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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독점에…한국 고속철, 값은 치솟고 경쟁력은 뒷걸음

지난해 코레일은 2025년 개통예정인 인천발 KTX와 수원발 KTX에 투입할 고속열차 2편성(16량)을 발주했다. 예산은 모두 822억원으로 한량당 51억원이 조금 넘는 가격을 책정했다. 2016년 발주 때와 비교하면 10억원가량 오른 금액이다.


그러나 8월과 9월, 12월 등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된 입찰은 참가업체가 한 곳도 없어 모두 불발됐다. 국제경쟁입찰로 진행됐지만, 물량이 워낙 적은 탓에 외국업체는 애초 참여가 어려웠다. 국내에선 현대차그룹의 계열사인 현대로템이 유일하게 고속열차 제작이 가능하지만, 가격이 너무 낮다는 이유로 응찰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현대로템은 예정가보다 20억원이나 높은 한량당 71억원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로템, 한 량당 20억 더 불러

인천발·수원발 KTX 입찰 무산

고속철 독점 속 기술개발은 부진

경쟁체제 구축 없인 발전 힘들어

외환위기 뒤 열차제작사 통폐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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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고속열차 G-7을 개량해 만든 KTX-2, 지금의 KTX-산천의 출고식 장면. [중앙일보]

결국 입찰은 무산됐고, 코레일은 조만간 인천발·수원발 KTX 16량을 포함해 모두 136량(17편성)의 고속열차를 발주할 계획이다. ‘동력집중식’인 기존 KTX나 KTX-산천과는 다른 ‘동력분산식’인 EMU-320을 도입하게 된다. 동력집중식은 맨 앞의 동력차가 뒤에 연결된 객차를 끌고 달리는 방식인 반면 동력분산식은 별도의 동력차 없이 객차 밑에 모터를 분산 배치해 주행하며 가·감속이 뛰어나다.


이 같은 입찰에 얽힌 뒷얘기는 최근 국회 허종식 의원(더불어민주당)이 배포한 국정감사 자료에서도 확인됐다. 이에 따르면 현대로템이 사실상 독점인 국내 고속열차 시장에서 입찰을 고의로 무산시킨 뒤 예정가보다 높은 가격에 계약을 체결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다.


국내 고속열차 시장에서 현대로템이 독점적 지위를 누리게 된 건 1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5년 말 코레일이 실시한 신규 고속열차 10편성 입찰에서 순수 국내기술로 개발한 ‘한국형 고속열차(일명 G-7 열차)’가 프랑스 알스톰사의 테제베(TGV)를 누르고 계약을 따냈다. 이 G-7 열차를 개량해 납품한 열차가 ‘KTX-Ⅱ(투)’, 지금의 ‘KTX-산천’으로 제작사가 바로 현대로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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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현대로템이 ‘동력 분산식 고속차량(EMU-320) 출고기념식’을 가졌다. [연합뉴스]

당시 현대로템은 국내 유일의 열차제작사였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열차를 만드는 회사는 대우중공업, 현대정공, 한진중공업 등 3곳이 있었다. 하지만 외환위기 뒤인 1999년 7월 정부가 철도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겠다며 세 회사의 철도차량 사업 부분을 떼어내 하나로 합쳤다. 철도차량 제작 분야에서 국내 독점인 ‘한국철도차량(주)’가 만들어진 것이다.


2년 뒤 이 회사는 현대차그룹으로 인수돼 2002년 1월 ‘로템’으로, 2007년엔 현재의 이름인 ‘현대로템’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때부터 현대로템은 국내 철도시장에서 그야말로 독점적인 지위를 누렸다. 고속열차 국산화,전동차 수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적을 보이기도 했지만, 독점으로 인한 부작용이 적지 않다는 비판도 상당했다.


이런 사실은 2009년 말 서울도시철도공사(현 서울메트로)가 국내 지하철 운영기관으로는 처음으로 전동차 자체제작을 추진한 배경과도 연결된다. 내부적으로 현대로템이 독점이다 보니 품질에 비해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불만이 큰 요인이었다고 한다. 다행히 수년 전부터 현대로템이 누리던 열차시장 독점체제는 상당 부분 해소되고 있다. 비록 규모는 현대로템보다 훨씬 작지만, 우진산전과 다원시스라는 두 회사가 철도차량 제작에 뛰어들면서 새롭게 경쟁체제가 형성된 것이다.

테제베 눌렀던 기술력은 어디로

이런 와중에도 현대로템이 줄곧 철옹성을 구축하고 있었던 게 바로 고속열차 분야다. 중소기업인 우진산전이나 다원시스가 쉽게 도전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고속열차 분야의 독점에도 균열이 생길 조짐이 나타났다. 코레일이 발주할 예정인 고속열차 입찰에 우진산전이 스페인의 열차제작사인 탈고와 손잡고 참여할 의사를 밝힌 것이다.


그러자 현대로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국내 열차부품업체들이 “(고속열차 입찰에서) 해외 업체의 참여를 무분별하게 허용하면 철도산업 생태계가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국회 앞에서 해외 업체의 입찰참여를 막아달라며 집회까지 열었다.


사실 스페인 마드리드에 본사를 둔 탈고는 매출 규모나 기술 수준으로 보면 세계 정상급 기업은 아니라는 평가다. 게다가 코레일이 발주하려는 동력분산식 고속열차는 탈고의 주력 종목도 아니다. 그런데도 부품업체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인 건 왜일까. 익명을 요구한 철도업계 관계자는 “현대로템이 탈고와의 기술 및 가격 경쟁에서 불리한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이 많다”며 “현대로템과 연관이 깊은 부품업체들이 그래서 위기감을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프랑스·독일 등에선 고속철 입찰 때 국내 철도산업 보호를 위해 자국기업에만 참여를 허용한다는 주장도 일부에서 나오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국토교통부와 코레일, SR 등에 따르면 유럽 국가들은 자신들이 제시한 형식승인, 즉 기술기준만 통과하면 입찰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오래전 정상급의 알스톰을 눌렀던 기술력은 사라지고, 이젠 해외 중위권 업체와의 경쟁도 버거워할 만큼 우리 고속철의 수준이 퇴보했다는 느낌이다. 기술개발과 투자는 소홀히 한 채 독점적 지위를 향유하며 납품가만 올리는 방식으로는 더는 국제적 경쟁력을 갖추기 어렵다. 그래서 독점의 틀은 깨야만 한다. 경쟁이 곧 경쟁력이다.


강갑생 교통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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