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4억원 쏟은 평창 스키장, 6개월 방치에 흉물 됐다
겨울올림픽 그후 6개월 점검
산림 복원 계획했던 ‘정선스키장’
아시안게임 재활용론 일며 방치
현장선 “태풍 오면 산사태 가능성”
강릉빙속경기장도 “생활체육 활용”
철거 접었지만 운영주체 못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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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겨울올림픽이 끝난 지 6개월이 흘렀다. 수천억원대의 예산을 들여 지은 경기장과 시설은 어떻게 됐을까. 중앙일보 취재팀이 최근 강원도 정선과 강릉·평창의 올림픽 관련 시설을 점검해봤다. 평창올림픽 경기장은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하얀 코끼리(white elephant·돈만 많이 들고 쓸모없는 애물단지를 일컫는 말)’가 돼 있었다.
지난 7일 강원도 정선군 북평면 숙암리 정선알파인경기장. 지난 2월 ‘스키 여제’ 린지 본(34)과 ‘스키 요정’ 미케일라 시프린(23·이상 미국)이 명승부를 펼쳤던 곳이다. 올림픽 이전엔 수령 500년이 넘는 고목과 희귀식물이 즐비해 ‘생태계의 보고(寶庫)’로 불렸던 장소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적 수준의 스키장도, 울창한 숲도 아닌 ‘흉물’이 돼 있었다. 공사가 중단된 채 방치돼 거대한 자갈밭이나 진흙펄 같았다. 슬로프가 위치한 가리왕산 중턱에 올라보니 포클레인 삽 등 중장비가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곤돌라는 운행을 멈춘 지 오래였다. 산비탈 경사면 중간중간에 세워진 제설(製雪)용 장비 덕분에 이곳이 스키장이 있던 자리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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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올림픽 12개 경기장 중 가장 많은 건설비(2034억원)를 쏟아부은 이곳은 ‘경기장 시설 존치’와 ‘자연림 원상복구’를 놓고 6개월째 이해 당사자들의 줄다리기가 한창이다. 당초엔 올림픽이 끝난 뒤 원상복구를 할 계획이었다. 정부와 강원도는 “올림픽이 끝나면 슬로프 부지 55% 이상을 복구하고 자연 생태계를 회복하겠다”면서 환경단체를 설득했다.
하지만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 분위기가 바뀌었다.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난 3월 국회에서 “정부가 예산을 지원해서라도 가급적 원래 목적(스포츠 시설)에 부합하는 쪽으로 활용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말한 게 신호탄이었다.
강원도는 2021년 겨울 아시안게임 남북공동유치 도전을 선언하며 “원상복구 시기를 늦추자”고 제안했다. 대한스키협회 등 경기 단체들도 “전 세계를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수준 높은 활강 경기장을 채 닷새도 쓰지 않고 없애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선군은 “산림으로 복원하더라도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게 곤돌라 등의 시설은 남겨둬야 한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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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 부지 주변과 인근 59번 국도변에는 이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플래카드가 즐비했다. 그러나 환경부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정선 가리왕산 생태 복원을 위한 양묘 사업(나무를 옮겨 심는 일)을 제대로 시행하지 않는 등 환경영향평가법을 위반했다”며 지난달 5일 강원도에 과태료 1000만원을 부과했다.
복원과 존치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면서 스키장이 그대로 방치된 탓에 안전사고가 우려된다. 지난 5~6월 이 일대에 집중호우가 내리자 슬로프 곳곳의 흙과 자갈이 무너져 내려 여기저기에 큼지막한 고랑이 생겼다. 인근 주민 6명이 산사태를 우려해 긴급 대피하기도 했다. 강원도가 급히 산 중턱 두 군데에 거대한 구덩이를 파고, 지하수 배출 수로를 만들고 있지만 미봉책이라는 지적이다.
취재진이 슬로프 부지 상단부에 올라가 보니 상황은 더 심각했다. 주변 토사가 유실돼 위험해보이는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수로 공사 중이던 현장 관계자는 “경기장으로 남기든 숲으로 복원하든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한다. 가을철에 태풍 몇 번 불면 대규모 산사태가 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사후 활용 방안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건 정부와 강원도의 갈등 때문이기도 하다. 정선 경기장 복원에는 500억~1000억원 가까운 비용이 들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산업전략연구원에 따르면 경기장 기능을 유지할 경우 매년 37억원 안팎의 적자가 예상된다. 이 비용을 누가 얼마나 댈지가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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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4억원을 들여 신축한 강릉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도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지 오래다. 올림픽 기간 신기록이 10개나 쏟아질 정도로 완성도 높은 경기장이지만 얼음을 모두 걷어낸 뒤 콘크리트 바닥이 훤히 드러난 현재 모습은 거대한 창고에 불과했다.
그동안 냉동물류센터, 실내 테니스장, 컨벤션센터, 경빙장, 국가대표 훈련 시설 등 다양한 사후 활용 방안이 거론됐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정선알파인경기장·강릉하키센터와 더불어 관리 주체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원 7명이 상주하며 가끔 청소하고 조명시설 등 주요 기능을 점검하는 게 ‘올림픽 유산 관리’의 전부다.
번듯한 건물이 쓰임새 없이 방치되는 상황에 대해 정부와 강원도 중 어느 쪽도 선뜻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강릉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을 빙상장으로 쓰면 매년 최소 14억원 이상의 적자가 예상된다. 아이스하키 경기가 열렸던 강릉하키센터도 ‘1064억원짜리 창고’ 신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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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보 강원도청 문화관광체육국장은 “당초 철거(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 또는 이전(하키센터)할 계획이었지만 정부가 스포츠 관련 시설로 사용하겠다며 존치 결정을 내렸다. 당연히 운영비 지원이 함께 이뤄져야 하는데 정부는 그 부분에 대해 차일피일 미루기만 한다”며 “예상 적자 금액의 75%를 보전해 주겠다던 정부가 올림픽이 끝난 뒤 55%로 비율을 낮추더니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며 입장을 바꾼 것도 난감한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올림픽 청산 업무를 담당하는 이해돈 문체부 국제체육과장은 “국제스포츠대회를 위해 지은 경기장은 해당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게 원칙”이라며 “평창올림픽 경기장은 국가대표 훈련, 국제대회 개최 등에 대해서만 부분적으로 재정 지원이 가능하다는 게 정부의 일관된 입장”이라고 말했다. 이어 “평창 관련 시설의 객관적인 운영비 산출과 합리적인 사후 활용 방안 마련을 위해 강원도가 연구 용역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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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올림픽조직위원회에 몸담았던 한 관계자는 “정부와 강원도 공무원들 사이에 경기장과 시설 사후 활용 방안은 ‘뜨거운 감자’나 다름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결정을 미루고 있다”며 “개·폐회식이 열렸던 올림픽플라자의 경우 1100억원을 들여 지은 건축물이지만 인구 4000명에 불과한 작은 마을(평창군 횡계리)에서 이를 적절히 활용할 수 없어 과감하게 해체했다. ‘예산 낭비’란 지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과감한 결단으로 주목받고 있다”고 말했다.
정선·강릉·평창=송지훈·박린 기자 mil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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