로서의 인생 2막은 그렇게 시작됐다. 20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할 때부터 조금씩 몸에 스며들었고, 국회의원을 그만둔 지금은 도시농부라는 단어를 꺼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통증을 잊고자 하는 치료 목적이 크다. 도시농부라는 단어를 앞세운 거창한 목표는 애초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한다.
“사고로 인한 통증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시작한 만큼 과수 농가를 크게 해서 이걸로 돈벌이를 해보자 하는 생각 같은 건 없죠. 앞으로도 그런 생각까지는 안 갈 거 같아요.”
그래도 키우는 재미는 기대한다.
“아직은 저희가 먹을 만큼도 과일을 수확한 적이 없어요. 사과나무 30여 그루, 복숭아나무 30여 그루, 배나무 20~30그루를 심었는데, 심은 지 얼마 안 돼서 다 열매를 맺진 않고 몇 개씩 열리는 정도예요. 이다음에 많이 열리면 당연히 나눠먹어야죠. 친구들에게도 와서 따 가라고 할 거예요. 시골 동네 사람들이 와서 따 먹어도 좋고요.”
도시농부로 살겠다고 한 지 얼마 안 됐지만 ‘도시’보다 ‘농부’에 더 애착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지금은 금·토·일에 주로 가 있는데, 앞으로는 거기 가 있는 시간이 길어질 것 같아요. 거기에선 복잡한 도시 생각을 하지 않아서 좋아요. 정치가 어떻다, 경제가 어떻다 하는 건 아예 잊어버리죠. 과일나무나 꽃을 보고 있으면 거기에 몰두하게 되니까요. 서울 집에 있을 때 많이 아프면 내일은 양평에 가야겠다고 생각하죠.”
흙과 나무를 바라보면서 새삼 삶에 대해 느끼는 바가 컸다. 그동안 치열하게 살아온 그를 자연은 조용히 일깨워주었다.
“흙은 정직하잖아요? 뿌린 만큼 가꾼 만큼 거둘 수 있죠. 과수농가가 됐든 일반 벼농사가 됐든 원예작물 채소 농사가 됐든 사람의 마음을 굉장히 평정하게 해요. 욕심 부린다고 되는 게 아니죠. 일반사회, 특히 정치사회에서는 얼마나 과욕을 부립니까.”
그에게 도시농부는 어쩌면 삶의 균형일지 모른다. 그동안 잊고 지낸 것들을 되살리는 인생 2막.
기획 이인철 글 김종훈 사진 박충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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