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재미를 익히세요, 더 나이들기 전에
선천성 심장병으로 큰 수술을 두 번이나 받고 평생 부정맥 약을 먹던 김종우 교수가 히말라야 걷기 여행을 가겠다 했을 때 주치의는 극구 반대했다. 하지만 그는 히말라야에 올랐고, 인생이 바뀌었다. 일상 걷기부터 여행, 명상까지 직접 체험해 완성한, 이른바 ‘홧병 전문가’의 걷기 철학을 들어봤다.
걷기가 건강에 좋다는 건 상식입니다. 의학적으로도 정말 그런가요?
생리학의 기본이 ‘동물은 움직여야 한다’는 겁니다. 위, 간, 소장, 대장, 방광 등 신체 장기는 움직여야 그 동력에 의해서 활동합니다. 우리 몸 전체를 움직이게 하는 방법은 뭘까요? 바로 걷기입니다. 걷기는 모든 기관과 조직, 대사 물질을 활동하게 해 우리 몸의 동력이 됩니다. 직립보행을 하면 우리 몸이 똑바로 세워지면서 땅을 디딘 발가락부터 자극이 시작되죠. 이것이 신경(한의학에서는 경락)을 통해 뇌로 전달되면서 전신 근육도 움직이고 혈액순환도 됩니다.
특히 발바닥 자극은 직접적으로 뇌 건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칩니다. 전신의 네트워크를 활성화해서 신체와 정신 활동을 왕성하게 해주는 게 바로 걷기지요.
어떤 환자에게 걷기를 권하나요?
걷기는 특정한 병이 아니라 모든 병의 치료 과정에 다 적용됩니다. 심지어 암 환자들까지 병을 극복하는 과정에 걷기가 필수적이에요. 걷기가 인체의 대사 및 활동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걸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모든 질병 치료의 기본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누군가 말했죠? “걸으면 살고 누우면 죽는다”라고. 그 말은 의학적으로 일리가 있습니다.
간혹 걸을 수 없는 환자도 있을 텐데요.
치료할 때 가장 안타까운 환자가 “의사 선생님이 걷지 말라고 하셨어요” 하는 분들입니다. 관절 질환 환자 대부분이 그렇죠. 그런데 활동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 오히려 병이 가중되는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에게는 하다못해 TV로 걷기 다큐라도 보라고 합니다.
제가 <마흔 넘어 걷기 여행>(북클라우드)이라는 책에도 소개한 사례인데, 30대에 척추 손상 사고를 겪고 20년간 하반신마비로 산 분이 계셨어요. 너무 답답하고 스트레스가 쌓여서 찾아오셨는데, 그분께 <걸어서 세계 속으로> <영상앨범 산> 같은 여행 다큐 프로그램을 보라 했죠. 2주가 지나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6개월이 지나자 ‘나도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후 용기를 내어 휠체어를 타고 가벼운 여행에 도전할 정도로 좋아지셨어요. 걷기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활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중장년에게 걷기가 특히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간은 돌 즈음부터 걷기 시작해 50대에 몸과 정신의 최대치를 찍고, 그 이후로 서서히 내리막을 그립니다. 걷기는 내가 죽기 직전까지 하는 운동입니다. 중요한 건 70·80대가 되기 전에 꼭 걷기에 재미를 붙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걷기는 모든 활동의 시작입니다. 취미 생활이나 어떤 활동을 하려고 해도 무조건 걷기부터 시작해야 하고, 또한 걷기가 가능하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한데, 50·60대에 걷기의 재미를 마스터하지 못하면 70대가 되어 그걸 느끼기는 어려워요. 70·80대를 마지막까지 걸으면서 활기차게 보내려면 더 늙기 전에 50대부터 걷는 재미를 들여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건 ‘걷는 게 재미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걷기가 재밌는 일이 되면 건강은 자연히 따라옵니다.
교수님은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걷기에 재미를 느꼈나요?
원래부터 걷는 걸 좋아했지만, 10여 년 전에 떠난 히말라야 걷기 여행이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암 환자 치유 모임에서 건강 강의와 명상 등을 하는 프로그램을 함께 진행했는데, 거기서 히말라야 트레킹을 기획한 거죠. 사실 저는 선천적 심장병을 앓고 있어서 고산지대에 가면 안 되는 사람이에요. 주치의도 극구 반대했지만, 넉 달 전부터 아파트 29층을 매일 걸어 오르면서 연습했고, 결국 도전했습니다. 해발 3200m 전망대에 도착하기까지 다른 사람들은 멀쩡했지만 저는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죽도록 힘들게 올라가 히말라야 영봉을 딱 바라보니 역설적으로 ‘아, 이런 곳에서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히말라야 트레킹 이후 매년 걷기 여행을 떠났습니다. 우리나라와 세계의 트레킹 코스를 두루 걷고, 이를 통해 얻은 것을 글로 남기고 있어요.
유명한 걷기 코스를 거의 다녀오셨는데, 저마다 매력이 다르지요?
영적인 산티아고 순례길은 히말라야 트레킹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지루할 만큼 긴 길인데, 생각만큼 예쁘지 않고 코스가 다이내믹하지도 않아 호불호가 나뉩니다. 하지만 가장 좋았던 건 쉬어야 할 때쯤 나타나는 작은 카페와 바였어요. 그곳의 주인들은 순례자들을 극진히 대접해줍니다. ‘신의 가호를 빕니다’ ‘깨달음을 얻고 돌아가시기를’ ‘하나님의 영광이 늘 함께하기를’ 이러한 메시지와 응원을 받으면서 걷는 거지요. 음식과 커피와 와인을 풍성하게 먹을 수 있고 맛도 좋으니, 종교가 없는 저 같은 사람에게도 이런 점은 꽤 매력적이죠. 규슈 올레를 비롯한 일본의 걷기 코스는 또 다른 매력이 있어요. 바로 온천이지요. 한 고개 넘으면 딱 나타나는 온천에서 휴식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제가 자주 가는 오헨로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모방해 만든 길입니다. 시코쿠섬을 한 바퀴 도는 1200km의 순례길인데, 88개의 사찰과 번외 사찰 20개를 더해 총 108개의 사찰을 걸을 수 있습니다.
걷기 여행에서는 걷는 것뿐 아니라 쉬는 것도 즐거움이 되는군요?
인간은 걷는 속도보다 빠를 때의 일을 기억에 잘 남기지 않아요. 걷고 또 멈추고 그래야 기억에 남지요. 스페인 세고비아를 갔을 때, 동행한 교수님이 점심 한 끼만 여유롭게 먹자고 하셔서 3시간을 머물렀던 적이 있어요. 1600년대에 돌로 지은 건물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는데, 그 앞에는 로마 시대에 만든 수로가 있었어요. 오래된 나무 아래, 멋진 스페인 사람들 사이에서 그 수로를 보면서 식사를 한 그때 기억이 잊히지 않습니다. 걷다가 마음에 드는 곳이 생기면 머무를 수 있어야 하지요. 멈춤의 즐거움도 느껴봐야 합니다. 오랫동안 걸으면 에너지가 바닥까지 쭉 내려가요. 멈추고 휴식하는 동안, 마치 방전된 휴대폰 배터리가 충전되듯 에너지가 차오르며 오감이 깨어나는 느낌을 받아요. 완전히 비웠다가 다시 채우는 이 과정이 명상과 비슷합니다.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걷기 명상’이 그런 과정인가요?
사실 걷기 자체에 명상적 요소가 있습니다. 걷기에는 오로지 열심히 걷기에 ‘몰입’하는 순간이 있고 반대로 걷고 난 이후의 ‘쉼’이 있어요. 모든 것을 비워내고 난 후 다시 가득 충전되는 시간이죠. 비우고 채우는 두 가지 모두 명상적 요소입니다. 모든 것을 비워서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 여기에서 명상 경험이 일어납니다.
걸으면서 명상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궁금합니다.
먼저 발바닥을 땅에 대고 접지(接地)를 합니다. 일단 땅과 내가 하나 되는 느낌을 받고, 안전하고 평온한 상태에서 걷기를 시작하지요. 천천히 첫발을 딱 떼는 순간, 고요하던 마음은 바로 흔들립니다. 그다음엔 안정을 되찾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음 발을 내딛게 되죠. 결국 걷기란 ‘정(正)’에서 ‘반(反)’으로 갔다가 ‘합(合)’으로 오는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삐뚤삐뚤 불안정한 느낌이 이상하다가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자신의 리듬을 찾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매우 자연스러워집니다. 이때 자신의 문제를 ‘화두’로 툭 던지고 걷다 보면 어느새 해답에 다다르게 되지요.
일상 속에서 꾸준히 걷기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어떻게 하면 걷기를 평생 습관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걷기는 일정 수준 이상을 꾸준히 실천해야 합니다. 최소 30분 이상, 1만 보 이상을 걸으려면 생활 속에 녹아들어야 하지요. 저는 걸어서 출퇴근을 합니다. 도로로 오면 30분 정도 걸리는데, 둘레길로 연결된 산길을 택하면 1시간 정도 걸립니다. 출퇴근하는 동안 이렇게 걸으면 6000보 정도 되고, 점심 먹고 병원 안에서 왔다 갔다 하면 이것만으로도 1만 보 정도가 됩니다. 특별히 시간을 더 내지 않아도 1만 보를 생활 속에서 채우고 있어요. 만약 충분히 걷지 못했다면 밤 시간을 이용해서 또 걷습니다.
출퇴근 길이 너무 멀어서 걷기 어렵다면 어떻게 할까요?
그렇다면 점심시간에 걸어서 맛집을 가보는 건 어떨까요? 만약 서울역 앞에 회사가 있다면 남산둘레길을 지나 이태원 맛집에서 점심을 먹고 걸어서 돌아오는 겁니다. 무조건 생활 속에서 즐겁게 걸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보세요.
시간이 여유로운 주말에는 어떻게 걷나요?
평일에 생활 속에서 1시간 정도 걷는다면, 주말에는 2시간 이상 오래 걷습니다. 굳이 멀리 교외까지 나가지 않아도 좋습니다. 서울 시내를 걸어도 좋아요. 마치 해외여행 가서 파리 도심 골목을 걷는 기분으로 맛집을 찾아다니면서 즐겁게 걸어요.
교수님은 언제 걷는 것을 가장 좋아하나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걷기는 새벽에 걷는 겁니다. 해 뜨기 전부터 걷는 거예요. 동이 트기 시작하면 자연이든, 도시든 그곳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면서 해가 뜰 때 절정을 맞이하죠. 해 뜬 후 30분 동안의 빛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새벽 도시의 공원은 정말 멋있어요.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도 느껴지고요. 거리에서 모닝 커피를 마시는 순간도 참 좋습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여유롭게 바라보고 있으면 행복한 기분이 듭니다.
걷기만으로 행복을 누리고 계시네요. 마지막으로 이런 사람은 반드시 걸어야 한다고 걷기를 강력하게 처방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까요?
“우리 부부는 대화가 부족해” “우리는 공감대가 없어” 이런 말들 많이 하시죠? 그렇다면 함께 걸어보세요. 굳이 대화하려고 하지 말고, 그저 같이 걷기만 해도 됩니다. 대화가 많지 않더라도 함께 걷다 보면 “경치가 참 멋있네” “상쾌하다” 하면서 공감하는 시간을 길게 가질 수 있습니다. 함께 걸으면 저절로 속도를 맞추게 되고, 심장도 같은 템포로 박동하게 됩니다. 같은 리듬으로 오래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공감대가 형성돼요.
만약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이 있으면 오래 같이 걸어보세요. 3~4일을 걸어도 용서가 안 되면 용서가 될 때까지 계속 걸으면 됩니다. 또 어린 자녀가 있다면 꼭 같이 자주 걸으라고 권합니다. 부모와 같이 계속 산책하면 가족끼리 동조가 잘 됩니다. 서로를 공감하게 만드는 함께 걷기는 자녀에게도 배우자에게도 꼭 필요합니다.
또 하나, 코로나19 이후 고립감을 극복하는 것이 인간에게 큰 숙제가 되고 있어요. 그저 혼자 보내야 하는 시간이 강제적으로 길어지면서 ‘홀로’ ‘혼자’ 잘 생활해야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화병을 극복할 수 있지요.
“만일 1시간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걷기”라고 대답할 수 있고, 걷기를 재미있게 즐기고 언제든 할 준비가 되어 있으면 좋겠습니다. 최소한 중년에는 ‘혼자 걷는 재미’를 꼭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신체 건강뿐 아니라 정신 건강에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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