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정유미 "나는 괜찮은가, 그런 생각 많이 했죠"
23일 개봉 영화 '82년생 김지영'
페미니즘 소설 손꼽힌 동명 원작
주연 정유미 악성댓글 시달리기도
"소모되기 아까운 진심 담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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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엄마, 아내로 살아가는 게 행복하기도 해요. 근데 가끔은 어딘가 갇혀있는 기분이 들어요.” 23일 개봉하는 영화 ‘82년생 김지영’(감독 김도영)에서 어린 딸을 키우는 30대 지영(정유미)은 이런 고백을 어렵게 털어놓는다. 어릴 적엔 세계 일주를, 대학 졸업하고 번듯한 직장에 취직했을 땐 일과 결혼생활을 완벽히 해내는 커리어우먼을 꿈꿨지만, 출산 후 닥친 현실은 육아에 치어 사는 경력단절 여성이다. 그런 그가 언젠가부터 가끔 ‘다른 사람’이 된다. 친정엄마, 외할머니, 대학 선배…. 주변의 여성들에 빙의한 듯 속의 말을 쏟아내는 아내를 보며 남편 대현(공유)은 그저 당황할 뿐이다. 그는 혹여 상처가 될까 봐 지영 자신에겐 그런 사실을 차마 말해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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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자 조남주 "소설보다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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꾹꾹 견뎌왔을 지영도 안쓰럽거니와, 그런 마음을 뒤늦게 깨닫는 가족들 모습도 공감 가게 그려진다. 2016년 출간돼 ‘페미니즘 소설’로 불리며 100만 부 이상 판매된 동명 소설이 토대다. 여성의 굴레를 호소하는 데 집중했던 원작에서 한 걸음 나아가 보다 입체적으로 그려진 주변 인물, 위로에 초점 맞춘 결말이 돋보인다.
이 영화로 장편 데뷔한 김도영 감독은 “화목해 보이는 가정에도 아픔은 있을 수 있다. 개인의 캐릭터가 특별히 나빠서 상처 받기보단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사회, 구조, 시스템, 관습을 짚고 싶었다”면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빌어 얘기할 수밖에 없었던 지영이 자신의 말을 하게 되며 성장하는 이야기를 그리고자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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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 같은 삶은 살아보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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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않았고 마음이 몽글몽글했어요. 시나리오 봤을 때만큼의 느낌이 전달된 것 같아서 감사하고 다행이죠.” 주연 배우 정유미(36)가 첫 시사 후 들려준 감상평이다. 개봉 전 16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1년여 전 캐스팅이 알려진 순간부터 “페미니즘 영화에 출연한다”는 이유로 일부 악성 댓글에 시달렸지만 의연하게 대처해온 그다.
“용기 있다”고 하자 그는 “배우로서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를 계속해서 만드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30대 여자지만, 지영 같은 삶은 살아보지 않았는데 주변에 물어보니 그렇게 지내온 분들이 많았다”는 그는 “이 캐릭터를 잘 표현해냄으로써 같이 이야기 나누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했다. “엄마, 할머니, 가족들 생각이 많이 났어요. 제가 가족한테 무심한 딸이거든요. 고향이 부산이라 떨어져 사는데, 멀리서나마 제가 이런 마음으로 이런 영화를 찍었단 걸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Q : 원작 소설부터 논란이 컸던 작품이다.
A : “시나리오를 먼저 읽고 소설을 봤는데 왜 이렇게 논란이 될까, 궁금했다. 다양한 시각이 있을 수 있겠다고 이해해보려고 하는 상태다. 인터넷에 드러난 의견이 전부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Q : 제안받고 부담감은 없었나.
A : “그때 받은 여러 시나리오 중 제일 내가 이야기해보고 싶었던 작품이다. 욕심나도 투자가 안 되거나, 주연 자리가 부담스러워 일부러 피한 작품도 있는데 이 작품은 많은 것이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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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괜찮은가, 돌아보게 됐죠
“지영이 보편적인 캐릭터라 생각했다”는 그는 “오히려 생각이 너무 많으면 방해가 된다. 촬영하는 매 순간에 집중하는 게 먼저였다”고 했다. 부부 역의 공유와는 ‘도가니’ ‘부산행’에 이어 세 번째 호흡을 맞춘, 평소에도 친한 관계. 정유미의 가식 없는 생활연기를 두고 그는 “NG인가, 분간이 안 갈 만큼 익숙한 듯한데 익숙하지 않게 애드리브처럼 반응하는 게 있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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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 튈 수 있을 빙의 장면도 평범한 일상의 한 순간처럼 표현했다. 영화에서 지영의 이런 증상이 처음 보이는 건 명절날이다. 홀로 부엌일을 도맡던 그는 시어머니에게 “사부인” 하며 자신의 친정엄마가 딸을 위해 했을 얘길 담담하게 건넨다. 시댁 식구들은 얼어붙지만, 정작 자신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Q : 빙의될 때 연기 톤은 어떻게 잡았나.
A : “확 (과장되게) 하면 흐름을 오히려 방해할 것 같았다. 감정을 전하는 게 먼저였다. 지영의 입을 빌려서 엄마나 외할머니, 친구가 하는 이야기인데, 지영의 마음속에 늘 있었던 감정이라 생각했다. 어릴 적 지영이 (오빠들을 공부시키느라 대학을 포기한) 엄마한테 ‘선생님 되고 싶었는데 왜 안 됐어?’ 묻는 장면이 되게 인상 깊었는데, 그런 것이 켜켜이 쌓여 있다가 커서 힘든 상황이 닥치니까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지 않았을까. 현장에서 여러 번 촬영하며 와 닿는 톤을 찾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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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촬영하며 원작 소설을 자주 읽었다고.
A : “시나리오보다 묘사가 더 세밀한 장면들이 있다 보니 매일은 아니고 막막할 때.(웃음) 성경책처럼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고 가면 뭔가 쓱 오는 느낌이 있었다. 다른 작품 때도 촬영에 집중이 좀 안 되면 전날 밤에 시나리오를 대사‧지문까지 손으로 옮겨 적곤 한다.”
Q : 가장 공감했던 장면은.
A : “특정 순간보단 일단 나부터 돌아봐야겠다, 나는 괜찮은가,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지영의 삶이 육아 혹은 경력단절 여성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누구든 어딘가에 갇힌 듯하거나 상처받을 때가 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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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맘 감독이 빚은 현실 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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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이 집안일로 아픈 팔목에 아대를 하고, 공원 벤치에 앉아 유모차를 발로 까딱이는 현실 육아 장면들은 실제 아들 둘을 둔 워킹맘 김 감독이 만든 디테일이다. 10년 넘게 대학로‧충무로서 배우로도 활동해온 김 감독은 지난해 각본‧연출한 단편 ‘자유연기’에선 독박 육아로 연기를 포기했던 30대 여성 배우가 재기를 꿈꾸는 여정을 담아 미쟝센단편영화제 최우수작품상‧관객상 등을 수상했다.
정유미가 그의 첫 장편에 출연을 결심한 데도 이 단편을 본 것이 계기가 됐다. “배우의 연기, 연출까지 너무너무 진심이 느껴졌다. 그런 영화를 만든 분이라면 만나보고 싶었다”고 돌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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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기저귀 보니까 엉덩이에 ‘커서 효도할게요’ 이렇게 적힌 게 있어요. 이번 영화를 해보니 정말 어머니들이 대단하세요. 아이 있는 친구들 ‘수고했다, 고생했다’ 싶었죠. 큰 이해라기보다 이제야 알게 돼서 미안한 마음도 들었어요.” 그의 말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으론 지영이 등 뒤에서 ‘맘충(아기 엄마를 비하하는 말)’이라 수군대는 사람에게 “왜 다른 사람을 상처 주려 애쓰냐”고 일갈하는 순간을 들었다.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기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돼?” 소설에서 이렇게 슬퍼했던 지영이 영화에 와 달라진 모습이다.
김 감독은 “2019년을 살아가고 있는 김지영들에게 괜찮다, 더 좋아질 거란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지영이 어머니보다 지영이가, 지영이보다 딸 아영이가 좀 더 좋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 거란 바람이 있었다”면서 “첫 관객인 조남주 작가의 ‘소설보다 한 걸음 나아간 것 같다’는 문자가 선물 같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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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말하는 당신 "저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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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이 막말하는 사람에게 “저를 아세요?” 하는 장면은 이 영화를 공격하는 ‘악플러’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하다.
Q : 이번 영화 출연 결정 후 ‘악플’에 시달려왔다.
A : “정말 많은 댓글이 있었다. 다 읽지를 못하겠더라. 그래도 다양한 자기의 이야기가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내가 해야 하는 일은 그런 것들을 넘어 이 영화의 진심이 그대로 전달되게 하는 것이다. 이걸(자판) 막 두드리고 있지만 그게 세상의 다는 아니다. 논리적인 비판과 비난은 다르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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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자신에 대한 지라시 유포자를 고소했던 일에 대해선 “내가 잘못하지 않은 일로 그런 행위를 해야 한다는 게 너무 괴리가 커서 현실감이 없었다”며 잠시 눈물을 비치기도 했다. 또 “이런 이슈로만 소모되기엔 영화에 담긴 진심이 너무 아깝다”고 했다.
“영화를 다시 한번 볼 계획이에요. 가족이나 지인, 친구들한테 제가 몰랐던 여러 얘기를 듣고 나서 다시 보면 어떤 감정이 들까, 기대도 돼요. 연기한 당시엔 생각 못 했던 인물이 한참 지나 잘살고 있나, 궁금해질 때가 있는데 이번 영화도 조금 지나보면 더 보이는 게 생길 것 같아요.”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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