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근·서장훈에서 허훈·전성현으로…고교 선수들의 롤모델이 바뀌었다
롤모델(Role model). 자기가 해야 할 일이나 임무 따위에서 본받을만 하거나 모범이 되는 대상을 뜻한다. 살면서 누군가의 동경 대상이 되고, 누군가를 동경하는 것은 스스로를 키우는 에너지가 된다. 농구도 마찬가지다. ‘롤모델이 누구인가요?’ 아마 유소년농구, 아마농구 현장을 주로 취재하는 기자들의 단골 질문일 것이다. 이제 막 농구를 시작하는 순수한 꿈나무들은 누군가를 동경의 대상으로 삼아 선수로서 꿈을 키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시대 최고의 농구선수는 누구일까. (*본 설문은 KBL 엘리트 캠프에 참가한 고교선수 25명을 대상으로 실시했으며, 지난 11월 18일에 작성됐음을 알려드립니다.)
※본 기사는 농구전문매거진 점프볼 12월 호에 게재되었습니다.
Z세대의 우상은 허훈
한때 중·고교 선수들에게 롤모델, 혹은 프로에서 상대해보고 싶은 선수가 누군지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대부분 비슷했다. 가드 중에서는 양동근이, 빅맨은 서장훈의 이름이 자주 나왔다. 김주성, 김승현이 뒤를 이었고 소수의견으로 오세근, 조성민, 김태술의 이름도 가끔 나왔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변화가 찾아왔다. 고교 유망주들에게서 오세근과 조성민도 선택지에서 사라졌다. 대신 ‘허훈(상무)’을 언급하는 선수가 압도적으로 늘었다. 이번 설문에서도 전성현, 김선형, 최준용, 변준형도 있지만 가장 많이 나오는 대답은 허훈이었다. 양동근·서장훈에서 허훈으로. 고교선수들의 롤모델이 바뀌고 있다. Z세대 농구 유망주에게 허훈은 이 시대의 판타지스타이자 우상과도 같은 존재가 됐다.
이유를 물어보면 ‘프로에서 제일 농구를 잘하는 선수’라는 답이 돌아온다. 무기명으로 진행한 이번 설문에서 A 선수는 “공격에서 슈팅 기술, 드리블 리듬, 어시스트 등 모든 걸 잘한다. 또 자신감도 넘친다. 이런 허훈의 장점을 배우고 싶다”며 허훈을 지목한 이유를 설명했다. B선수는 “단신인데도 다재다능하고 항상 자신감이 넘친다. 이러한 모습이 멋지다”고 했다. C선수는 “무엇보다 농구를 잘 알고 하는 것 같다. 대체적으로 플레이가 과감하고 클러치 상황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가감없이 보여준다”고 허훈의 클러치 능력을 치켜세웠다. D선수는 “180cm의 작은 키로 팀의 에이스를 도맡고 있는 모습이 멋지다”라고 했다. E선수는 “허훈 선수는 가드가 갖춰야 할 덕목을 다 갖추고 있다. 대학 시절부터 몸도 탄탄하고 스피드도 빨랐다. 그런 면에서 허훈 선수를 가장 많이 닮고싶다”고 했다.
프로 5년 차 시즌을 마친 선수가 학생 선수들의 ‘원픽(One Pick)’이 될 정도로 대단한 선수냐고? 허훈이 데뷔 이후 여태까지 리그에서 이룬 것들을 살펴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득점과 어시스트 모두 언제든 많이 할 수 있는 게 허훈의 가장 큰 강점이다. 괜히 ‘단신 용병’이라는 칭호가 붙는 것이 아니다. 1997년 출범한 KBL 역사 속에서 득점(국내선수) 및 어시스트 부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한 경우는 없었다. 주희정(고려대 감독)이 2008-2009시즌 국내선수 득점 2위-어시스트 1위를 차지했을 뿐이다. 지난 2020-2021시즌, 무려 25년 만에 새 역사가 쓰였다. 허훈이 득점-어시스트 부문에서 모두 1위에 오른 것이다. 엄청난 퍼포먼스였다. 질 좋은 패스를 뿌리면서도 가장 많은 득점을 해냈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 밖에도 허훈의 업적은 다 나열하기 힘들 정도다. 2019-2020시즌 2019년 10월 20일, 원주 DB와의 홈 경기에서 역대 두 번째로 9개 연속 3점슛을 성공했고 2020년 2월 9일 안양 KGC와의 원정경기에서는 24점 2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KBL 최초 어시스트 동반 20-20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비록 2019-2020시즌이 코로나19로 인해 조기종료 됐지만, 허훈은 2019-2020시즌 리그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으며 생애 첫 정규리그 MVP를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2021-2022시즌에도 허훈은 평균 15.4점 2.4리바운드 5.4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정상급 기량을 펼친 뒤 상무에 입대했다. 아버지와의 비교도 이제는 식상해졌다. 요즘엔 허훈 인터뷰 때 웬만해선 아버지 얘기가 나오지 않는다. 처음엔 ‘허재의 둘째 아들’로 유명세를 치른 허훈인데 이제는 허재 캐롯 구단주가 허훈의 아빠로 소개된다. 이렇듯 허훈은 시즌을 거듭할수록 농익은 기량에 경험과 대담함, 노련미 등을 축적하고 있다. 이제 그는 KBL 역사상 최고의 선수를 향해 나아간다. 그의 나이 만 27세. 아직 허훈의 전성기는 오지 않았다. 전역 후 더 강해져 돌아올 그의 모습이 더욱 기대된다.
고교생들 마음도 불지른 불꽃슈터
두 번째로 많은 표를 얻은 선수는 ‘불꽃슈터’ 전성현(캐롯)이다. 현재 KBL 최고의 슈터를 꼽으라면 모두가 전성현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189cm라는 크지 않은 신장에도 빠른 슛 릴리즈와 부드러운 슛 터치 그리고 이상적인 슛 폼으로 리그 최고의 슈터로 자리매김했다. 승부처에서 주눅 들지 않는 자신감과 연이어 슛이 들어가지 않더라도 또다시 시도하는 배포까지 슈터가 갖춰야할 모든 덕목을 다 갖췄다. 올 시즌을 앞두고는 오프시즌 FA 자격을 얻어 보수 총액 7억 5천만 원의 조건으로 고양 캐롯으로 이적했다. 김승기 감독과도 재회했다. 캐롯으로 유니폼을 갈아 입은 뒤에는 적응 시간 없이 팀 공격의 1옵션으로 활약 중이다. KBL 최고 슈터답게 3점슛은 비교대상이 없다. 경기당 3.4개의 3점슛을 무려 43.0%의 성공률로 집어넣는다. 1라운드에서는 데뷔 후 처음으로 라운드 MVP에 선정되기도 했다.
3점슛에 관련된 기록도 모두 자신의 이름으로 갈아 치울 기세다. 2021-2022시즌 3점슛 177개를 넣으며 조성원 전 LG 감독(173개)을 제치고 KBL 역대 단일 시즌 최다 3점슛 부문 5위에 올랐고, 연속 경기 3점슛 +2개 기록(42경기)도 보유하고 있다. 또, 54경기 연속 3점슛을 성공시키면서 조성원 전 감독이 가진 KBL 최다 연속 3점슛 성공 기록과 타이를 이뤘다. 이제부터는 전성현이 신기록의 주인공이 될 전망이다. 전성현을 롤 모델로 지목한 고교 선수들 사이에서는 “슈터로서 견제를 많이 받는데, 그런 견제들을 이겨내고 매 경기 좋은 활약을 보여주는 게 멋있고 배울 점이라고 생각한다”, “전성현 선수의 슛터치와 클러치 상황에서 강심장의 면모를 닮고 싶다”, “슛이 매우 좋고 농구 자체를 깔끔하게 한다”, “슛 릴리즈가 매우 빠르고 클러치 상황에서 강심장 면모를 지니고 있다” 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화려함의 상징이 된 ‘플래시 썬’ 김선형
허훈과 전성현 다음으로 많은 표를 얻은 선수는 김선형(SK)이었다. 서울 SK 간판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데뷔 후 지금까지 줄곧 주전 가드로 활약 중인 ‘플래시 썬’ 김선형은 양동근과 함께 듀얼가드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김선형의 등장은 센세이션 그 자체였다. 데뷔 시즌인 2011-2012시즌부터 상대 수비를 헤집는 스피드와 뛰어난 드리블, 운동능력으로 농구 팬들의 눈도장을 찍었다. “우리나라 선수가 저런 플레이를 한다고?”, “이런 플레이는 국제대회에서만 볼 수 있었는데…”라는 등의 탄성을 자아낸 팬들은 김선형이 더블 클러치와 속공 덩크 등 다양한 기술을 구사하며 코트 위에서 연출한 많은 하이라이트 장면에 매료됐다. 그 전까지 국내 가드 포지션 선수한테서 볼 수 없었던 화려한 플레이들이었다.
화려한 플레이를 좋아하는 어린 학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선형을 택한 유망주들은 “이미 한 팀을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이지 않나. 플레이가 화려하면서도 간결하다. 또, 적재적소에 동료들도 살릴 줄 안다. 가드가 갖춰야 할 볼 핸들링, 득점, 패스, 스피드 등 모든 면에서 정상급인데다 창의적인 센스와 외국 선수 앞에서도 득점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가드인 내가 배울 점이 많은 것 같다”, “잘하고 배우고 싶은 점이 많은 선수다”, “빠르고 플레이가 멋있다”라는 의견을 냈다. 사실 김선형이 이렇게 전성기를 오랜 기간 가져갈 것이라고 예상한 이들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김선형은 능력의 상당수가 속공에 특화되어 있다. 스피드, 운동능력을 기반으로 속공 위주의 공격을 펼치는 유형의 가드다. 더구나 발목 수술을 받은 전례가 있는 데다 30대 중반으로 접어드는 나이를 생각하면 스피드와 운동능력의 감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하지만 30대 중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김선형은 리그 정상급 가드로서의 위상을 지켜나가고 있다. 물론 그가 20대 때 보여준 ‘인유어 페이스’와 같은 폭발적인 운동능력을 기반으로 한 플레이는 이제 보긴 어렵다. 그러나 스피드는 여전하다. 노련미가 더해졌고, 지금도 승부처에서 가장 믿음직한 해결사 역할을 하고 있다. 2021-2022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 전 시즌 챔피언 안양 KGC 역시도 김선형이 진두지휘하는 속공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챔피언결정전 MVP에 등극한 김선형은 1997년 남자프로농구 출범 이래 강동희, 서장훈, 김주성, 오세근에 이어 정규리그와 올스타게임, 챔피언결정전 MVP를 모두 수상한 역대 다섯 번째 국내선수가 됐다. 어느덧 30대 중반에 접어든 김선형이지만 변준형, 이정현 등 공격력이 뛰어난 20대 가드들과의 대결에서도 밀리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김선형은 챔피언결정전 우승 후 인터뷰에서 “서른 다섯의 나이지만 아직 신체나이는 20대 후반 정도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이 있다. 후배 선수들이 나를 보며 ‘몸 관리를 꾸준히 잘 하면 30대 중반이 돼서도 저런 플레이를 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내가 새 길을 열고 싶다. 그래서 다음 시즌이 더 기대된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밖에 김시래(삼성)와 안영준(SK)이 2표를 얻어 그 뒤를 이었다. 은퇴 선수 중에서는 양동근과 김승현이 각각 1표씩 받았다. 비록 살아온 세대는 다르지만 여전히 이들의 영향력이 현 세대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D학생은 “우선 나와 신체 조건이 비슷하고 성실함, 경기 조율 능력, 수비 능력을 닮고 싶다. 그리고 프로에서 끝까지 롱런하기 위해서 계속 노력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하는 모습이 존경스럽다”라고 양동근을 택한 이유를 말했다.
김승현을 롤 모델로 삼고 있는 E학생은 “작은 신장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패스 센스 하나로 KBL에서 레전드급 활약을 펼쳤다. 플레이를 보고 있으면 그 자체만으로 눈호강이 되고 여러모로 대단하고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라고 김승현의 패스 센스에 엄지를 치켜세웠다. 뿐만 아니라 롤모델로 NBA 선수인 故코비 브라이언트(전 레이커스)와 스테픈 커리(골든스테이트)를 지목한 이들도 있었다.
BOX_가장 좋아하는 KBL 구단은?
고교선수들을 대상으로 롤모델과 더불어 ‘가장 좋아하는 KBL 구단’이라는 주제의 설문도 함께 진행했다. KBL을 대표하는 명문 팀들이 많은 선택을 받았다. 이에 따르면, 최고 인기팀은 8표를 받은 서울 SK다. 그 이유로는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팀이고 농구 자체가 시원시원한 매력이 있다”, “SK만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좋다”, “내가 좋아하는 빠른 농구를 추구하는 팀이기 때문에 SK 농구를 가장 많이 본다”, “SK 특유의 속공 위주의 농구가 마음에 들고 경기 보는 맛이 난다. 또, 가장 좋아하는 선수인 최준용 선수도 있다”, “롤 모델인 김선형 선수가 뛰고 있는 팀이기 때문이다”라는 의견이 나왔다. KBL 역대 최다 7회 우승에 빛나는 울산 현대모비스는 4표를 얻어 2위에 올랐고, 원주 DB와 안양 KGC, 수원 KT, 고양 캐롯이 2표로 뒤를 이었다.
#사진_점프볼DB, KBL 제공
#설문진행_KBL, 서호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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