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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부터 극단적 절약···마흔 은퇴 '파이어 족' 확산

극단적 절약으로 소득 70% 저축

100만~200만 달러 모아 퇴사

고학력·고소득 계층에서 유행

“실천 방법 제한적” 반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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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식비 8만4000원(미화 75달러). 물가 높기로 유명한 미국 시애틀에 사는 변호사 실비아 홀(38)은 매일 ‘짠 내 나는’ 생활을 한다. 돈을 아끼려고 싱싱한 과일과 채소 사 먹기를 포기했다. 마트에 가면 갈색으로 변한 ‘떨이’ 바나나만 집는다. 채소도 폐기 처분이 임박한 할인 상품을 산다. 걸어서 출근하고, 넷플릭스(온라인 유료 동영상 서비스) 아이디를 친구에게 빌려 TV 프로그램과 영화를 공짜로 본다.

고소득 전문직인 그가 눈물겨운 살림살이를 꾸리는 사정은 뭘까. 실비아에게는 ‘조기 퇴사’라는 원대한 목표가 있다. “내 맘대로 살고 싶어요. 65세까지 은퇴를 기다릴 필요가 없죠.” 그의 꿈은 2년 뒤 퇴사다. “40세가 되는 2020년 직장을 그만두기 위해 세후 수입의 70%를 고스란히 저축한다”고 말했다. 목표 저축액은 200만 달러(약 22억5000만원). 최소한의 지출만 허용하며 허리띠를 졸라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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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어(FIRE)’ 운동. ‘경제적 자립(Financial Independence)’을 토대로 자발적 ‘조기 은퇴(Retire Early)’를 추진하는 사람들 또는 그런 움직임을 일컫는 말이다. 네 단어의 머리글자를 딴 합성어다. 지난 3일(현지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실비아와 같은 파이어 족(族)을 소개했다. 이르면 20대, 늦어도 40대 초반에 퇴직해 은행 빚이나 소비생활에 따른 스트레스에서 벗어난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이다.

파이어 운동은 1990년대 미국에서 처음 등장했다. 온라인을 통해 급속히 퍼지게 된 계기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다. 이후 이어진 경기 침체기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밀레니얼 세대(1981~96년생)가 이에 주목했다. BBC방송은 2일 “유례없이 길고 지루한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밀레니얼 세대를 중심으로 파이어 운동이 영국·호주·네덜란드·인도 등지로 확산했다”고 소개했다.


파이어 운동의 기본 개념은 ‘짧게 벌고 적게 쓰기’다. 불황을 타고 유행한 데서 짐작할 수 있듯,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며 풍요로운 은퇴 생활을 누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실비아같이 아껴 쓰는 생활을 퇴사 후에도 계속 유지하는 게 기조다.


뉴욕타임스(NYT)가 최근 소개한 리킨스 부부는 일하지 않는 삶을 위해 고급 주택과 외제 차를 포기한 예다. 방송프로그램 제작사 관리직이던 남편은 조기 퇴직을 결심하자마자 아내에게 “BMW 자동차를 없애고 주 3~4회 하는 외식도 끊자”고 제안했다. 고소득 맞벌이 부부였던 이들은 파이어 대열에 합류한 뒤 캘리포니아 해안가 저택을 떠나 집값이 싼 오리건주로 이사했다. 아내는 “과거에는 삶의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일의 노예로 살았는데, 아이를 낳은 뒤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고학력, 고소득 전문직을 중심으로 구두쇠 생활이 주목받게 된 이유는 뭘까. 이들은 비싼 의료보험에 가입하는 대신 폴란드까지 가서 저렴한 가격에 치아 스케일링을 받고, 자녀를 값싼 공립학교에 보내는 삶을 선택한다. WSJ는 이 같은 현상을 두고 “성취감을 주지 못하는 직장에 대한 불만과 전통적인 사회보장제도의 붕괴, 불황 속에서도 좀 더 안정된 삶에 대한 열망”이 파이어 운동을 불러일으켰다고 분석했다. “부모 세대가 65세에 준비 없이 은퇴한 뒤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본 젊은이들”이 파이어 운동의 주축이 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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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어 운동을 둘러싼 논쟁도 적지 않다. 투자 전략가인 자레드 딜리언은 35~40세가 될 때까지 소득의 절반 이상을 저축·투자하라는 ‘극단적인 절약’에 대해 철학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블룸버그 칼럼에서 “파이어 족이 극단적으로 저축하는 이유는 남은 50여년간 일하지 않고 삶을 즐기기 위해서인데, 극단적으로 적은 예산으로 어떻게 즐겁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고 지적했다.

파이어 유행이 함부로 따라 해서는 안 될 위험한 시도라는 현실적 조언도 나온다. 리오넬 로랑 칼럼니스트는 “뉴욕타임스 등이 소개한 사례가 너무 극단적”이라며 “자칫하면 불(fire)에 델 수 있다”고 말했다. “부부가 5년간 절약해서 120만 달러(약 13억 4800만원)를 모았다는데, 억대 연봉을 받으면서 방 4개 달린 집에 사는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해석이다. 애초에 가진 게 있어야 줄일 것도 있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파이어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이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최근 파이어가 주목받고 확산하는 이유는 미국 증시 강세 현상과 무관치 않다. 미·중 무역전쟁으로 단기 조정 국면에 접어들긴 했지만, 올해 뉴욕 증시는 증시 역사상 가장 긴 강세장 기록을 갈아치웠다. 주식 수익률이 뒷받침될 때는 은퇴자가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지만, 수익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설 경우에는 얘기가 달라진다.


파이어 운동은 여전히 국경을 넘나들며 보폭을 넓혀가고 있다. 전문가의 지적이 어떻든 “소비는 행복과 연관이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면서다. “파이어의 본질은 대부분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것”이라는 한 영국 파이어 족의 말이 이를 대변한다. 불필요한 소비에서 벗어나자는 가치관의 전환이 이 현상의 핵심이라는 의미다. WSJ는 파이어 운동이 “저축 성향이 강하지 않은 미국인들에게 저축과 장기 투자에 관한 생각을 심어주고 있다”면서 긍정적인 측면을 소개했다.


남들과 다른 삶을 좇는 사람들의 행렬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팟캐스트나 블로그, 소규모 강연 모임 등이 주 소통 창구다. 대표 블로거 ‘미스터 머니 머스태쉬(Mr. Money Mustache)’는 구글 집계 기준으로 30일간 조회 수가 250만 회를 넘는다. 파이어 생활 팁을 담은 유명 팟캐스트(‘Choose FI’)는 지난해 업로드 이래 현재까지 190개국에서 520만 회 다운로드를 기록 중이다.


심새롬 기자 saer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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