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설명서] 현장은 억울함을 알고 있었다…'11년 지기 폭행 사망 사건'
취재설명서
""술에 취해서 왜 싸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지난해 12월 경찰에 체포된 김모(30)씨가 한 진술입니다. 자신의 집에서 11년 지기 친구를 때려 숨지게 한 뒤였습니다. 김씨는 재판 과정에서도 이런 입장을 유지했습니다. 이 주장을 접한 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저게 기억이 안 날 수가 있을까?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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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인 건 김씨가 피해자 A씨와 11년 동안 알고 지낸 대학 동창이며, 결혼식 사회를 봐 준 적도 있을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난 11일 나온 법원의 판결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들의 친밀함을 더 보여주는 사연이 있습니다. 사건 당일 술을 마시게 된 이유입니다. 1심 법원이 추론한 사실들에 근거해 당일 일어난 일을 재구성 해봤습니다.
'11년 지기의 조언에 '보답'하기 위해 만든 술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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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문 등에 따르면 이날 술자리는 김씨가 A씨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만든 자리였다고 합니다. 경찰인 A씨로부터 김씨가 수사 관련 조언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김씨는 지난해 8월 직장 동료의 나체 사진을 몰래 촬영했다는 혐의로 고소를 당해 경찰 조사를 받았습니다. '몰카' 혐의로 형사처벌을 받으면 미국 비자를 받을 수 없어 직장을 잃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던 이씨는 평소 즐기던 술을 3개월 정도 참았습니다.
석 달 뒤 김 씨는 혐의 없음 처분을 받았습니다. A씨의 조언 덕분인지 여부는 판결문엔 담기지 않았습니다. 다만 둘의 마지막 술자리가 된 지난해 12월 만남이 여러 번 조언을 해 준 A씨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기 위한 자리였다고 봤습니다. 1차 술자리에서 소주 4병, 2차에선 소주 2병과 맥주 1명, 3차에서는 위스키 반 병과 칵테일 1잔. 경찰과 검찰 수사에서 드러난 둘의 음주량입니다. 그리고 A씨가 만취하자, 두 사람은 김씨의 집으로 갑니다.
다툼의 시작은 사소한 말싸움…"나 안 취했다니까!"
문제는 집에 가는 과정입니다. 경찰과 검찰이 수사를 하고, 법원이 판결문에 담은 내용에 따르면 이들이 싸움을 벌이게 된 원인은 택시 탑승 문제에서 시작됩니다. 김씨는 애초 약속했던 대로 A씨를 자신의 집에 데려가려고 했지만, A씨가 자신을 취한 사람 취급한다며 거부합니다. 실랑이가 벌어지고, 우여곡절 끝에 집에 왔지만 결국 폭행이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집엔 김씨와 A씨만 있었습니다. 폐쇄회로(CC)TV도 없고, A씨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 말다툼이 어쩌다 죽음까지 이어졌는지, 김씨 외엔 알 수 없었습니다. 김씨도 술 때문에 기억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검찰은 공소장에 "김씨가 A씨의 주사로 인해 쌓인 분노와 '몰카' 촬영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누적된 스트레스의 영향으로 순간적으로 감정이 폭발하여 가격을 시작했다"고 적었습니다.
'혈흔'은 알고 있다
설령 '기억나지 않는다'는 김씨의 말이 사실이라도, 그 날 집에서의 사건을 밝혀준 건 혈흔이었습니다. 법원은 경찰의 혈흔 분석을 판단의 주요 근거로 들었습니다. 사건 현장 주위에 흩어져 떨어진 피를 '비산 혈흔(飛散血痕)' 이라고 부릅니다. 경찰의 혈흔 형태 분석관은 이 비산 혈흔이 떨어져 있는 위치와 모양을 분석해 폭행 당시 상황을 추정했습니다.
예를 들어 침대 프레임 하단에 피해자의 머리에서 날아온 것으로 보이는 모양의 혈흔이 발견됐는데, 이는 김씨가 A씨보다 높은 위치에서 아래쪽에 있는 김씨의 얼굴을 때린 것으로 봤습니다. 또 침대 옆 바닥에서부터 1m 정도 떨어진 방문 근처에서도 가격 순간 날아온 것으로 보이는 혈흔 모양이 관찰됐는데, 이 흔적 역시 김씨가 A씨의 신체를 방바닥으로 강하게 내리칠 때 날아온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법원은 이런 분석들을 토대로 A씨가 저항없이 일방적으로 폭행당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법원은 김씨의 폭행을 "무자비한 폭행"이라고 적시했습니다.
더 엽기적인 '범행 후'와 심신 미약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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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는 판결문의 여러 부분에서 김씨를 비판했습니다. "오랜 기간 절친한 친구라는 걸 믿기 어려울 정도로 공격적이고 잔인하다"며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피해자에 대한 구호 조치 없이 태연하게 몸을 씻고 여자 친구의 집에 가서 잠을 잔 건 매우 냉혹하고 생명경시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단란한 가정을 꾸린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미래를 잃어버리게 된 피해자의 배우자와 부모의 절망은 가늠하기도 힘들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양형 기준상 징역 10년~16년 형을 받는 '보통 동기 살인' 판결을 하면서 형을 2년 더해 징역 18년을 선고했습니다.
판사의 설명처럼 김씨는 A씨를 때린 뒤 몸에 묻은 피를 씻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샤워를 했습니다. 이후 정신을 잃고 피를 흘리는 A씨를 그대로 둔 채 밖으로 나와 여자 친구의 집에 가 다시 샤워를 한 뒤 잠을 잤습니다. 친구를 죽을 때까지 때린 것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이후 상태를 살피거나 구급대원을 부르는 행위조차 하지 않은 건 이해하기 더 힘든 부분입니다.
이런 행동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법원은 살인의 고의를 인정했습니다. 김씨는 재판 과정에서 "때린 건 인정하지만 살인의 고의가 없었고, 술에 취해 심신 미약 상태였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의 판결을 가장 아프게 지켜 본 건 유족들이었을 겁니다. 아직 판결이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고의성이 있는 잔인한 살인을 인정하고도, 징역 18년형이 적절한지, 우리 사회의 강력 범죄 양형 기준 자체가 너무 낮은 것은 아닌지 하는 근본적인 의문도 듭니다.
취재를 한지 며칠이 지난 지금도 가장 뇌리에 깊게 남아 있는 건 피해자 어머니의 말입니다.
"우리 아들은 죽었는데 징역 18년이 뭡니까."
◆ 관련 리포트
'11년지기 친구 살해' 징역 18년…"공격적이고 잔인한 범행"
→ 기사 바로가기 : http://news.jtbc.joins.com/html/838/NB11954838.html
송우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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