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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는 수고한 나에게 주는 최고의 보상

(사)제주올레의 서명숙 이사장은 한국 중년들에게 타박타박 걷는 즐거움을 알게 해준 사람이다. 제주도 사투리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뜻하는 ‘올레’. 제주에 올레 길을 내고 걸어온 10여 년 간, 걷기가 그녀에게 알려준 즐거움과 치유 그리고 나눔에 대한 기적 같은 이야기.

제주올레는 이제 걷기 문화의 대명사로 불립니다. 길을 직접 만들 정도로 걷기를 사랑하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저는 너무 아파서 살기 위해 걸었습니다. <시사저널> 편집장이었던 마흔일곱 살 때 육체적, 정신적으로 너무나 많은 압박이 있었죠. 요즘 말로 완전히 ‘번아웃’이 된 상태로 병원에 찾아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종합검진을 받았어요.


일주일 뒤 결과를 보러 갔더니, 저는 죽을 것처럼 아픈데 아무 병이 없다는 거예요. 그 결과가 오히려 절망적이었죠. 아무것도 고칠 수 없고, 그냥 이대로 살라는 뜻이니까요. 그때 의사 선생님이 예방적 차원의 처방을 해주셨어요. ‘스트레스받지 말고 과로하지 말고 유산소운동 한 가지를 일주일에 5회씩 하라’고요. 그때부터 살기 위해 운동이란 걸 처음 시작했습니다.

그 운동이 걷기였나요?

아니요. 처음에는 일단 학원에서 배우는 운동을 다 해봤어요. 헬스, 에어로빅, 요가, 재즈댄스, 명상 그리고 수영까지요. 하지만 시작 후 서너 번 하고 곧 포기했어요.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체육 시간을 제일 싫어했거든요. 어떤 운동도 적응이 안 되고 재미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최후의 수단으로 택한 게 바로 걷기였습니다.


걷기를 시작한 첫날, 그저 살기 위해서 억지로 15분을 걸었어요. 그런데 다음 날 그리고 다다음 날 계속 해보니 점점 재미가 생기더라고요. 어느덧 몸도 가벼워지고 머리도 맑아지고 행복해지고… 그러면서 걷기라는 세계에 중독되어 그 즐거움에 빠져들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가장 즐거웠나요?

저는 엄청난 고민과 잡다한 생각, 스트레스에 짓눌려 사는 직장인이었어요. 많은 고민으로 가득 차 몸도 머리도 항상 무거웠는데, 걷다 보면 저도 모르게 걱정이 사라져요. 직접적인 해결책이 되는 건 아니지만 걷는 순간만이라도 머리가 비워지고 정신이 맑아지니까 그 전까지 전혀 떠오르지 않던 아이디어가 문득 생기더군요.


걷기를 하면서 비웠다가 다시 채워지는 경험을 하게 된 거죠. 육체적으로도 몸이 좋아졌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힐링이 되고, 새롭고 창의적인 생각도 하게 되었어요. 결국 걷기가 제 모든 걸 해결해준 셈이죠.

사실 바쁜 직장인들이 걷는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걸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제대로 살기 위해서지요. 건강의 모든 문제가 불필요한 지방층에서 발생하는데, 걷다 보면 지방은 점점 사라지고 그 자리에 근육이 생깁니다. 몸만 그런 게 아니고 정신적인 지방도 떨어져 나가요. 쓸데없는 걱정이나 근심, 남과 비교하는 마음, 초조함, 타인에 대한 질투 이런 것들이 모두 정신적 지방 덩어리지요.


걷다 보면 그런 것들을 저절로 내려놓게 되고 대신 정신적으로 탄탄한 근육이 생겨요. 정신적 근육이란 스스로 인정하는 것, 자기 존중감,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는 것, 감사함 등이지요.

올레 길을 찾는 연령대도 그렇고, 특히 50·60대 중장년들이 걷기에 열심입니다.

젊었을 때는 사회생활을 하니까 활동량이 많지만, 50대가 넘어가면 자연스레 움직임이 줄어들죠. 동맥경화에 혈전, 비만, 당뇨 등 여러 문제가 생기는 나이에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건강을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저희 언니는 당뇨 수치가 심각하게 높았는데, 동생이 올레 길을 만든다고 하니까 마지못해 따라와서 같이 걷게 되었어요. 14년이 지난 지금, 당뇨 수치가 낮아졌고 굉장히 잘 관리되고 있습니다. 이게 다 걷기의 힘이지요. 여러 질병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걷기는 아주 중요합니다.


걷기는 내 두 발이 의사가 되고 간호사가 되고 수술대가 되어서 스스로를 치유하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길은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할 수 있는 종합병원이고요. 동네 병원도 있고 작은 개인 병원도 있는 것처럼, 걷기 위해 무조건 제주올레를 찾아올 필요는 없습니다.


학교 운동장이든, 공원이든, 조그만 쉼터든 자기동네 길부터 걸으세요. 집 근처 병원부터 가듯이 말이죠. 행복한 야외 병원에서 자신의 두 발로 스스로 치유하는 행위를 꼭 시작하라고 권합니다. 그러다 명의가 필요해지면 제주올레라는 비교적 큰 종합병원을 찾아오시면 되고요.

전화 드릴 때마다 항상 걷고 계셔서 놀랐습니다.

걷는 걸 즐기는 사람이니까요. 걷기를 처음 시작할 때 겨우 15분을 걸었던 사람이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하루에 11~12시간도 걸어봤거든요. 이제는 적어도 3~4시간은 걸어야 ‘걸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1시간 정도 걸으면 마치 밥을 먹다 만 것 같아요.

지금 제주에 살고 계신데, 어떤 코스를 주로 걸으세요?


저는 제주도의 남쪽 끝, 서귀포에 살고 있어요. 프랑스로 치면 프로방스 같은 곳이죠. 제가 중학교 때까지 살았던 고향에 50년 만에 정착하니 너무 행복합니다. 그동안 제가 ‘동(銅)수저’쯤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다이아몬드 수저, 아니 다이아몬드 광산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이렇게 변함없이 아름다운 자연을 지닌 고향이 있으니까요. 초등학교 때 늘 소풍 다니던 외돌개를 매일 걸으며 살다니… 이 모든 게 50대이후에 벌어진 일들이에요.

요즘 새롭게 걷기 시작한 길도 있나요?

저희가 낸 올레 길은 해안을 따라 걷는 425km 26개 구간이지만 제주에는 새로운 길이 많습니다.


사실 작년에 저에게 큰일이 있었어요. 제주올레 시작부터 지금까지 줄곧 함께했던 남동생(고 서동철님, 제주올레 1기 탐사대장)이 작년 1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슬픔 때문에 한 두 달 굉장히 힘들었어요. 3월에 다시 길을 나섰는데 너무 슬퍼서 못 걷겠더군요. 어느 길에나 함께 길을 개척했던 동생과의 추억이 서려 있었거든요. 저 나무 뒤에서 나올 것 같고, 저 바닷가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들어서 가장 평화롭고 행복했던 올레 길이 저에게 가장 슬픈 길이 되어버렸습니다. 남동생과의 추억이 옅어지기 전까지는 올레 길로 나갈 수 없겠다 싶어 제주 중산간에 있는 한라산둘레길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원래 달리기도 못하고 높은 곳에 오르지도 못해서 주로 해안을 따라 평지를 걸어왔는데, 산 중턱의 둘레길을 가보니 호젓하기도 하고 또 다른 재미가 있더라고요. 세상을 먼저 떠난 동생 덕분에 제주의 새로운 길을 찾게 된 거죠. 아마 동생이 제게 마지막 선물로 주고 간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한라산둘레길을 걸으며 다른 경험도 해보라고요.

길에서 느낀 슬픔을 또 다른 길에서 극복하셨군요.

사람이 365일 즐거운 순간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누군가를 잃는 슬픔조차 녹이고 삭일 수 있는 게 걷기인 것 같아요. 그렇게 걷노라니 동생을 잃은 슬픔도 절로 산길에 내려놓아지고 옅어지기 시작했어요. 제 근육도 강해지기 시작하고, 슬픔의 구덩이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걷기는 기쁜 순간을 더 기쁘게 하고 슬픈 순간마저 잠시 벗어나게 하는 그런 힘이 있더라고요.

이사장님이 즐기는 걷기 방법이 따로 있나요?

저는 천천히 걷는 편입니다. 특히 제주올레는 천천히 걸어야 하는 길이죠. 하늘, 구름, 바다, 꽃, 나무, 나비 등 제주올레 길에는 눈에 담아야 할 풍경이 너무 많으니까요. 앞으로 전진만 하면서, 오직 건강을 위해서 행군하던 분이라면 제주에서는 제발 ‘간세다리’로 걸으시라 말합니다.


‘간세다리’는 제주도 방언으로 ‘게으름뱅이’라는 뜻이거든요. 천천히 걸으며 위도 올려다보고, 아래도 내려다보고, 뒤도 돌아보면서 천천히 걸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스퍼트를 내서 걷고 싶은 날이 있어요. 머리가 복잡하거나 무거울 때는 팍 치고 나가면서 빨리 걷는 게 좋죠. 그날 걷는 목적과 마음가짐, 동행 여부에 따라 걷는 방식과 속도가 달라집니다만 그 어떤 경우라도 즐기는 마음은 한결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걷기를 수단으로 여기고 있는데, 저는 걷는 과정 자체가 목적입니다. 걷는 동안 보이는 풍경,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그 과정에서 느끼는 행복감 이 모든 것이 걷기의 목적이라 생각하거든요. 걷고 있는 그 순간 마음이 너무나 충만합니다. 걷기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완벽한 활동이에요.

걷기를 통해 인생의 극적인 변화를 만들어내셨는데, 보통 사람들도 가능할까요?

올레 길에 오시는 분들이 한결같이 “걷기를 하고 삶이 많이 달라졌다”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특히 기억나는 분은, 암을 두번 진단받고 올레 길을 혼자 걸으신 분입니다. 마지막 항암 치료를 마친 후 정말 좋아하는 제주도에서 1년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내려오셨대요. 어차피 인생이 얼마 안 남았으니 죽기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올레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지금 6년째 걷고 계십니다. 올레 길을 마흔여덟 번째 완주 중이에요. 처음에는 바닥난 체력으로 겨우 걸었는데, 지금은 72세임에도 60대 초반처럼 보이고 저보다 훨씬 잘 걸으십니다. 걷다보니 점점 체력도 좋아지고 정신적인 두려움에서도 벗어나게 되었다고 해요. 내일 걸을 길을 생각하며 잠들고, 아침에 눈뜨면 어떤 풍경이 기다릴까 설렌다고 말씀하십니다.

걷기로 인생이 변하는 경험을 하다니, 신기하네요.


걷기로 체력과 정신력이 강화되면 삶을 적극적으로 살게 되고 폭넓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인생 계획을 새롭게 짜거나 무언가에 도전하거나, 혹은 라이나전성기재단에서 진행하는 ‘굿워크 캠페인’과 같은 나눔으로 확대되기도 하지요.


올레 길을 걷다 보면 아름다운 자연에 쓰레기가 버려진 광경이 너무 안타까웠어요. 그런데 요즘 보니 쓰레기를 주우면서 걷는 ‘플로깅(Plogging)’ 하는 분들이 많이 생겨났어요. 또 자원봉사로 올레 길에 달려 있는 리본 표식을 정비하는 활동을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게 스스로 행복해지니까 가능한 겁니다. 행복한 마음이 있기에 행복을 나누게 되고 좋은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생기는 것, 그게 바로 걷기를 통해 전파되는 선한 영향력인 것 같아요.

코로나19 이후 제주올레 길을 걷는 분이 많이 늘어났다면서요?

2020년 제주올레 완주자 통계를 내보니 그 전 해보다 64%나 늘어났어요. 20·30대는 104% 증가해 두 배 넘게 늘었습니다. 해외여행이 어려워진 점도 있고, 실내 활동에 제약이 있다 보니 제주올레를 많이 찾았던 것 같아요. 2021년 상반기 통계만 봐도 작년보다 또 늘었더라고요.

제주올레를 자주 찾는 유명인도 꽤 많죠?

배우 류승룡 씨는 걷기 마니아입니다. 촬영이 없을 때면 늘 올레 길을 걸어요. 배우 문소리 씨나 고두심 선생님, 가수 양희은 선생님도 자주 오십니다. 워낙 바쁜 스케줄에 시달리고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이다 보니 더 절실하게 자연을 찾는 게 아닐까 싶어요.


잠시라도 틈이 나면 자연으로 돌아가 자신을 비워내고 걸으면서 스스로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죠.

제주올레 블로그에 ‘서명숙의 로드 다큐멘터리’라는 칼럼이 있더군요. 제주올레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던데, 기억에 남는 분이 있다면요?

기자 출신이라 사람들에게 자꾸 말 시키는 직업병이 있다 보니 정말 많은 분의 사연을 알게됐어요.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분은 올해 91세인 부산 사는 장예숙 님입니다.


10년 전인 81세 때 아드님과 함께 제주에 오셨는데, 그때 택시 기사가 올레 길을 한번 걸어보라고 권하셨대요. 올레 길을 처음 걸었을 때는 “여든 살도 넘은 내가 무슨 완주냐” 하셨는데 결국 26코스를 다 걸으셨어요. 91세인 지금은 세 번째 완주 중인데, 심지어 완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어요. 무엇이든 시작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란 없다는 겁니다.

아직 걷기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듯 싶습니다.

제 나이 50세에 산티아고를 갔거든요. 3년 동안 마음속으로 꿈만 꿨는데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어요. 당시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이었는데, ‘이만하면 됐다, 23년 기자 생활과 30년 서울 생활을 여기서 끝내자’고 결심했어요. 일단 산티아고를 걸은 다음에 이후 뭘 할지 생각하려고요. 결국 그 길 위에서 제가 떠나온 제주도를 떠올렸고, 제주도에도 이런 길을 내야겠다 생각했지요.


나이 오십이 넘어가는 시기가 그럴 때인것 같아요. 한계에 부딪혔다는 생각이 들거나, 최선을 다해 살다 보니 좀 지쳤거나, 혹은 지금까지 살아온 것에 대해 회의감이 들거나, 아니면 스스로에게 상을 주고 싶거나…. 50년쯤 살아오신 분들은 나라에서 표창장을 주지 않더라도 열심히 살아온 걸 스스로 알잖아요. 저에겐 오십에 떠난 산티아고 여행이 제 자신에게 주는 훈장이자 인생의 연금이라고 생각했어요.


여러분도 제주올레 완주를 자신에게 선물하는 인생의 상처럼 주면 어떨까요? 사서 고생인 것 같지만, 사실 스스로에게 보상해주는 가장 행복한 행위거든요. 열심히 살아온 당신, 제주올레를 꼭 한번 걸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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